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신자유주의와 자기배려

- 이수영(수유너머길)

1. 신자유주의, 자기 회귀의 오딧세이아

신자유주의 시대, 그것을 이름하여 ‘오딧세이아의 시대’라 명명할 수 있겠다. 과거에 비해 국가의 부는 분명히 증가했지만 그렇다고 행복의 크기까지 커졌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것 같다. 개발도상국에서 가까스로 선진국 문턱까지 진입했지만 설령 선진국이 된다고 해서 안도할 수 있으리라는 가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개발독재시절에는 개인의 헌신이 국가 전체의 이득과 풍요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라 근로의 기쁨이 개인적 차원에 한정되지는 않았다. 철저히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존재, 그런 경제학적 주체 개념은 ‘수출역군’이라는 말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내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 되는 것이기에 자기 이익조차 희생할 수 있는 헌신으로 무장한 주체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경제부흥을 일으킨 주역들이었다. 애국주의적 열광이 합리적 경제 주체의 행위를 지배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런 도취는 개인과 국가 모두에 수많은 일자리와 두둑한 월급, 국민소득 증가와 국가의 경제적 순위 상승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다.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노동자들의 헌신적 노동, 이는 국가적 부의 증가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노동자 개인의 소득 증가로 이어지는 사이클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수출 증가는 국민소득을 증가시키기는 하지만 그 소득의 균등한 분배와는 연결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국가의 부는 증가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부까지 증가시키지는 않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2 : 8, 심하게는 1 : 9의 양극화 사회 속에서 증가된 부는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고, 대다수는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 속에서 불안하게 미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양극화 상태는 더 악화될 전망이고, 거기다 글로벌화된 경제 구조 속에서 기업들의 생존 조건도 훨씬 열악해지고 있다. 수출 증가를 달성하는 기업의 일자리 창출 실적도 미미하니 암담한 국내 경제 상황이 더 암담한 국제 경제 상황과 겹쳐 경제적 주체들의 머리를 지끈지끈 아프게 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취업한 사람이나 취업하고자 하는 대학생들이나 모두 국가보다는 자신을 우선 생각하는 거대한 전회를 이루고 있는 것이. 모두 자기 자신만을 돌보고 자기 자신만을 염두에 둔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일자리에 취직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일할 수 있는지. 애국주의적 열정에 들떠 있던 6,70년대를 떠나 오직 개인의 안위만을 돌보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이름하여 ‘오딧세이아의 시대’인 것이다.

왜 오딧세이아의 시대인가. 이 시대는 지금 ‘자기’를 향한 거대한 도정에 몰두하고 있다(푸코는 니체나 보들레르에게서조차도 이 자기 회귀라는 현상을 추적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자기회귀현상을 신자유주의로 좁혀 보는 셈이다). 이렇게 철저히 이기주의적인 시대가 있었던가.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리스의 그 유명한 장수처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무사한 귀향이다. 이 항해를 어떻게 하면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까. 도움받을 수만 있다면 저승사자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이 거친 신자유주의의 바다에서 살아남아 자신을 편안하고 아늑한 경제적 풍요의 고향에 입항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 어찌 앎(지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때로는 세이렌의 유혹을 물리칠 금욕적 귀막음도 필요하고, 요괴를 속이는 ‘nobody’(아무도 아닌 자)의 언어유희도 필요하다. 오딧세이아의 항해에 필요한 조종술, 훌륭한 조타수가 되는 능력은 결코 타고날 수 없으며 수많은 인내와 훈련, 자기 극복의 과정을 요청한다. 놀고 싶은 유혹도 팽개쳐야 하고 게으르고 싶은 권리도 버려야 한다. 저 항해술을 익히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자신에게 신경쓰고 있는지 매일매일 자신의 하루를 점검해야 한다. 스스로 하루를 진단하는 자신의 의사가 되어야 하고 취조하고 판결하는 형사이자 판사가 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를 자기가 자기와 관계맺는 특정한 양상의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일률적이고 사법적인 통치와 달리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단일한 지도부에 의해 고안되지도 않았고 실행되지도 않는다. 숨막히는 자본의 회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신자유주의적인 규칙이다. 이 순간 모든 개인은 자신으로 향한다. 기업도, 국가도 개인의 삶을 완벽히 책임질 수 없다면 생사여탈권은 개인이 쥐고 있는 셈이 된다. 내가 나를 잘 돌보고 있는가 아닌가, 나에 대한 나의 배려는 나의 능력을 키우는 데 일조하는 방식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적인 주체의 질문이다. 자기와 자기를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하는 것, 이것이 오딧세이아의 시대인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오로지 나를 돌보라. 이렇게 철저히 자기배려의 시대에 돌입한 적은 없었다. 아무도, 그 어떤 것도 달성하지 못한 이 ‘자기로의 거대한 회귀’를 신자유주의가 이뤄낸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행위에 규칙을 도입함으로써 그 규칙의 심판자가 되고 채찍질을 가하는 스승이 되는 것, 이 철저한 자기배려, 이것 없이 삶의 궁지에 몰린 경제적 주체들이 살아남을 비법은 없다. 얼굴성형이 기본이 되고 다이어트는 필수가 되었다. 자기계발과 자기경영의 앎이 유행하고, 스펙으로 무장한 이력서가 정체성이 되었다. 이 시대의 도저한 자기배려의 윤리 앞에서 이기주의적이라는 비난은 삼가기로 하자. 성형과 다이어트는 신체에 대한 미학적 접근이고 자기계발과 자기경영의 처세술은 정신의 윤리학인 것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적인 자기배려의 도착지점이다.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2. 윤리시학적 자기배려를 구성하는 것들

