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파사젠베르크»에 대한 몇 가지 성찰들

- 김홍중(서울대 사회학과)

1930년대 후반 파리에 망명하면서『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를 준비하던 벤야민은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다. 커피와 흡연 그리고 항상적 과로의 탓일 것이다.『파사젠베르크』에는 심장병을 앓는 사람의 생리적 징후가 존재한다. 충격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한 왼쪽 가슴을 두 손으로 누르며, 짐짓 차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심장병 환자의 표정이, 수많은 페이지들을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열광이나 분노나 격정은 최대한 절제되어 있다. 훌륭한 발견과 착상도 마치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나직이 진술되어 있다. 알 수 없는 순간 찾아와 작업을 중단시킬 사건적 불가피성(죽음)에 대항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작업은 내러티브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파편적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 본론으로 그리고 결론으로 가는 서사적 질서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서 독서를 시작해도 되고 어디에서 독서를 끝내도 무방하다. 이런 점에서『파사젠베르크』는 매 순간이 종말이자 기원이라는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신념과 철저하게 부합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돌발적인 방식으로 ‘도둑처럼’ 혹은 ‘전갈처럼’ 찾아오는 그런 죽음(심근경색)이란 결국 예고 없이 시간의 틈을 비추며 찾아오는 순수한 메시아적 사건과 흡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지하듯이 그의 작업은, 1927년 그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에 초현실주의자 루이 아라공의 소설『파리의 농부』를 읽고 열광하면서 처음으로 착상되었다. 당시에는 작은 규모의 문학에세이 형식으로 파리의 파사주(passage)를 다룰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 기획이 1929년에 갑자기 중단되고 맑스의 텍스트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난 1930년대 초반 이후, 프로젝트의 범위가 대규모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그는 1930년대의 눈으로 다시 바라본 프랑스 제 2제정기(1852-1870)의 파리를 좀 더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이후 약 10여년에 걸쳐 그를 괴롭힌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상황의 악화 속에서 벤야민의 생명을 유지시켜준 유일한 희망의 끈이 바로 파사주 프로젝트였다. 마침내 그가 1940년에 포르투갈로 도피의 길을 떠날 때, 그는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인용과 주석으로 구성된 원고뭉치를 당시 파리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있던 바타이유에게 위탁한다. 이어 벤야민의 불운한 자살 이후, 피에르 미삭(Pierre Missac)의 주도와 바타이유의 협조로 간신히 다시 발견된 이 원고는 1947년 경 뉴욕에 있던 아도르노에게 건네졌고, 약 30여년이 흐른 1982년에 전집의 5권(2책으로 나뉘어)으로 출판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현재의 판본에는 두 편의 개요(exposé)와 초창기의 초고들 그리고 책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른여섯 개의 묶음(Konvolut)으로 구성된 ‘노트와 자료들’이 들어 있다.

