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자기계발이라는 덫

- 만세

1. 자기계발의 시대

당신에게 5000원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그 5000원으로 2시간 동안 최대의 이익을 산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는 경마장으로 달려가 100배 배당을 보장하는 이름 모를 경주마에게 5000원을 밀어 넣을 것이고, 누군가는 로또 5장을 산 후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머지 시간을 보낼 것이다. 다소 건전(?)하고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5000원으로 음료수를 사서 더운 날에 잔 당 500원 받고 파는 장사를 할지도 모르겠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는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일단 자본이 너무 적다. 자본이 적으면 이걸 불려낼 시간이라도 많아야 하는데 시간은 2시간 한정이다. 최근 상종가를 치고 있는 자기계발서 『스무 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은 저자가 이런 숙제를 스탠포드 대학 학생들에게 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학생들의 성과는 경이적이었다. 제일 많이 벌어온 팀은 60만원 이상을 벌었고, 평균적으로 20만원을 벌어왔다. 5000원을 가지고 2시간 만에!

비밀은 발상의 전환에 있었다. 5000원은 사실 함정에 가깝다. 5000원은 자본금으로는 거의 무가치하다. 이 5000원에 얽매일 경우, 우리의 상상력은 복권이나 도박 같은 확률이 극히 낮은 수단이나, 음료수 장사 같은 소박한 방법에 한정된다. 학생들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문제를 다시 정의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2시간 동안 최대의 돈을 버는 방법은 무엇일까?”로 말이다. 그러자 여러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5000원이라는 작은 돈 대신 이미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눈을 돌리자, 이를 기발한 방법으로 판매하고 활용할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팀은 대기 시간이 제법 긴 식당이나 카페에서 대기번호표를 미리 받아놓고, 줄을 기다리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번호표가 최고 20달러에 거래될 정도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창조적 문제 설정. 이를 위한 냉철한 계획. 어떤 암울한 상황에서도 머리를 핑핑 돌릴 수 있는 용기. 이 이야기는 최근 유행하는 ‘자기계발’의 핵심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어디에서나 이런 종류의 이야기와 요구를 들을 수 있다. 회사에서는 사원들에게 틀에 박힌 업무 대신 창의적 방법으로 성과를 낼 것을 요구한다. 학교에서는 시키는 대로 하는 학생이 아닌 창의적인 학생을 길러낸다며 수행평가 같은 정답 없는 숙제를 내곤 한다. 이런 요구에 응답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설명하는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대형서점 맨 앞 칸을 차지하고 있다. 사교육 강국답게, 다양한 능력을 함양하는 자기계발 시장이 번창 중이다. 다들 2시간 만에 수익률을 1000%넘게 달성한 스탠포트대 학생들처럼 되기 위해,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는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바야흐로 자기계발의 시대다.

2. 자기계발과 신자유주의

자기계발 붐은 언제부터 왜 시작된 것일까? 한국이 원래부터 자기계발과 창의성을 강박적으로 요구하는 사회는 아니었다. 오히려 9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이었다. 창의적인 인재보다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성실한 노동자나, 정해진 답을 빠르고 정확하게 도출하는 학생이 이상적인 인재에 가까웠다. 휴가 때 출근해서 회사나 공장의 일을 돌보는 노동자나 공통 수학의 정석을 풀다 못해 외워버리는 모범생을 떠올려보라.

국가의 경제를 운영하는 체계도 이런 인재에 근거해 설계되었다. 개발독재시절, 한국에서 국가와 은행과 기업은 일체였다. 국가가 경제개발계획 따위를 통해 주도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기업은 이에 충실히 따르며, 은행은 묻지마 대출로 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식이다. 이런 시스템은 70년대 80년대 세계경제에서 한국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앞서 말한 ‘성실’과 ‘충성’을 기초로 한 인재상은, 전체적 목표를 위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이런 중앙집중적 시스템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1997년 IMF는 바로 이런 시스템과 인재상을 몰락시킨 사건이었다. 부실한 기업 사정에도 불구하고, 국가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저리 대출 따위의 특혜를 받았던 기업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그러자 과거 큰 성공을 가져다 준 국가-은행-기업 삼위일체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그 체계가 정경유착을 낳았고, 부실한 기업이 시장에서 퇴출되는 것을 막았으며, 결과적으로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는 논리였다. 물론 IMF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둘러싸고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당시 언론을 통해 확장/증폭된 ‘공식적’인 문제인식이 이러했으며,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품고 있던 ‘국가 발전 계획’과 이에 따른 ‘이상적 인재상’에 영향을 미쳤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즉 사람들은 더 이상 삼위일체형 국가주도 발전 계획을 신봉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자기역할에 충실하고 성실한’ 인재에 대한 믿음도 점차 옅어졌다.

