동시대반시대

가거라. 잘난 남자 만나고픈 끈덕진 욕망이여!

- 황진미

영악한 계집애들은 20대 초반부터 결혼을 염두에 두고 남자를 만난다. 미리미리 대학이나 집안 등을 충분히 고려해가며, ‘장래성이 있는’ 남자와 연애를 한다. 하지만 20대 열정에, 그러기는 어디 쉬운 일이랴. 필이 통하는 애인과의 ‘이대로 죽어도 좋을 사랑’을 희구하는 게 몇 배는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내 인생이 뭔지 살아보지도 않고 결혼부터 생각하는 것은 ‘배운 뇨자’로서 비겁한 노릇이란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내 인생이 뭔지, 똥인지 된장인지 알아봐야겠어!” 그러나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취업 전선에서 발버둥 치노라면, 어느새 ‘영원히 올 것 같지 않던 서른 살’이 성큼 다가와 있다. 몇 번의 서글픈 연애가 있었고, 개중에는 진짜로 같이 살고 싶은 놈도 있었지만, 돈도 직업도 없는 남자와 같이 살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아 접었던 ‘언니들’은 이제 고민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전문직 남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이라도 접하는 날엔 ‘부러우면 지는 거다’를 혼자 되뇌며 입술을 깨문다. 마음 한 구석에는 ‘(놀 거 다 놀아도) 결국 결혼은 잘한 여자’가 되고픈 욕망이 늘 자리하고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욕망을 지닌 나를 이해해주고, 사회적으로도 번듯한 남자를 만나 결혼에 성공했습니다.’가 미래완료형으로 기술되기 바라는 것이다.

이런 수많은 ‘언니들’이 12개월 할부로 카드를 긁어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한다. 거기에 가면 뭔가 과학적인 시스템과 그들만의 축적된 노하우로 내게 꼭 맞는 남자를 소개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만은 아니다. ‘누가 괜찮은 남자 좀 소개시켜주지 않나?’하는 구차한 눈빛을 주위에 흘리고 다니느니, 내 돈 내고 ‘공정하게’ 원하는 남자를 소개받는 편이 떳떳하겠다 싶은 것이다.

등록을 하러 가면 정말 반갑게 맞아준다. 조용한 방으로 안내하여 나의 신상을 적을 체크리스트를 준다. ‘사실혼 관계를 숨기면 사기죄로 고발될 수 있습니다.’ 라는 문구와 ‘상대가 사실혼을 숨겼을 경우 회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같은 문구는 모순되지 않나? 같은 잡생각에 잠시 빠지다가, 얼른 키와 몸무게 항목에 약간 올려치고, 슬쩍 깎아낸 수치를 적어나간다. 그때 직원이 상대방 체크리스트를 들고 들어와 온화한 미소로 원하는 조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처음엔 약간 수줍게 “어 뭐…그러니까 따뜻한 사람이요…영화 같은 걸 좋아하면 좋겠는데…” 같은 부질없는 소리를 하다가,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라는 빈축을 산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조건을 말하세요.”라는 직원의 단호한 어투에 이내 분위기를 파악한다. “전문직에, 나이는 3살 정도 많고….키는 175는 되어야 할 것 같구, 연봉은 한 5천정도…학력은 당연히 저보다 좋아야지요.” 같은 대답을 줄줄 읊어대곤, 나의 속물스러움에 짐짓 놀란다. 하지만 이것도 어차피 공짜가 아니며, 상당한 거금이 드는 구매행위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본전을 뽑아야한다’는 합리적인 소비자 모드로 전환된다. “전 집안은 안 봐도 지역은 보거든요. 제가 서울사람이라 지방 사람하곤 잘 안 맞더라고요. 장남은 곤란할 것 같고, 가능한 종교도 같았으면 좋겠어요.” 하며, 희망사항을 꼼꼼히 일러준다. 이제 내가 원하는 조건을 다 말했으니, 곧 맞는 사람을 찾아 주리라 기대하며 일어선다.

며칠 후에 ‘당신의 신원조회가 끝났고, 전문 코디네이터에 의한 심층면접이 있으니 다시 들려 달라’는 연락이 온다. ‘심층면접? 지난번 접수받았던 사람은 뭐지? 진짜 전문가가 심리테스트라도 하나? 정말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는 개성을 파악해서, 나한테 꼭 맞는 사람을 찾아주려나?’ 싶어 다시 사무실을 찾는다. 그런데 전문가라는 사람이 별로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작성한 두 장의 체크 리스트와 그간 떼어온 내 신원증명 보면서, 나를 아래위로 훑으며 형식적인 질문을 던질 뿐이다. 조금 뒤 “실물이 더 예쁘시네요.”라는 입에 발린 칭찬을 듣고서야 알아차린다. ‘저 사람은 내 외모 등급을 매기고 있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미장원에 들려오는 건데…’ 잠깐의 후회를 하다가, 표정으로라도 등급을 올려볼까 싶어 해시시 웃는다.

