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대학-기업의 ‘정치경제학’

- 이진경

며칠 전 고려대학교에서 수시선발을 하면서 고등학교들에 대해 다른 점수를 주어 ‘차별’적으로 학생들을 선발했던 것에 대해 법원이 사실임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떨어진 학생들에게 위자료 70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고려대뿐만 아니라 연세대 등 이른바 ‘명문대학’이 과학고나 외고 등 잘나가는 학교, 그리고 강남지역처럼 잘나가는 지역, 잘사는 지역의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해 수시전형이나 입학사정관제도 등을 악용하고 있다는 것은, 입시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내 귀에도 들어올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감추어진 공공연한 사실을 법원이 이제야 ‘사실’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좀 더 인상적인 것은 이 소송을 위해 법원이 요구한 자료들, 가령 전형에 적용한 계산식의 내용이나 거기에 사용된 상수들을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감추고 제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좋은 사원이나 좋은 상품 고르듯이 학생들을 가려 뽑은 것도 그렇지만, 거기 사용한 방법을 ‘영업비밀’이라고 감추었다는 것은 학교에서 학생을 선발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영업’이 되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대학의 운영은 어떤 공적인 목적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영업활동이 된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을 ‘기업’으로 바꾸려 한다. 즉 모든 것을 기업하는 마인드로, 기업이 운영하는 방식으로 하게 하려 한다. 그래서 심지어 개인들마저도 일종의 ‘기업’으로 만들라고 요구한다. 다른 개인(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혁신’하라고. 이런 관점에선 개인이란 ‘인적 자본’이고, (자신의) 이윤을 생산하기 위한 ‘인적 자원’이다. 그 모든 ‘투자’나 ‘개발’의 목표는, 기업과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다. 좀더 많은 이윤, 좀더 많은 돈을 버는 것. 이는 자본가나 경영자, 전문가나 관리직을 꿈꾸는 사람만이 아니라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의 얼마 안 되는 돈마저 자본가나 ‘기업가’들처럼 ‘증권’에 투자하도록 부추겼고, ‘펀드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노동자들마저 부르주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 펀드에 투자한 돈은 결국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폭발적으로 꺼진 거품 속에서 몽땅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대학이 ‘기업’화되는 것은 차라리 극히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대학들을 기업처럼 ‘법인’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경영체제를 도입하는 것, 그래서 이른바 CEO형 총장들이 등장하여 대학을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것, 등록금은 최대한 ‘절약’하여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는 것, 교수들은 최선을 다해 돈이 되는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영업사원으로 만드는 것, 나아가 학생들 역시 최대한 ‘돈이 될’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상지대나 조선대, 덕성여대 등 재단이 문제를 일으켰던 대학들이나, 대학의 비리재단에 다시 학교를 넘겨주며 학교를 또 다시 전쟁터로 만든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가 대학이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임을 다시금 확언했다면, 고려대 등 학교의 이름으로 밀려드는 학생들을 영업으로 선발하고 학교를 영업으로 운영하는 이른바 ‘명문대’들은, 법인화라는 형식적 제도와 무관하게 대학이 이미 충분히 기업화되었음을 다시금 확언해 준 것이다. 대학은 이제 교육-기계가 아니라 돈을 버는 기계가 된 것이다. 따라서 기업으로서의 대학, 이제 거기에 적용해야 할 개념은 ‘문화적 자본’이 아니라 ‘경제적 자본’이고, 거기 적용해야 할 이론은 자본의 경제학이다.