대신 새로운 발전의 비전이 등장했다.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였다.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경제의 전반적 방향을 결정하는 대신, 기업과 은행들의 경쟁을 통해 자율적으로 국가경제가 운영되는 모델이다. IMF 초기 단행된 은행 자율화 조치는 신자유주의의 기본적 아이디어를 잘 보여준다. 경제 주체들 간의 이런 경쟁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장과 상품을 창출하고 큰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다. 벤처 붐에서부터 아이디어가 가장 큰 재산이 된다는 최근의 ‘인적자본론’ 등에 이르기까지, 신자유주의적 믿음은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자기계발 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신자유주의에 가장 적합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재상이다. 경쟁이 유의미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 아이디어나 발상을 낳기 때문이다. 주체들은 경쟁의 과정에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실험을 강행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경쟁은 하나마나다. 그런 의미에서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혁신을 시도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경쟁의 생산적 기능을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신자유주의가 경쟁을 통해 길러내야만 하는 인재이다. 요컨대 최근 한국을 휩쓸고 있는 자기계발이라는 붐은 IMF를 통해 결정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경제적 합리성을 그 배경으로 한다. 자기계발은 그저 개인이 선택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새롭게 요청하고 요구하는 인재상이다.

3. 자기계발의 세 가지 원칙

혹자는 자기계발을 ‘자기경영’이라 정의한다. 즉 시키는 대로 하는 대신, 주어진 역할에 얽매이는 대신,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을 자율적으로 ‘경영’하는 것이 자기계발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능동적으로 자신을 경영하는 1인 기업가이기도 하다. 이런 자기경영 혹은 자기계발은 몇 가지 원칙을 갖는다.

첫 번째는 자율적 목표설정이다. 자기계발 혹은 자기경영은 자신의 활동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주어진 목표나 역할에 만족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1인 기업가가 될 수 없다. 자기계발은 자신의 효용성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나 목표를 자발적으로 고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최근 여러 기업에서 도입되고 있는 유연근무제와 성과급은 기업에 부는 자기계발 혹은 자기경영 바람을 상징한다. 위로부터의 지시를 최소화하고, 직원들이 스스로 자신의 일의 목표를 세우고 진행하도록 독려한다. 이를 위해 출퇴근 시간을 자율화하는 등 유연한 근무환경을 조성한다. 직원들이 창의적인 방법으로 성과를 내어놓으면 이에 대해 보상한다. 즉 모든 직원이 CEO의 심성을 갖추도록 하는 것. 이런 과정을 통해 기업이 큰 생산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보고는 이미 식상할 정도다.

올해 초 중소기업청에서 실시한 1인 창조기업 대회 포스터. 모두가 기업가 정신을 갖추어야 하는 사회다.

이는 단지 직장인에게만 한정되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자기계발의 원칙은 학생 같은 비-경제 인구들을 독려하는 자기계발 논의에도 뚜렷이 드러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에 가장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덕목 중 하나는 ‘자기사명서 쓰기’이다. 톱니바퀴처럼 생각 없이 사는 삶에서 빠져 나와, 진정 자신의 삶을 걸고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라는 뜻이다. 역시 많은 자기계발서가 권유하는 ‘유서쓰기’는 삶의 유한함이라는 긴장을 안고 자신의 사명을 다시 생각해보는 도구가 된다. 이런 훈련의 결과 학교 커리큘럼에 만족하지 않는 창의적 학생이 출현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가정 경제를 운영하는 주부가 등장한다.

자기계발의 두 번째 원칙은 측정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이나 환경을 계산하고 측정하는 것이 두 번째 자기계발의 핵심이다.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한다고 쉽게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성과급이 가지는 부작용이 대표적이다. 성과급의 도입이 긍정적인 효과만을 불러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몫만 챙기게 되자 동료들 간의 관계를 급속히 냉각되어 팀워크가 훼손되는가 하면, 무리한 시도를 반복하다가 각종 경영 비리 및 도덕적 해이를 불러오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는 전체적으로 기업에게 오히려 손해를 불러일으켰다.

측정은 이런 부작용을 방지하도록 해준다. 목표를 달성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드러내고, 어떤 방법으로 이를 추진해야 할지 결정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자기계발뿐 아니라 현대 경영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피터 드러커는 한 CEO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되지 않는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변수를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영어 실력을 향상시킨다’는 목표를 가진다고 하자.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조건 단어를 외우고 영어 책을 읽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각종 어학시험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세분하여 ‘측정’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모자란 부분과 강점을 파악한 후,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설계해야 한다.