향방을 알기 위해서라도 비교의 지점이 필요하다. 미셸 푸코가 고대 헬레니즘 시대에 대한 계보학적 조사를 통해 밝히려 한 것도 이것이다. 자기배려에도 여러 겹이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자기배려는 고대의 어떤 역사적 흐름이 증폭된 것이고, 그에 따라 또다른 의미의 자기배려는 은폐되거나 종적을 감추고 있다. 나를 돌보는 것에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차이를 드러내야만 현재적 방향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눠 살펴보는 게 좋겠다. 먼저 자기배려에서 ‘자기’란 무엇인가. 의사는 환자의 아픔을 치료하고 신체를 돌본다. 가장은 가정을 관리하고 배려한다. 연인은 연인을 소중히 돌본다. 의사는 신체에, 가장은 가정의 소유물에, 연인은 연인의 아름다움에 집중한다. 신체와 소유물과 아름다움으로 구성된 자기에 대한 배려는 신자유주의적인 자기배려와 닮았다. 다이어트한 신체, 성형으로 아름다워진 얼굴, 스펙으로 무장한 든든한 자산은 자기배려의 중요한 대상이지만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목적은 더 많은 소유, 더 확실한 소유에 있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신체와 정신과 경력이 동원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배려의 대상이자 목적이 되는 자기배려도 있다. 자신의 신체와 영혼의 훈련을 통해 삶의 불행한 사건들에 초연해질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 다시 말해 자기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에 도달하는 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자기배려였다. 이때의 자기는 성형이나 다이어트로 부정해야 할 대상이거나 스펙과 경력으로 은폐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오류와 혼란의 상태에 있는 자기는 궁사가 목표물을 쳐다보듯이, 혹은 육상선수가 골인지점에 집중하듯이 도달해야 할 자기를 의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훈련을 거듭하면서 자기 자신만을 목적지점으로 만들어야 했다.

자신이 출발점이자 목적이 된다는 것은 주체의 변형이 필수적인 자기배려의 특징이다. 자기계발과 자기경영에도 앎이 필요하듯이 자기배려는 여러 신체의 테크닉과 앎의 총체를 요구한다. 고대의 보편적인 원리는 주체가 주어진 상태로는 앎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앎의 능력을 갖게 만드는 다수의 실천과 변형을 도모하지 않고서는 앎을 갖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체의 변형 없이 주어진 그대로 앎과 진실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역사가 시작된다. 푸코는 이를 “데카르트적 순간”이라 부른다. 철학자에게 주체를 변형시키라는 어떤 요청도 필요치 않고, 오직 인식 행위만으로 진실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과학적 실천의 모델을 보자. 여기서는 눈을 뜨고 정직하게 추론하고 실험하는 것만으로도 앎에 도달할 수 있다. 지식과 진리가 주체의 행위와 분리되었고, 이제 그것은 인식 행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지식은 주체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주체의 삶과 행위와는 아무 관련도 없이 주체의 외부에서 계속해서 증식하는 지식들이 있다. 자기경영과 처세의 지식이 바로 이런 경우다. 앎이 주체에서 비롯되지도, 주체를 가로지르지도 못하고 심지어 앎 자체가 다시 주체로 회귀해 주체를 계명시키는 변형의 순간이 사라져버렸다. 나의 존재적 변신과는 상관이 없어도 어쨌든 자기경영의 지식은 획득해야 한다. 이처럼 배움의 욕망이 심했던 적도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배움이 갖추고자 하는 앎이라는 장비는 어떤 성격의 것인가. 그것은 신의 존재를 묻는가. 공동체에 대해 묻는가. 죽음과 덕에 대해 묻는가. 아니면 인간의 심연에 대해 묻는가. 앎의 순간 주체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고 타자의 세계와 맺는 관계를 조율하게 하는 윤리시학적 배움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졌다. 철저히 기술적인 앎, 누가 배워도 상관이 없는 앎,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앎, 그리하여 자신의 고유성과 아무런 관련도 없어지는 앎이 지배한다. 이런 시대에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문장은 얼마나 무력한가. “죽음은 어떤 불행도 유발하지 않으며 오히려 많은 불행들을 끝장낸다.”

