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연기본능

- 매이아빠

매이의 연기본능이 폭발하고 있다. 일단 감정표현에 과장이 심하다. 조금만 기분 좋으면 양손을 들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폴짝폴짝 뛰고, 별로 슬퍼할 일도 아닌데 폼 잡고 우는 시늉을 한다. 어제는 잘 놀다 말고 “아빠, 민준이 오빠는 키가 커. 오빠라서. 매이는 애기라서 키가 작아.” 하며 처연한 표정을 짓더니 양손을 눈에 대고 눈물까지 훔쳤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나도 슬픈 척하며 “엉엉, 그랬구나. 매이가 많이 슬펐구나.” 하며 안아 줬더니 금새 해죽거리며 TV쪽으로 뛰어간다. 비가 오면 분홍색 우산을 쓰고 빨간 색 구두를 신고 우산으로 떨어지는 비 소리를 들으며 센치한 표정을 짓는다. 산이나 들길을 산책할 때면 손으로 풀끝을 훑기도 하고 저만치 혼자 떨어져서 무릎을 꿇고 꽃향기를 맡아보기도 하며 그윽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우리 부부는 “쟤, 또 느낀다”며 기다린다.

장난감 놀이도 연극적이다. 같이 TV를 보다말고 한쪽으로 가서, 뭐하나 했더니,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드라마를 찍고 있다. 대사까지 넣어서. 가만히 들어보니 리얼리티도 있다. 유나언니가 나오고 최문기도 나오고 엄마까지 등장하는 홈드라마다. “뭐해?” 하고 물어보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부끄럽게 웃는다. 아직 공개할 만한 수준은 아닌가 보다. TV시청 폭도 넓어졌다. 단편만화나 어린이 프로에 살짝 질렸는지 성인 프로도 곧잘 보고 오히려 내가 더 집중하는 장편 애니메이션도 진득하니 즐긴다. 특히 개그 프로나 코미디 영화에 관심이 많다. 엄마 아빠가 웃음보를 터뜨리면 자기도 따라 웃는다. 그리고는 우리 앞으로 돌아서서 방금 전 연기자의 코믹한 표정과 대사를 흉내 낸다. 그걸 보며 우리 부부는 또 한번 ‘빵’ 터진다.

반응이 좋은 몸 개그는 나중에 써먹기도 한다. 하루는 컨디션이 안 좋아 소파에 엎어져 있는 엄마 앞에 떡 서더니 눈을 홱까닥 뒤집고 고개는 미친 듯이 흔들고 두 발을 종종대며 뛰다가 나무기둥 쓰러지듯 몸을 소파로 내던진다. 그걸 본 아내는 숨넘어가듯이 웃는다. “저렇게 했어야 했는데…” 유난히 코미디를 좋아하는데다, 20대엔 코미디 작가시험인가 뭔가까지 봤다가 2차에서 떨어졌다는 아내는 매이의 타고난 개그본능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날 이후 매이는 엄마가 기분이 안좋은 같아 보이면 그 몸 개그를 반복한다.

잠자기 전 ‘매이의 침대쇼’도 달라졌다. 전에는 노래와 춤 공연을 하거나 이불속에 숨고 찾기 놀이를 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요즘에는 엄마 아빠를 배우로 세워 연극 연출을 한다. 엄마 아빠를 나란히 눕혀놓고 해변가의 연인처럼 손을 붙잡게 하기도 하고, 아빠 손을 잡아서 엄마를 껴안게 한 다음, 일어서서 마주보고 뽀뽀를 시키기도 한다. 이건 뭥미? 그 뻘쭘한 연기를 시켜 놓고는 혼자서 히득히득 웃는다. “매이야 이건 뭐하는 거야?” “응, 결혼하는 거야. 왕자님하고 공주님처럼” 으이그, 또 그놈의 공주타령인가?

“엄마 아빠 이미 결혼했다니까. 매이야, 엄마 아빠 결혼식 하는 거 보여줄까?” 급기야 아내가 아직 한번도 커내보지 않은 결혼식 비디오 녹화 테이프를 어디서 찾아내 매이에게 보여줬다. 그걸 본 매이는 매우 흡족해 했다. 비디오 속의 엄마, 아빠는 지금보다 훨씬 예쁘고, 공주와 왕자님 옷차림에, 심하게 ‘분장’까지 했으니, 매이의 결혼식 로망이 충족된 모양이다. 좋긴 한데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매이는 “근데, 매이는 어디 있어?” 한다. 그 동화 같은 그림 속에 자기는 왜 없냐는 것이다. “매이야, 그때 매이는 아직 없었어. 엄마 아빠가 결혼하고 나서 한참 있다가 매이가 엄마 배속에 생긴 거야.” “그래?” 매이는 약간 섭섭하긴 하지만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응답했다. 그날 이후 매이는 공부방에 걸려 있는 결혼식 사진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내가 대학 강의 나가느라 양복차림에 안경 대신 콘텍트렌즈를 끼는 날이면 야릇한 미소로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아빠, 왜 안경 안 썼어?” 한다. “또 결혼해?” 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아 나는 “멋있지? 이게 아빠 작업복이야” 라며 결혼 말문을 막아버렸다.

매이의 연기 속에서는 모든 게 키치가 된다. 사물의 가장 낡고 닳은 표면을 극화하는 키치적인 몸짓 속에서 사물의 아우라는 날아가 버린다. 사랑과 결혼도, 폭력과 죽음도, 기쁨과 슬픔도 한낮 가벼운 웃음거리가 된다. 때때로 유치하다고 놀려대지만 그 유치함 속에서 매이가 인간사의 본질을 깨달아가는 것 같아 흐뭇하다. 아내는 이런 매이를 보며 장래 코미디언이 되려나, 아니면 영화감독이 되려나 하며 혼자 즐거운 기대와 상상에 부풀지만, 나는 그런 생각은 다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다만,인생은 너무나 통속적이라는 것을, 그 유치하고 통속적인 겉모습 이면에는 어떤 신비한 비밀이나 진실도 없/다/는/ 더 무서운 진실을 매이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응답 2개

  1. 키치말하길

    마지막 단락에 마음이 닿아서 처음으로 댓글 남겨보았습니다. 인생이 지극히 통속이고, 이면에 아무런 신비도 없지만, 그래도 그걸 깨우치는 과정은 늘 신비인 것 같습니다.

  2. 안티고네말하길

    아이들의 놀이에는 아우라를 날려버리는 무서운 힘이 있는 듯. 이번 주에도 잘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오늘도 사진은 무섭게 19금이네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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