최근 각종 기업에서 기업 내부의 비공식 네트워크 지형도를 그리려 시도하는 것 또한 이런 ‘측정’의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사원 간에 형성된 비공식 네트워크를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사원들 사이의 분위기를 관리하고 성과를 내기 위함이다. 나아가 측정은 목표의 설정 자체에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스탠포드 대학 학생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 시도 했던 것은 이제껏 알려져 있지 않았던 가치 창출의 기회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비교지표가 없을 때는 막연하게 일을 했는데 성적표가 공개된 이후 나 자신의 시장가치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는 한 디자인 노동자의 고백은 ‘측정’이 자기계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세 번째는 위기를 기회로 삼는 태도이다.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 과정, 즉 기업으로서의 활동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오히려 수많은 위기로 가득 차 있다. 자기계발의 세 번째 핵심은 이런 위기를 유연하게 관리하고 나아가 기회로 삼는 것이다. 자기계발서의 내용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낸 ‘성공시대’류의 성공담을 담고 있다. 남들이 실패나 위기라고 여기는 상황을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도약의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1인 기업가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발상은 오히려 실패나 위기에서 비롯된다는 케케묵은 격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직장에서건 학교에서건, 실패조차 기회로 만들어내기에 실패할 수 없는 주체. 그런 주체가 바로 자기계발이라는 원칙이 길러내려는 인간이다.

4. 덫이 된 자기계발

나름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위해 자신과 환경을 측정하고, 위기조차 기회로 여기도록 하는 자기계발은 언뜻 능동적이며 자율적인 주체를 길러낼 것만 같다. 누구도 특정한 역할을 강요하지 않으며, 대신 나름의 혁신과 창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상태에서 통제나 권력이 작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삶을 능동적으로 설계하는 풍요로운 자유를 목격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오히려 사람들은 늘 불안해하고, 타인의 눈치를 보며, 여론에 휩쓸린다. 권력 역시 여전히 사람들의 삶을 특정한 형태로 묶어두고 있다. 분명 자유롭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왜 자율과 능동이 가장 전면화 된 시대에,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고 권력은 여전히 건재한 것일까?

왼쪽은 공식적 조직 구도이고, 오른쪽은 비공식 네트워크이다. 비공식 네트워크를 측정함으로써 조직 관리를 더 수월하게 이루어낼 수 있다.

나는 자기계발이 작동하는 모습에서, 자기계발이 자유가 아니라 권력의 장치로 이용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단초는 자기계발이 지닌 세 가지 원칙 자체에 이미 존재한다. 첫 번째 자율적 목표 설정을 살펴보자. 사람들이 정말 자신의 목표를 나름대로 설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표가 그 전 사회보다 획기적으로 다양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설정하는 목표는 대개 돈이나 명예로 수렴된다. 여전히 비슷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자기계발이 작동시키는 ‘목표에의 닦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자율적인 목표설정이라는 명목 하에, 모두가 목표를 요구한다. 쏟아지는 자기계발서는 물론이고,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꿈과 목표를 가질 것을 ‘닦달’한다. 하지만 인생에서 자신의 목표를 세우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다. 칸트 같은 철학자는,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을 고민해서 한 권의 책으로 써내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만큼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일은 깊은 성찰과 다양한 실험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많은 시간을 주지 않는다. 당장 목표를 내 놓으라 요구한다.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주류적 목표를 자신의 목표로 삼게 된다. 쉽게 말해, “꿈 찾아와!”라는 진로지도 선생님의 닦달에 학생들은 “어……어……의사요”라고 대답하지,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자기계발은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게 하기보다는, 목표에의 닦달을 통해 주류적 목표를 ‘자율적’으로 내면화하도록 만들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측정도 마찬가지이다. 측정은 이렇게 설정된 주류적 목표가 삶의 구석구석에서 치밀하게 작동하도록 만든다. 측정은 앞서 말한 것처럼 특정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환경과 상황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행동이다. 이는 삶의 모든 영역을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재편하는 것을 의미한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하나의 논리로 삶을 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친구관계와 거래관계는 다른 논리로 작동한다. 그런데 측정은 친구관계 조차 특정한 목표(ex. 부의 증식)에 따라 재편할 것을 요구한다. 친구를 사귀어도 사업상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이들을 사귈 것을 추천하는 식이다. 사내 비공식 관계망을 측정하는 것은, 비공식 관계망조차 회사의 수익에 도움이 되도록 조정하기 위함이다.