드디어 소개전화가 온다.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프로필을 읊어주며, 이 사람과 만날 것인지를 물어온다. ‘음…회원 수가 많다더니, 정말 전문직에 학력도 괜찮은 사람을 소개시켜주네’ 하는 마음에, 당연히 만나겠다 답하고 약속시간을 잡는다. 부푼 기대와 잘해보리라는 다짐으로 새 옷도 사고 미용실에 몇 만 원쯤 아무렇지도 않게 쾌척하고 나간 그 자리에는 절묘하게도(!) 내가 제시한 조건에서 딱히 벗어나진 않지만 여타의 이유로 정말 ‘영~아닌’ 남자가 나와 있다. 허탈한 마음을 ‘첫 술에 배부르랴’ 는 위로의 자문자답으로 추스르는 순간, 코디네이터로부터 전화가 온다. 그 사람을 또 만날지, 다른 사람을 소개받을지 묻는 것이다. 약간 망설이다 다른 사람을 소개받고 싶다고 말하면, 두 마디도 묻지 않고 ‘쿨 하게’ 또 다른 사람의 프로필을 읊어준다. 볼래? 말래? 흡사 패를 돌리고선 ‘고냐 스톱이냐’ 묻는 고스톱 판 같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못 먹어도 고!”를 외친다. 두 번째 만난 남자는 얼추 마음에 든다 싶지만, 이번에는 저쪽에서 노골적인 무관심을 표한다. ‘흠, 사랑의 어긋난 짝대기인가? 아니면 내가 뭘 몰라서 실수를 한 게 있나?’ 하며 아쉬워하지만, 그 말을 전할 데도 마땅치 않다. 다시 소개전화를 받고, 또 다음 남자를 만난다. 몇 번을 만난 뒤 가입 때 구매한 미팅의 횟수를 다 채워갈 즈음,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그제야 프로필을 듣고서 무조건 보겠다고 덥석 덤빌 게 아니라, 회전초밥을 고를 때처럼 신중했어야 된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주어진 횟수를 다 채우고, 연장을 할 것이냐를 묻는 코디네이터의 전화를 받고나서야 회전초밥 판의 원리에 어렴풋이 눈뜨게 된다. 스펙은 얼추 만족되지만, 여타의 이유로 ‘영~아닌’ 남자들은 회전초밥 판에서 몇 바퀴를 돌며 그곳에서 ‘장수’하고 계신 분들이고, 꽤 괜찮아 보였던 남자들은 대게 회비도 없이 입회시켜준 이른바 ‘미끼 상품’인 것이다. ‘장수하고 계신 분들’을 소개해주고 고객이 불만스러워하면 ‘미끼 상품’을 소개해주어 불만을 누그러뜨린다. 그 잘난 ‘미끼 상품’들이 원하는 건 정해져있다. 젊고 예쁘고 다소곳한 아가씨와 ‘직함 있는 장인’이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그나마 외모는 더 갈고 닦아 볼 여지가 있다지만, 부모를 갈아치울 수는 없지 않는가? 물론 결혼정보회사는 조건에 맞는 남자를 만나게 해주었으니 사기는 아니고, 이후 관계가 이뤄지지 않은 건 순전히 ‘내 실력이 모자라서’이거나, ‘내 눈이 높은 탓’이 되는 것이다. 사실 결혼정보회사 입장에서는 내가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성혼율 몇%를 내세우긴 하지만, 아무도 검증할 수 없는 수치이거니와, 기존의 결혼상담소와 달리 결혼정보회사는 성혼비를 받는 게 아니라, 순전히 입회비와 소개비로 수익을 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회전판의 초밥으로 보이는 그 순간, 나 역시 초밥으로 간택을 기다리며 돌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불현듯 진리가 내게 온다. 결혼시장에 나오려면 게임의 룰을 알고 덤벼야 한다는 사실을. 이 사회에서 결혼이란 지독히도 성별화 된 게임이며, 경제력 있는 남자와 좋은 집안 출신의 예쁘고 순종적인 여자의 ‘역할극’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내게 요구되는 성역할이 ‘구린’ 만큼, 내 마음 속 ‘나보다 한 치라도 잘난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욕망 역시 ‘구리디 구린’ 것임을. 잘난 남자 만나 경제적 의존을 꾀하겠다는 그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자유롭고 평등한 결혼은 환상이며, 양성 평등의 구호는 요원한 것임을, 꼭 돈 이백만원은 날리고서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결혼정보회사는 성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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