약 13년에 걸쳐 진행되어 결국 마무리되지 못한 이 방대한 작업을 통해 벤야민이 기획한 것은 무엇일까?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미완성의 책은 그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개의 단서가 있다. 방법론적 성찰을 집중적으로 수행한 묶음 N을 제외하면 특히 1939년에 불어로 씌여진 초고의 서론이 주목할 만하다. 거기에서 벤야민은 판타스마고리아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며 이를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기조음으로 설정한다. 원래 ‘판타스마고리아’는 맑스의『자본』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에 기원을 둔다. “인간의 눈에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die phantasmagorische Form)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K. Marx. 1867.『자본론. 1-上』. 김수행 옮김. 비봉. 1989. p. 92). 그러나 벤야민은 상품간의 관계와 사회적 관계 사이의 구조적 착시에 기인하는 (개인의 인지적 수준에서 발견되는) 이데올로기적 오인(誤認)을 넘어서는 수준에서 판타스마고리아 개념을 사용한다. 판타스마고리아는 사회의 문화적 표상물들이 뿜어내는 매혹과 환상의 결합물이다. 그것은 파사주, 온실, 파노라마, 공장, 밀랍 인형 박물관, 카지노, 역, 온천 휴양지 등의 건축물과 후일 오락산업의 맹아가 되는 만국박람회를 지배하는 마성이다. 상품의 매력에 빠져 도시를 부유하는 산책자의 체험의 본질은 판타스마고리아에 의해 규정되고 있으며, 부르주아 개인들의 실내 공간 역시 안락과 안전의 판타스마고리아 속에서 건설된 것이다. 오스만의 파리개조는 프랑스 근대 문명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판타스마고리아를 실현한 것이다. 벤야민의 판타스마고리아 개념의 포괄성은 19세기 지배계급의 진보주의적, 자본주의적, 낙관주의적 판타스마고리아를 파괴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영겁회귀 사상(니체, 보들레르, 블랑키) 역시 또 다른 판타스마고리아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꿈에서 깨어났다는 꿈). 요컨대『파사젠베르크』는 20세기의 각성된 눈으로 19세기가 꾼 꿈(Traum)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벤야민은 19세기가 한편으로는 사적 개인(particulier)을 발명하여 내면적이고 성찰적인 개인주의로의 지향을 보여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판타스마고리아에 빠진 집합체, 즉 ‘꿈꾸는 집단(das träumende Kollektiv)’ 또한 만들어내었음을 정확하게 통찰한다. 봉건적 질서로부터 해방되어 탈마법화되고 합리화된 세기로 19세기를 이해할 때, 우리는 그런 이성의 시대로부터 어떻게 20세기의 야만성이 도출되었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무기력하다. 하지만 벤야민이 보는 19세기는 합리성의 세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또 다른 신화, 꿈, 판타스마고리아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이런 꿈으로부터 각성하는 것은 꿈 전체를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판타스마고리아와 뒤섞여 있는 소망이미지(Wunschbild)들을 파괴적으로 구출하여,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정치적 가능성을 구제한다는 것, 그래서 지금 당면한 정치적 상황을 폭발시킬 화약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벤야민에게 모든 꿈은 환상(판타스마고리아)인 동시에 예언(유토피아)이기도 하다. 꿈은, 역사적 주체의 눈을 가리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그들의 절실한 원망(願望)이기도 한 것이다. 이 원망의 핵심에는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기원적이고 집합적인 지향이 있다.『파사젠베르크』가 맑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전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사상(생시몽과 푸리에)의 탐구에 집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에게 존재하는 유토피아에의 꿈은 20세기가 파괴적으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해야 하는 역사의 질료를 이룬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에게 과거의 탐구는 언제나 ‘정치적인 것’을 위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에게 과거는 야만과 폭력의 역사를 숨기고 있는, 파괴되어 재구성되어야 비로소 그 아래에 억압되어 있던 목소리들을 방출하는, 징후들의 집적 공간이다. 더 나아가 과거/문화에 대한 탐구는 궁극적으로 현실의 정치적 과제에 복속된 것이었다(그는 강조한다. “정치는 역사에 대해 우위를 가져야 한다”). 벤야민이 말하는 ‘정치’는 1930년대의 어두운 상황에서는 그러나 메시아주의적 울림을 가질 수밖에는 없었다. 혁명이 역사의 기관차가 아니라 그 기관차의 브레이크를 당기는 것이라 말하는 벤야민에게 ‘정치’는 조직되거나, 계획되거나, 지도될 수 있는 새로운 상황의 창출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단이고, 파괴고, 정지이다. 그것은 미지(未知)의 실천으로 남는다. 순수한 가능성, 역사의 타자성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상상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사건으로서의 메시아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벤야민이 말하는 ‘정치’의 모호성이 존재한다. 그의 정치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신학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신학이야말로(특히 유태신비주의 사상이야말로) 억압받은 자들이 세속의 중심에서 구원의 희망을 유지하고 실천하는 오래된 형식이며, 그런 점에서 혁명적 인화력을 갖는 생생한 사유의 체험을 제공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논쟁의 여지는 항상 있지만, 신학의 오랜 범주들과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이렇게 사유된 ‘정치적인 것’은 불가피하게 타력(他力)구원의 방향으로 그 나침반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벤야민 사유에 대한 곡해는 아닐 것이다(우리는 이와 같은 벤야민 메시아주의의 메아리를 20세기 후반의 아감벤이나 바디우 혹은 랑시에르와 같은 정치철학자들의 논의 속에서 다시 발견한다. 이들을 수렴시키는 것은 ‘정치적인 것’에의 열정 그리고 일종의 결단주의적 에토스이다). 역사를 조형하는 주체가 더 이상 자명한 실체가 아닌 모호한 빈자리가 되어버린 우리 시대에, 벤야민의 타력구원의 메시지는 비할 바 없는 정직성과 예리함의 형식으로 우리의 심장을 아프게 찌르고 들어온다.『파사젠베르크』는 이런 의미에서 19세기가 꿈꾼 혁명의 가능성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그 불가능성에 절망하는 책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집요한 절망의 행위를 통해 불가능한 사태를 변화시키려는 벤야민의 간지(List)를 읽어내는 것이 아마도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응답 3개

  1. […] 맑스의 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에 기원을 둔다(Marx, 1867[1989]: 92). ‘인간의 눈에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die phantasmagorische Form)…‘ … 요컨대 는 20세기의 각성된 눈으로 19세기가 꾼 꿈(Traum)을 […]

  2. 잘 읽었습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3. 지나가다말하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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