이런 측정은 한 사람을 자신이 설정한 주류적 목표에 완전히 얽매이게 하는 것에 더해, 그 사람을 통제하기 쉬운 예측가능한 주체로 만들어낸다. 권력이 사람들을 통제하기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냉혈하지만, 친구 사이에서는 누구보다 정이 많은 사업가가 있다고 해보자. 그의 행동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언제 ‘우정’이라는 가치가 개입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이상, 통제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측정을 통해 자신의 모든 영역의 논리를 단일화 한 주체는 쉽게 예측할 수 있고, 그래서 통제하기도 어렵지 않다. 특정한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 쉽게 알 수 있다면, 환경을 조정함으로써 그 주체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식 투자자들은 수익 극대화라는 단일한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이에 따라 국가는 금리나 재정 정책의 조정을 통해 그들의 움직임을 조정할 수 있다. 특정한 상황에서 이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위기를 기회로 여기는 태도 역시 쉽게 권력장치의 일부로 기능한다. 신자유주의는 위기가 일상화 된 시스템이기도 하다. 한국만 해도 IMF 이후 구조조정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이다. 신자유주의에서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를 기회로 삼으라는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사회의 불만을 최소화하는 기능을 한다. 자기계발의 논리에 따르면 위기에 따른 고통은 사회 탓이 아니다. 그것을 제대로 기회로 만들지 못하는 개인적 무능력 탓이다. 즉 신자유주의에서 자기계발은 사람들의 불만이 큰 저항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일종의 위기 관리술이기도 하다

요컨대 자기계발은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주체를 길러내는 권력장치로 쉽게 전화된다. 목표를 닦달함으로써 사람들이 주류적 목표를 내면화하도록 하고, 측정을 통해 사람들을 권력 앞에 발가벗은 존재로 만들며, 위기를 기회로 삼는 태도를 통해 불만을 억제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줄기차게 자기계발서를 읽어대지만, 자율적인 삶을 누리기가 오히려 더 힘들어진 이유가 아닐까?

5. 자기계발을 넘어선 자기계발

물론 자기계발이 모두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말은 아니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식의 자기계발 역시 분명 존재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권력 장치로서의 자기계발을 극복해야만, 신자유주의에 복무하지 않는 자기계발을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 이를 달성할 수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로부터 몇 가지 참조점을 얻을 수 있다. 특히 푸코의 ‘자기배려’를 둘러싼 논의는 주류적 자기계발을 넘어선 자기계발의 형태를 고민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된다.

통에 사는 디오게네스. 누구보다 삶을 근본적으로 고민했던 자기배려의 선구자다.

푸코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자기배려’라는 덕목은 로마/헬레니즘 시기에 이르러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까지 전파되어 보편화된다. 자기배려는 무엇보다 자기를 돌보고 건강하게 하는데 집중하도록 하는 덕목이다.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만이 타인과 잘 어울릴 수 있고 폴리스를 훌륭히 운영할 수 있는 법이다. 자기계발 역시 사회나 국가보다 자기의 능력을 계발하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덕목이라는 점에서 자기배려와 유사한 지점을 가진다. 하지만 자기배려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자기계발과 차이점을 보인다. 자기배려가 말하는 ‘자기’가 신체나 재산이 아닌 ‘영혼’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자기배려는 좋은 음식을 먹어 건강한 신체를 가지는 것도, 더 많은 부를 얻음으로써 튼튼한 기반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가꾸는 기술이다. 통상 신체의 건강함이나 재산의 증식을 목표로 하는 자기계발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영혼을 가꾸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애매한 편이며 사람마다 다르다. 자기배려는 차라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알렉산더와의 대화로 잘 알려진 디오게네스는 이런 자기배려의 실천을 보여준다. 디오게네스는 명성이나 재산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데 불필요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혼자서만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이를 독려했다. 예를 들어 디오게네스는 광장에 나가 자위행위를 하곤 했는데, 아마 이는 불필요한 격식에 얽매여 육체적 쾌락의 의미를 과장하고, 그러느라 영혼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그를 cynics, 견유(犬儒)학파, 즉 ‘개 같은 학파’의 일원이라 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는 신체나 재산이 아닌 영혼을 돌보는 방법을 고민하고 끊임없이 이를 실험, 실천하며 살았다.