사실 ‘국민학교’가 국민을 만들기 위한 장치로서 19세기 중반 탄생했다면, 서구에서 대학은 그보다 수백년전에 ‘직업학교’로서 탄생했다. 직업학교, 그것은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조건에서라면 기업에 필요한 인력, 즉 쓸만한 ‘노동력’을 양성하는 것이다. 국민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 국민국가였다면, 그렇게 만드는 비용을 국민국가가 내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면 쓸만한 노동력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게 자본가들이었다면, 그렇게 만드는 비용을 자본가가 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개별 자본가가 아니라면 ‘총자본가’인 국가가 지불하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부자’의 다른 이름인 부르주아들은 인색하기 그지없다. 유럽의 대학처럼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노동자가 되려는 자 자신에게 그 비용을 전가시킨다. 자본주의에선 죽지 않으려면 고용되어야 하고, 고용되려면 ‘경쟁력 있는’ 노동력이 되어야 하니, 결국 죽지 않으려면 노동력을 생산하는 비용을 노동자가 되려는 자 자신이 지불하라는 것이다. 죽음을 담보로 한 이러한 요구에 대부분의 예비-노동자들이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대학이 이제는 그 자체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된 것이다. 공장이 벽을 넘어 사회적 영역 전반으로 확대된 시대에, 대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공장이 된 것이다. 이 경우 자본의 정치경제학을 적용하려 하는 순간, 대학은 기업 가운데서도 아주 이상한 기업임이 드러난다. 대학이 공장이라면, 학생들은 대학이 이른바 ‘교육’이란 이름으로 가공하고 있는 대상, 즉 ‘노동대상’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진한’ 자원들을 선발해서 쓸만한 노동력-상품으로 가공하는 것, 그것이 지금 대학이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자신들의 목표다. 그런데 이 공장의 자본가들은 그 공장을 돌리는 비용을 자신들이 나 ‘총자본’이 아니라 노동대상인 학생들에게 물리고 있는 것이다! 곰이나 코끼리에게 조련비용을 물리는 식이고, 참치에게 자신을 가공하는 비용을 물리는 식이다. 착취당하는 대상이 자신을 착취하는 비용까지 물게 만드는 놀라운 마술. 부르주아의 유토피아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대학-기업은 그것을 이 땅 위에 실현한 것이다. 오, 대체 누가 그것을 꿈이나 꿀 수 있었단 말인가!

학생들이 노동대상이라면, 노동수단은 강의실이나 이런저런 시설들일 것이다. 노동자는? 강의실이나 칠판, 컴퓨터, 실험실 등의 노동수단을 써서 학생들을 가공하는 교수와 강사들, 그리고 그 ‘노동’이나 시설들을 관리하는 교직원들이다. “교수도 노동자다”라는, 상당히 논란을 벌여온 명제는 ‘전교조’보다는 대학-기업의 입장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단, 거기에 대학-기업이 추가하려는 것은 그 노동자들이 자본가인 소유자인 이사장이나 경영자인 총장의 지휘 하에 노동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전에 공대교수들이 취직하게 되어 총장과 면담할 때면, 총장이 “잘 부탁한다, 열심히 일해 달라”고들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경우 열심히 일해 달라는 부탁은 열심히 가르쳐달라는, 우리가 예상하는 그런 인가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돈이 되는 프로젝트를 많이 수주해서 열심히 일해 달라는 말이라고 들었다. 그러고 보면 대학의 어떤 일이 ‘영업비밀’이란 말을 듣는 순간 교수란 ‘영업사원’이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인 셈이다. 노동자와 관련해서도 대학-기업은 선구적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대학은 가르치는 노동력의 반 이상을 임시직, 비정규직인 시간강사로 채우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른 공장들이 평생고용이나 포드주의적 포섭을 할 때조차 대학은 시대를 앞서서 포스트포드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적인 유연한 고용을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논리 때문이겠지만, 십여 년 전부터 대학들이 건물과 시설을 확장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음 또한 잘 알려져 있다. 전에 농담처럼 대학총장들은 흔히 자신의 업적은 재임시절 그가 지은 건물 수로 남는다고 생각한다는 애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많은 학교들이 이게 예전에 알던 그 학교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은 건물들을 짓고 있다. 건물이나 시설들은 ‘불변자본’에 속한다. 교수나 교직원 같은 ‘가변자본’에 비해 불변자본이 이렇게 증가하는 것을 정치경제학에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증가’라고 명명한다. 맑스가 보여준 것처럼, 자본의 축적이 진행되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증가한다. 유기적 구성이 증가하면, 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학-기업에서는 근자에 그토록 빠른 속도로 불변자본 투자를 확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윤율이 저하하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 때문일까?

