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안다는 것은 암 선고를 받는 것과 같다

- 김대경


얼마 전 딸아이와 함께 모처럼 동네 도서관에 갔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부모들이 무척 많았다. 나도 이참에 멋있는(?)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며(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내 책을 보느라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데는 영 인색한 엄마다), 서가에서 근사한 그림책 몇 권을 골라 왔다. 그런데 웬걸, 우리 딸은 맞은편 꼬마 아이가 읽고 있던 <엄지 공주>라는 책을 읽어달라고 막무가내다. 요즘 들어 왜 그리도 ‘공주’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지, 예쁜 공주 그림이 안 들어가면 다 싫댄다. 나는 우리 옛 이야기 그림책인 <혹부리 할아버지>라는 제목의 그림책을 들이대며(?) “이 책도 정말 재미있어, 이 도깨비 좀 봐. 무시무시하지?”하면서 아무리 유혹을 해 봐도 소용이 없다. 다른 아이가 차지하고 있는 그림책을 자기가 읽어야겠다고 계속 우기는 상황에서 논리와 설득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 와중에 갑자기 ‘교육’, ‘가르치는 일’의 어려움과 문제점이 바로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흔히 쓰는 속담으로 ‘말을 억지로 물가까지 데리고 갈 수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것 말이다. 인간이 자라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막무가내의 상태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흔히 하는 말로 인식의 전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배움의 과정이 이루어져야 할 텐데, 그리고 그것이 결국 교육이 지향해야 할 목적일진대, 이 상황에서 과연 교사나 부모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당장 다섯 살 먹은 딸아이의 고집과 자의식도 이러한데,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고집과 자의식이 더하면 더했지, 덜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몸소 겪으면서, 이런 딜레마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이 갈수록 커진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오래 전에 읽었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나오는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 인생의 소중한 의미를 자연스럽게 알게 해 준 그 할아버지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 할아버지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사이자 지혜로운 어른의 모습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 때 나는 왜 내 주변에는 그런 할아버지와 같이 자상하고 따뜻하면서도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깨달음을 주는 지혜로운 이가 없을까 불평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문득 생각해 보니, 누군가를 찾아 나설 게 아니라 이제는 내가 그런 할아버지와 같은 교사이자 어른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문득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요로 다케시라는 도쿄대 해부학 교수가 쓴 『바보의 벽』, 『바보의 벽을 넘어서』라는 책을 읽었다. 일본인이 쓴 책이어서인지 혹은 출판업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옮겨 실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문체가 상당히 간결하고 간명하다. 그게 단점이자 장점으로 작용하는 이 책은 한때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점이 당시 일본의 젊은이들을 그토록 매료시켰는지 자못 궁금했다.

책에서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매우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아무래도 ‘안다는 것 혹은 배운다는 것’의 문제와 ‘어른이 된다는 것’의 문제를 다룬 부분이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는 한 가지 사례를 이야기한다. 자신이 학생들에게 임신, 출산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강의 시간에 틀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내내 남학생들이 제대로 집중하지 않고 딴짓을 하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이미 다 아는 얘기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자신의 문제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학교에서 대충 배운 지식만을 가지고 다 안다고 여기는 학생들을 보며 필자는 무척 안타까웠다고 말한다. 우리 교사들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하지 않는가. 수업을 진행하려고 하면, 이미 학원에서 선행을 했다고 다 아는 체하면서 딴청을 피우는 학생들을 많이 본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단순히 지식을 머릿속에 주입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도쿄대학에서 의과 대학 신입생 면접을 볼 때, 두 개의 두개골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면접 온 학생들에게 차이점을 말해 보라고 했더니, 한참 고민하던 학생들이 ‘이것이 저것보다 조금 작은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들어서면서 이런 현상이 더 악화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점점 바보의 벽에 갇혀서 살아가는 것 같다. 필자는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 보았습니다. “자네들도 암에 걸릴 수 있다. 치료법도 없는 암에 걸려 앞으로 반년밖에 못 산다는 선고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저기 피어 있는 벚꽃이 달라 보일 것이다.” “벚꽃이 다르게 보이는 순간, 작년까지 어떤 생각으로 저 벚꽃을 바라보았는지를 떠올려 보라, 아마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저 벚꽃이 작년과 다른가, 그렇지 않다, 자신이 바뀌었을 따름이다.” 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세계가 완전히 달라져 버립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어 버립니다. 설령 그것이 어제와 똑같은 세계라 하더라도.

