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알림 : 게임의 규칙을 발견하라! (발터 벤야민의 글 «일방통행로»에 대한 단상)

- 유정아(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가드지 베리 빔바
글란드리디 라울리 로니 카도리
가드자마 빔 베리 글라싸라…

“그들은 타자기, 드럼, 갈퀴, 항아리 뚜껑으로 연주했다. 옆에서 사람들이 소리지르고, 웃고, 손짓 발짓으로 말한다. 우리는 사랑의 신음소리, 계속되는 딸국질, 시, 소 울음소리, 중세풍의 소음같은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이 내는 고양이 울음 같은 잡담으로 화답한다. 트리스탄 차라는 벨리댄스를 추는 무희처럼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장 얀코는 바이올린도 없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처럼 팔을 움직이다가 부수는 연기를 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참인 1916년, 취리히의 캬바레 볼테르. 여기에서는 한바탕 ‘놀이’가 벌어지고 있었고, 발터 벤야민은 바로 이 ‘다다이즘 놀이’에서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지각의 변화를 감지했다. ‘이제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각적 환영이나, 사람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음향구조물이기를 그치로 일종의 포탄이 되었다! 이 포탄은 보는 사람의 눈과 귀에 와 닿는다. 그것은 촉각적 성질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 ‘아름다운’ 가면을 보라! 차마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이 뒤죽박죽 일그러진 얼굴과, 이 일그러짐이 빚어내는 기이한 형상을! 비죽이 섞여있는 면면들 사이로 벤야민은 새 시대를 움직일 균열의 광채를 바라본다. 그 속에서 한 줄기 흘러나오는 진리의 빛을!

벤야민이 그간 주요 일간지들의 문예란에 발표한 글들을 묶어 출간한 책,『일방통행로』(1928)에는 현실과 꿈의 다양한 경험들에 대한 아포리즘들과 이미지적인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60편으로 구성된 이 책 안에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현대 도시의 거리 풍경들이 담겨있다. 벤야민은 이 거리를 걸으면서, 가게의 간판, 벽보, 플랭카드, 광고판, 쇼윈도, 번지수가 적힌 집들을 따라 단편의 제목을 붙여가며 그 사유의 발자욱들을 남겨놓았다. 이 자욱들을 따라 파리의 통행로를 걷다보면, 굳이 애써 찾지 않아도 온갖 철자들과 이미지들이 촘촘한 눈보라가 되어 사람들의 눈 위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 위에 인공조명이 드리워지고, 새로 설치된 전선이 지나가며, 또 그 위에 광고의 붉은 등이 켜켜히 쌓이고… 이 화려한 도시의 매혹에 이끌려 거리를 배회하는 산책자 벤야민은, 그러나 ‘사랑에 빠진 남자’라기 보다는 ‘질투에 사로잡힌 남자’에 가깝다. 애인의 매혹에 도취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혹시 모를 배신의 기호들을 탐색해 나가야 하는 고통스러운 남자처럼, 도시가 무심코 흘리는 사소하고 균열된 이미지들의 틈새에서 새로운 시대의 징후들을 읽어내려는 집요한 노력들. 마치 상형문자를 일일이 만지고 더듬거리며 그 의미를 해독해 나가는 고대학자처럼, 혹은 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목수처럼. 도시의 이미지들과 벌이는 한 판의 진실 게임!

벤야민과 평생의 우정을 나누었던 게르숌 숄렘에게 벤야민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자네가 <일방통행로>를 읽은 소감에서 피력했던 것처럼…[중략] 즉 그것은 아이들의 놀이라든지, 어떤 한 건물이나 한 삶의 상황 등에서 나타나는 구체성의 극단적 형태를 한 시대 전체에 적용해 보려는 시도였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집단적, 역사적 차원을 읽어내려는 벤야민은 많은 사람들이 흘리고 지나치는 모든 틈새의 모습들, 아이들의 버려진 장난감놀이조차 놓치지 않는다.

어떤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 더 오래, 더욱 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p. 80)

아이들은 건축, 정원일 혹은 가사일, 재단이나 목공일에서 생기는 폐기물에 끌린다. 바로 이 폐기물에서 아이들은 사물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을 향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을 알아본다. 폐기물을 가지고 아이들은 어른의 작품을 모방하기 보다는 아주 이질적인 재료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놀이를 통해 그 재료들을 어떤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 안에 집어넣는다. 우리는 이 작은 세계의 규칙들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 (p. 81)

이 기호들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삶이 들려주는 온갖 징표, 예감, 우리의 신체 기관을 통과하는 신호에 민감해져야 한다. ‘순간적 지각, 각성, 정신집중’이 필요하고 때로는 ‘예민함, 과도함, 발작, 도취, 신경감응’ 속으로 몰입해야 한다. 진실은 잘 갖추어진 지식 체계 속에서가 아니라, ‘돌연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내쫓기고, 시끄러운 소동, 음악소리, 혹은 도와달라는 소리 따위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 때문이다.’ 이 묘한 떨림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의 몸 또한 예민해져야 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나의 미래까지도 점쳐볼 수 있는 그 운명, 태곳적 사람들이 가장 믿을 만한 도구로서 자신들의 벌거벗은 육체에 지니고 있던 ‘예감’을, 우리 현대인이 지닌 둔감한 신체에 조금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다. 오로지 얄팍한 안위만을 염두에 두는 구성원들이 모인 인간사회는 동물적 우둔함을 보여주면서 그나마 우둔한 동물만큼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모든 위험에, 그것도 바로 눈 앞의 위험 속에 빠져드는 맹목적 대중이 된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삶에 집착한 나머지, 심지어 절실한 위험의 순간에서조차 지성의 인간다운 사용법, 즉 ‘예견’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실패한다. (p. 85)

예지력은 커녕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 조차 끌 수 없는 둔감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현대인들이 주시해야 할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눈과 귀를 앗아가는 그 매끄러움이 감추고 있는 세계의 그늘진 주름살, 지식의 투박한 몸짓,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들이다. 우리도 벤야민의 발자욱을 따라 ‘빨간색으로 반짝이며 흐르는 전광판 글자가 말해주는 내용이 아니라 아스팔트의 물웅덩이 위에 반영된 글자의 붉은 빛’에 민감해져 그들이 내뿜는 기호를 해독해보아야 한다. 다행인건 우리가 원초적 본능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벤야민의 말대로 ‘우리가 이미지의 세계에 끌리는 것은 지식에 대한 알 수 없는 어떤 은밀한 반항심’ 때문이 아니겠는가!

응답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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