윤리시학적 앎이기에 헬레니즘의 자기배려는 타자와의 특정한 관계를 창조한다. 자기배려가 단순히 자신만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에 시민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라도 군주는 자기를 배려하는 앎을 획득해야 했고, 자기를 배려하는 방식으로만 시민들을 통치할 수 있었다. 자기만을 배려하는 자기배려는 주체의 변형을 요청하는 윤리시학이기에 오히려 타자와의 조화나 타인의 구원과 같은 부가적인 호혜의 혜택을 선사한다. 인간은 왜 자기를 돌봐야 하는가.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동물은 의복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라 특별히 자기를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배려하지 않으면 동물보다 더 비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이 오히려 인간의 가치를 고귀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기를 돌보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과 구별되는 사물이 무엇인지 물음을 던지게 되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분별심을 획득한다. 이에 따라 자신을 잘 돌보는 자는 공동체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는 덕성을 갖추는 것이다. 자식이자 아버지로서, 형제이자 남편으로서의 자연적 관계만이 아니라 이웃이자 동료, 시민이자 주인으로서의 획득된 관계도 불안과 부조화 없이 부드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삶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개인과 가족의 협소한 울타리에 갇히고 이 울타리를 다시 보험과 같은 미래보장형 자산으로 둘러칠 때 자기배려는 말 그대로 자기만의 배려가 된다.

그 어떤 시대이든지 자기배려는 존재술이자 구원술이다. 모든 사람은 이 자기배려의 테크닉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바라지만 선별되는 것은 늘 소수다. 이는 헬레니즘의 자기배려든 근대적 자기배려든 마찬가지다. 문제는 어떻게 생존하는가, 어떻게 구원되는가일 뿐이다. 스펙을 쌓고 신체를 변형시키는 근대적 자기배려는 삶의 궁지를 돌파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삶의 단계 내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 안정권에 도달하는 순간이 있고, 그렇게 선별되는 순간이 있다. 과거의 인생과의 갑작스런 단절을 통해 안정권에 도달했다면 자기배려의 절차탁마는 그것으로 족하다. 이는 기독교적인 구원을 닮았고, 뿌리도 거기에 있다. 그것은 악에서 선으로, 유한성에서 불멸성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비약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푸코가 발견하고자 했던 자기배려는 주체가 자신에게 가하는 항구적 행위였고, 따라서 평생에 걸쳐 전개되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으로 자족할 수 있는 완성된 상태, 이것이 어떻게 종국지점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삶이란 자신을 둘러싸는 예속적이고 의존적이고 강압적인 것들과의 끊임없는 마주침 아니겠는가. 완성을 지향하지만 완성을 이룰 수는 없는 실천, 미완성이라고 해서 결코 불안하지 않은 상태, 미완성이기에 다시 완성을 위해 자기 수련을 계속해야 하는 자기배려가 있는 것이다.

3. 자기를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결론을 말해보자. 신자유주의적 자기배려는 결국 무엇이고 어디로 향하는가. 자기에 대한 철저한 보살핌, 타자와 세계에 대한 고려 없는 냉철한 자기배려가 불행히도 자기에 대한 포기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나를 돌보는 것, 그것이 나를 방기하게 한다. 너를 드러내고 싶은가. 너의 구원을 바라는가. 너의 안정된 생존을 원하는가. 그럴 때 근대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배치는 이렇게 말한다. 너를 포기하라고. 너의 개시는 곧 너의 포기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기독교적인 자기배려다. 구원을 바란다면 너의 모든 자연적인 본능과 욕망을 포기하라. 인간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신의 진리에 의한 구원은 바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압박 속에서 생존하고 싶다면 우리의 모든 다양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모든 앎을 처세적 앎으로 국한시켜야 하고, 모든 관계를 자산가치의 증식에 유리하다고 인정되는 관계로 축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본의 흐름을 좇는 생활리듬이어야지 자본의 흐름에서 자유로운 리듬이어서는 곤란하다. 자기의 능력을 고양시키기 위한 자기배려의 운동은 결국 자기로 회귀하지 않고 자본으로 회귀한다. 구원은 자본의 능력 증명이지 개인의 완성이 아니다. 자기를 배려할수록 자기는 박탈되고 삶은 불안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그 반대의 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자기를 포기하는 자기배려가 아니라 자기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앎과 실천의 장비를 갖춰가는 자기배려의 운동을. 자기배려가 삶의 사건들에 대처할 수 있는 앎을 쌓는 과정이 되고, 이것도 늘 주체의 삶 속에서 분비되는 앎이 되는 운동을. 법이나 규범, 혹은 신의 진리처럼 주체 외부의 정언명령이 아니라 근육 속에 각인되는 것처럼 언제든 운용될 수 있게 행동의 원칙으로 존재하는 앎을 위한 배려를. 누구나 외워야 하는 앎이 아니라 모두가 다른 윤리가 될 수 있는 그런 앎을 위한 자기배려의 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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