필자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결국 인간은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지나치게 개성을 강조하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을 갖는다는 것과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그 부분이 내게는 무척 인상적이고 의미 깊게 다가왔다. 우리는 가끔 학생들에게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라든지, 자신의 꿈을 찾아 매진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하지만 요로 다케시는 나에게 맞는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취직하지 않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한다.

“왜 취직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나에게 맞는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란 답변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답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20대의 나이에 자신의 적성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 내용도 없는 공허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저는 일거리, 혹은 직장이라는 것이 사회에 뚫린 ‘구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구멍을 방치하면 피해가 발생합니다.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구멍을 찾아내 메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직업’입니다. 사회에 뚫린 구멍을 메우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딱 맞는 구멍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희망보다 사회의 구멍이 먼저 태어났고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불만이나 항의를 들어주는 직종을 ‘잡업(雜業)’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잡업을 권합니다. 젊을 때는 다양한 일을 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가볍게 보거나 적당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 가지곤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직장을 고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이 한층 더 싫어질 겁니다. 강력한 동기 부여가 없다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더더욱 하기 싫어질 뿐입니다. 자신의 논리에만 빠지면 손해를 봅니다.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가 타인의 의견보다 훨씬 정확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한 가지 일에서 배운 경험이 또 다른 뭔가를 생각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의식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강제로 시켜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분명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남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돌아 다니다 보면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기도 하는 법이지요.

어찌 보면 그의 주장이 다소 단순하거나 편파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신과 수능 성적에 맞추어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우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그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대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상 앞에 앉아서 이것저것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는 무엇이든 움직여 보고, 해 보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 깨닫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남과 다른 독특한 자기만의 적성과 재능을 계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또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유대인 프랭클의 이야기를 끌어들여서 설득하고 있다. 프랭클은 언제 죽을지 모를 강제수용소의 상황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결국 자신의 인생의 의미는 ‘다른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면서, 인생의 의미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말한다. 즉 어느 누가 보아도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그 운명에 임하는 사람의 태도가 주위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고 말한다. 상당히 막연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말이긴 하지만, 본인의 의지로 세상을 억지로 바꾸기에 앞서 자신의 삶 자체를 숭고하게 받아들이는 그 자세가 무척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결국 세상을 지금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길은 궁극적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데서 비롯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말이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금 생각해 본다. 가르친다는 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험에 나올 만한 지식을 주입시키는 교육,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내 인생에 체화될 수 없는 지식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학생들에게 바보의 벽을 더욱 공고히 쌓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이것이 과연 학생들의 삶에 어떻게 녹아들어갈 수 있을지를 좀더 고민해 봐야겠다.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고 애쓰고,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 나를 가두고 있는 벽을 깨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애쓰는 순간, 그것은 결국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인생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응답 2개

  1. 연초록말하길

    오래 전에 바보의 벽을 읽었는데 바보의 벽을 넘어서도

    번역이 된 모양이군요.

    상황은 그대로 있는데 내가 변한다 맞는 말입니다.

    오늘 고려 불화 전시를 보러 갔는데 사실 저는 수월관음도

    말고는 불화를 잘 보게 되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오늘 두 명의 여성이 조그만 소리로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그림을 보는 뒤에서 듣다 보니 그냥 보러 온 사람들 같지

    않았지요. 물어보니 불교 신자이면서 동시에 불교 미술을

    공부한다고요. 그녀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면서

    그림을 보니 갑자기 같은 그림이 아니로구나 놀랐던 시간이

    생각나네요.

  2. 박카스말하길

    ‘가르친다는 것’은 ‘나아지는 것’이다.
    멋진 선생님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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