맑스는 유기적 구성이 증가해도 이윤율이 저하하지 않는 것은 저하를 상쇄하는 요인들을 통해 설명한다. 대학-기업에선 어떤 상쇄요인이 있는 걸까? 생산성의 고도화? 교수들을 다그치는 제도가 확대되고 있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학교육의 생산성 증가는 관련 상품들의 가치저하를 수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지 않는다. 다른 요인들의 영향도 있겠지만, 이윤율이 저하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불변자본의 확장에 필요한 비용을 자본가가 아니라 학생들이 지불하기 때문이다. 건물이 더 필요하다면, 등록금을 올리거나, 등록금 가운데 건물 건축비용 비율을 확대하면 된다. 그것은 대학-자본가의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돈을 들여 교육사업을 하는 ‘지사’들의 얘기는 식민지 시대 <상록수> 같은 낡아빠진 과거에나 발견될 뿐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된 대학이, 좀 더 훌륭한 경영을 하는 것은 좀 더 많은 이윤을 내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한국의 대학등록금은 최근 10여년간 미친 듯이 가파르게 치솟아, 이미 일본 대학을 추월했고, 미국 대학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또한 등록금 가운데 건물을 위해 비축한 기금의 비율은 학교에 따라 50%에서 90%에 이른다(반면 장학금을 위한 기금은 거의 없거나 10%미만인데, 이는 미국 대학을 전혀 따라가지 않고 있다). 여기서도 대학-기업은 자본가들의 위대한 유토피아임이 분명하다. 그토록 미친 듯이 건물을 짓고 불변자본을 확장하는데도, 이윤율이 저하하기는커녕 증가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엇이 이 놀라운 기적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일까? 아무리 불경이라도 끄떡없고, 특별히 경쟁력이 없어도 엔간해서 파산하거나 무너지는 일 없는 높은 이윤율의 기적의 기업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먼저 소극적인 요인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다니기에, 안 다닐 수 없는 게 대학이라는 것. “싫으면 다니지 마!” 따라서 엔간한 일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배짱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다른 종류의 학교와 다르지 않을 것이고, 다른 나라의 대학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말 중요한 ‘적극적’ 요인은 한국사회가 학교에서 배운 게 뭐든 상관없이 어느 학교를 졸업했다는 졸업장이 향후 인생의 많은 것들을 결정하는 학벌사회라는 조건일 것이다. 거기서 결정적인 것은 학교 이름이다. 아무도 그 대학에서 무얼 제대로 가르쳤을지 생각해보지 않으며, 또한 문제 삼지 않는다. 오직 어느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학벌사회, 그것은 대학이름이 브랜드인 사회다. 드나드는 사람에게 혹은 상표처럼, 혹은 낙인처럼 찍히는 사회, 그리하여 그 상표에 따라 노동력의 ‘질’이 평가되는 사회.

사실 브랜드의 가치는 사용가치나 상품의 질과 별로 관계가 없다. 유명 브랜드이기에 ‘좋은’ 것이고, 그래서 비싼 것이다. 대학-기업이란 교육의 질과는 무관하게 학교 이름으로 먹고사는 기업이고, 대학의 경영이란 그 브랜드를 관리하는 기술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노동대상이 스스로 지불하는 학비란 그 브랜드를 얻기 위해 지불하는 일종의 ‘지대’인 셈이다. 브랜드로 착취하는 자본, 그것이 대학-기업이다.

인구가 감소되어 대학에 들어가려는 학생수가 줄어든다고 해도, 이미 브랜드-가치를 확보한 대학은 아무런 걱정도 없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가속적으로 진행되는 전지구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그 대학-기업이 브랜드 뒤에 사실은 별 게 없음을 눈치채고 있고, 그래서 실속도 있고 브랜드 가치로는 그 학교들을 훨씬 능가하는 외국의 학교들에 직접 진출하려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치명적인 것은 전지구화 속에서 취업이나 활동 또한 전지구화되고 있음에 반해, 그 학교들의 브랜드 가치는 국내에서만 통용된다는 사실이다(세계순위에선 한참 낮은 순위라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치 외국산 명품들이 시장에 몰려오는 상황에서 국내에나 알려진 어설픈 브랜드로 버텨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예상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기업들마다 교수-노동자들에게 ‘국제기준에 맞는 실적’ 경쟁을 시키고 있고, 착취비용마저 스스로 지불하는 학생-노동대상들에겐 건물과 시설 등 일종의 스펙인 불변자본의 외형을 늘려 경쟁력을 치장하고 있다. 그러나 잘 나가는 대학의 졸업장도 마땅한 일자리를 얻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 이미 눈앞의 현실이 된 상황에서, 이 어이없는 유토피아적 대학-기업을 언제까지나 이 기적의 기업으로 두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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