물론 우리가 디오게네스처럼 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기계발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처럼 근본적이고 철저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계발은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철저하지 못하다. 언제나 성찰은 불충분하며, 떠밀리듯 계발이 이루어진다. 자기계발이 신자유주의에 복무하는 권력장치이기를 그만두기 위해서는, 우선 그 과정들 자체가 좀 더 여유롭고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무엇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고, 어떤 기준으로 세계와 자신을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보다 더 고민하고 실험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과정은 쉽지 않다. 생각보다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고, 행동하고 실험하는 일은 귀찮고 힘들다. 우리는 습관대로 삶을 살아가지, 습관을 돌아보고 성찰하지는 않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친구와 동료가 필요하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실험하고 고민하도록 촉발하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디오게네스를 비롯한 로마/헬레니즘 시기에 자기배려를 실천했던 수많은 이들 또한 그러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는 다양한 방식의 자기배려를 실천하는 동료 집단의 이름이기도 했다. 자기계발이 신자유주의 권력 장치의 일부로 전락하게 된 것도, 동료나 친구라는 존재가 없어지고, 모든 관계가 경쟁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삶의 목표 자체를 함께 성찰하고 고민하는 동료나 친구가 사라지고, 정해진 목표를 보다 더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경쟁하는 관계만이 남았을 때, 자기계발은 주류적이며 다수적인 효과를 낼 뿐이다. 역설적이지만, 진정 자기를 돌아보고 계발하기 위해서는 타인이 필요하다.

요즘 가장 흔한 인종이 “정신없이 열심히 사는 사람”인 듯하다. 많은 사람이 따라야 할 인생의 표준 모델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평생고용을 보장하던 정규직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운 좋게 정규직으로 입사해도 회사가 망하기 일쑤다. 대신 사회는 혁신과 창조를 통해 각자 나름의 인생의 답을 내놓으라고 닦달한다. 이에 사람들은 뭐든 붙잡고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돈을 번다고, 누군가는 공부를 한다고, 누군가는 영화를 찍는다고 정신없이 살아간다.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계발하고 써먹느라 바쁜 셈이다. 하지만 이런 정신없이 열심히 사는 삶이 기쁨과 성취감 대신 멍한 공허감과 피로를 가져다준다면, 한 번쯤은 의심하고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기계발이 자율성의 탈을 쓴 권력장치가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불타는 청춘 공익광고. 불타지 않으면 청춘이 아니며, 어서 뭐든 좋으니 불태우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하지만 대체 뭘 위해서 어떻게 불태울지 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응답 8개

  1. 우와...말하길

    진짜 글 잘 봤습니다… 이번에 학교논문 써야되는데 주제가 자기계발서의 허와실이었는데 자료가 없어서 되게 힘들었거든요 ㅠㅠ… 보고 참고좀 하겠습니다~^^

  2. 잘 읽었습니다.말하길

    잘 되돌아 보았습니다.

  3. 정중규말하길

    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조직사회 속에서 우리는 굳이 누가 닦달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 얼마나 쫒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자율성이 그 어느때보다 요청되는 시대라고 여겨집니다.

  4. 민지말하길

    지난번 푸코글에 이은 2탄 격 글처럼 읽히네. 잘 읽었어. 예전 글보다 이 글이 더 좋다. 어려운 단어가 적고 좀더 신중하고 성찰적이야. ^^ (그리고 만세식의 진지함과 명료함이 담긴 글의 장점을 발견하는군. 흠흠)
    그리고 ‘자기배려’에 대한 설명이 더 풍부해졌구나. 그 ‘영혼’의 보살핌을 생각해보면, 그 다양한 방법들은 실로 곳곳에 있는 것 같아. 온갖 좋은 말은 다 써있는 경전들(성경을 비롯한)에도 존재하고, 셋이 길을 가면 그 중에 스승 있다는 듯,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서도 발견하고… 심지어 불행이라고 여겨지는 사건에서도 발견하기도 하지(위기는 기회?ㅋ).
    그런 면에서 자기계발과 자기배려의 원칙은 샴쌍둥이 혹은 양날의 검이 아닐까 싶기도 해. 세계는 어느 한쪽만을 취하지 않는 것 같아. 중요한 건,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볼 수 있는 힘 같은 거랄까… 그런게 세계의 균열 혹은 긴장을 만들어내니까.

  5. 가리사니말하길

    ‘목표에의 닦달’ 이라는 말을 고등학교 시절부터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는데 이 글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적성’에 맞는 학과나 직업을 찾아라고 세간에서 이야기를 하지만 ‘적성’을 인식하는 기준이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가 없는가로 수렴되어가지는 않는지..

  6. 조르바말하길

    글을 읽으면서 뭔가 촉발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7.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Han, hong chul eui. hong chul eui said: http://suyunomo.jinbo.net/?p=5541 자기계발은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게 하기보다는, 목표에의 닦달을 통해 주류적 목표를 ‘자율적’으로 내면화하도록 만들고 있는 셈이다. […]

  8. 사이말하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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