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시와 수학소 사이의 언어적 차이

- 고봉준

시와 수학소 사이의 언어적 차이

–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에 관하여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은 ‘미학’과 ‘반미학’ 모두를 겨냥한 철학적 개념이다. 그의 『비미학』은 “비미학이라는 말은 철학과 예술이 맺는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처럼 “철학과 예술이 맺는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정작 ‘미학’이라는 단어에는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철학과 예술의 관계가 ‘미학’이 아니고 왜 ‘비미학’이어야 하는가, 이 책에서 이 의문에 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면, 성공적(?)인 독서가 될 것이다.

실상, ‘비미학’이라는 개념은 철학과 예술의 관계를 ‘미학’으로 설명하려는 태도와의 차별화를 내포하고 있다. 바디우에 따르면 ‘미학’이란 예술의 사유에 관련된 철학의 국지적 부분일 뿐이고, 이는 철학이 예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때 심각하게 지엽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철학이 이렇게 ‘부분’으로 전락하는 데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철학은 그가 진리공정의 네 가지 절차-정치, 과학(수학), 사랑, 예술(시)-를 대상으로 하는 사유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바디우 철학의 특징은 진리 생산에서 이들 네 가지 절차가 항상 공존한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기존의 철학이 진리를 어느 하나로 환원시켜 봉합했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바디우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진리를 정치에, 분석철학은 과학에, 하이데거는 예술에 봉합했다. 이처럼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와 철학 자체가 혼동될 때, 바디우는 그것을 ‘봉합’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므로 ‘미학’과의 차별화는 결국 철학과 예술의 탈봉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특히 그는 포스트 모던과 탈근대 철학자들이 철학을 예술과 동일시하는 태도, 즉 철학과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을, 철학이 시라는 새로운 주인을 섬기고 있다는 식으로 비판했다. 철학이 진리를 사유해야 하는 본연의 과제를 제쳐두고 시인들의 영향력 아래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철학의 미학화라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 비판하면서, 바디우는 포스트 모던과 탈근대 철학자들을 가리켜 모두 하이데거의 후예들이라고 말했다.

알랭 바디우는 「시란 무엇이며, 철학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 철학과 시를 탈봉합한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은 예술이 이데아로부터 두 단계 떨어진 저급한 모방, 즉 모방의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된다. 예술이 이데아가 아니라 그것의 2차적 모방을 추구하기 때문에 시인(예술가)을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증명하듯이, 감각에 대한 철학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플라톤의 기획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철학은 불변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지만, 오비디우스가 대표하는 예술은 감각적 변화의 세계를 표현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신’은 부동의 기원이 되어 모든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되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신’은 변덕, 변심, 변신의 유한적 주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신’이라는 완전성의 관념이 변신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고, 일자의 ‘진리’를 위해서 모든 감각적인 것들을 몰아내려는 철학적 푸닥거리를 행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디우는 전혀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바디우 철학의 미덕은 포스트 모더니즘처럼 진리의 상대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오직 한 가지 진리만이 존재한다는 플라톤주의를 고집하지도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철학이 더 이상 진리를 생산하는 학문으로 이해되어선 안 되며, 철학은 진리들 가운데 진리성의 집계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건으로서의 진리를 주장하고, 사건으로서의 진리에 있어서 주체의 충실성을 강조한다. 물론, 이것은 매우 근대적인 철학적 태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디우는 “철학과 시적인 것”의 오래된 불화가 시가 논증적 사유, 즉 디아노이아(dianoia)를 가로막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해석한다.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이 디아노이아, 즉 가로지르는 사유, 연결하고 연역하는 사유를 가로막는 시의 긍정과 기쁨에 대한 부정이었다는 것이다. 디아노이아는 로고스로서의 사유이며, 그 모범적인 사례가 바로 수학이라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바디우에게 철학은 이처럼 연결하고 가로지르는 사유, 즉 로고스로서의 디아노이아가 긍정될 때에만 가능하며, 바로 이런 이유에서 철학의 시작은 철학이 시의 권위를 수학소의 권위로 대체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시적 사유란 형용모순이거나 철학의 미학화에 불과할 따름이다. 바디우는 시가 이미지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반면, 수학은 순수한 관념을 출발점으로 삼고, 연역에만 의지한다고 말한다. 바디우에게 철학의 위기란 이 구분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예술을 사유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고, 예술을 ‘통해서’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위기를 자초하는 철학인 것이다.

예술과 철학의 탈봉합을 지향하는, 또한 그러한 탈봉합이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는 바디우의 철학에서는 어떤 합의에 대한 강박 같은 것이 느껴진다. 대의제 민주주의나 정당정치를 긍정하지 않은, 다시 말하면 그는 ‘합의’에 기초한 정치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철학과 예술의 명확한 구분이라는 원칙만큼은 포기하지 않는다. 가령 바디우와 달리 랑시에르는 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저는 철학이 그 자체에게 뭔가 독특한 임무를 부여해 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철학에는 독특한 대상이 없는 셈이죠. 따라서 저는 차라리 철학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위치/자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디우의 진리 철학이 철학의 종언에 반하여 철학의 복권을 사유하려는 시도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유령이 떠돌고 있는 철학적 패러다임의 극복이 당면 과제였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탈봉합에서 철학의 가능성을 이끌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세상이 분할된 실체로 존재한다는 합의의 믿음만큼이나 질서정연한 것에 대한 속박 아래에 있는 듯하다. 랑시에르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과 예술을 구분하려는 바디우의 기획이야말로 사회를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통치하려는 치안(la police)의 반영물일지도 모르겠다. 바디우라면 이 비판에 어떻게 답했을까? 아마도 그는 랑시에르의 이런 관점이야말로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포스트 모던한 철학이라고 공박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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