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 김강기명(카이로스)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정치신학

“정상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나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예외는 원칙을 보장할 뿐이지만 원칙은 대개 예외에 의해서만 생존한다.
-칼 슈미트, 『정치신학』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겪었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종교의 영역으로 후퇴했던 신학을 정치의 영역으로 다시금 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신학은 더 이상 기독교나 유대교의 신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정치신학’(칼 슈미트)이었다. 슈미트가 신학을 정치사상에 있어 중요한 주제로 다루게 된 것은 자유주의에 기초한 의회주의와 법치주의의 철저한 무능과 위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그것은 정치의 세속화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17세기에 절대군주의 정당성을 보증해주었던 초월적 유신론으로부터 이신론적인 국가이성으로, 그리고 마침내 신 없이 실정법이 주권의 정당성을 떠받치게 되자 주권은 대중봉기와 극단적 테러리즘으로 나타나는 좌우 양쪽의 ‘대중민주주의’의 발흥 앞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길이 없어졌던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 국가의 ‘법’은 이러한 예외적 상황을 사유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의회제는 더 이상 토론을 통해 진리와 정당함을 보증할 수 없는 과두제 기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슈미트는 특히 소렐이나 레닌에게서 나타난 혁명이론에 대항하는 정치신학을 구상하게 된다. 그것은 주권적 독재의 이론인‘정치신학’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결단’의 이론이었다. 혁명적인 결단의 이론들 앞에서 필요한 것은 자유주의의 해법인 대화와 합리성이 아니라 또 다른 결단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을 위해 그는 법학 안에 법학의 외부를, 즉 ‘비상사태’의 이론을 도입한다. “주권자란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이다.”(『정치신학』) 이러한 정의는 기존의 주권의 정의, 즉 ‘최고이며 연역할 수 없는 지배권력’이라는 정의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슈미트가 보기에 기존의 이론은 주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전혀 해명해주지 못했다. 국민의 합의? 투표를 통한 최고권력의 선출? 이것은 주권자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주권자가 누구인가는 누가 지금이 극도의 급박상태인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동시에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지를 통해서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당성의 위기 앞에서 슈미트는 유신론 자체를 ‘세속화’해 버렸던 것이다.

벤야민의 정치신학은 슈미트가 다다른 이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이야기했듯 벤야민의 논문, 『폭력 비판을 위하여』는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의 반의회주의적이고 반계몽주의적인 흐름 위에 위치하고 있다. 벤야민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비폭력적인 대화를 통한 갈등의 해결은 오직 사적 인격들 간의, 그것도 진심의 문화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비폭력은 언제나 위태위태한 타락의 위험에 직면하여 있다. 만일 누군가가 거짓말을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의 분노를 일으켜 폭력을 행사하도록 만든다면. 법은 바로 – ‘예외’라고 할 수 있을 –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사적 개인들의 관계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법은 법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즉 벤야민의 논의를 따르면 법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폭력이 함께 서있는 것이다. 의회주의는 결코 이러한 상황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법은, 그리고 법을 통해 성립되어 있는 국가는 애초부터 폭력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반대의 예로도 증명이 된다. 우리가 때로 자연재해를 겪거나, 혹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어미가 겪는 엄청난 고통을 ‘폭력’이라고 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어떤 ‘힘’이 행사되었고, 그것은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위해를 낳지만, 그것은 윤리적 관계들과 관련을 맺을 경우에만 비로소 단어의 충만한 의미에서 폭력이 되며, ‘법과 정의’라는 개념이 바로 이 윤리적 관계들의 영역을 특징짓는다. 그런 점에서 벤야민은 자신의 폭력 비판의 과제는 폭력이 법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서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벤야민은 이 관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법의 정립을 낳는 폭력을 ‘법정립적 폭력’으로, 법을 보존하는 폭력을 ‘법보존적 폭력’으로 부른다.

이러한 두 종류의 폭력에 대한 구분이 슈미트의 ‘예외’와 ‘정상’의 구분에 상응한다는 점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파업권은 분명 법에 의해 보장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익히 경험해 왔듯이 국가는 그것을 어떻게든 불법과 폭력으로 규정한다.(총파업이 실정법을 어기지 않는 경우에도!) 여기서 부딪히는 것은 일상의 법을 지키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가 총파업을 ‘폭력’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현재의 법적 상황 자체를 근거 짓고 수정하는 행동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자들은 총파업에서 예외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총파업의 규모나 힘이 약할 때조차도 국가 자체와 맞서고 있는, 혹은 새로운 법을 정립하고 있는 것이 된다.

총파업의 예가 너무도 우연적이고 산발적인 것으로 보인다면, 전쟁권이라는 다른 예는 좀 더 슈미트의 논의와 통한다. 법주체들이 승인하는 전쟁의 선포에는 언제나 ‘평화’가 그것의 상대자로 나타난다. 즉 전쟁은 그것 이후 어떤 새로운 관계를 만들게 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전쟁 중의 폭력은 처음부터 아주 직접적으로, 강탈적 폭력으로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지만, ‘평화’라는 단어가 모든 승리에 필수적인 – 그리고 다른 모든 법적 관계들로부터 독립해 있는 – 선험적인 승인을 가리키고 있다.

즉 전쟁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주권자의 결단 아래 전쟁이 치러지진다. 그리고 전쟁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관계들(평화?)이 존속하기 위해 어떤 법적 보증이 필요한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새롭게 만들어진 이 관계들 자체가 새로운 ‘법’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즉 이 두 경우에서 보듯이 정상적인 법적 상태는 언제나 그 기초에 예외를 두고 있다. 그리고 정상적인 법적 상태는 그 예외를 목적으로 하여 일상적인 법보존적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통제하는 각종의 법률들과, 병역 자원을 계속해서 동원하는 수단인 국민개병제 등은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권의 외부란, 국가의 외부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일까? 혁명적 총파업조차 법을 정립하고, 국가를 새롭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폭력의 악순환 속에 놓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더욱이 『폭력비판을 위하여』는 한걸음 더 나아가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 서로 얽히고설켜 구분될 수 없는 지대를 다루고 있다. 그 스스로 법을 제정하고 보존하는 경찰권력의 도래가 그것이다.

경찰 안에서는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구별이 지양되어 있다. 법정립적 폭력은 그것이 승리를 통해 입증되기를 요구받는 반면, 법보존적 폭력은 그것이 새로운 목적을 설정하지 않는다는 제한에 묶인다. 경찰의 강제력은 이 두 조건들로부터 해방되었다. 경찰의 강제력은 법정립적인데, 그 이유는 그것의 특징적인 기능은 법률을 공표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입법적 권리를 갖고 반포하게 하는 모든 법령을 공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찰의 강제력이 법보존적인 이유는 그것이 그러한 목적을 수행하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경찰은 법적 목적과 관련이 전혀 없는데도 법령에 의해 규제된 삶을 통해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존재로서 시민을 따라다니거나 또는 시민을 완전히 감시하거나 아니면 명백한 법적 상황이 주어져 있지 않은 무수히 많은 경우에 ‘치안 유지 때문에’ 개입한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벤야민의 해법은 ‘예외’에 대한 사유를 더 극단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목적의식적 ‘결단’과 구분되는 예외, 구분되는 폭력을 사유하는 것이었다. 『폭력비판을 위하여』의 후반부에서 논의는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에서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이라는 주제로 옮겨간다. (법보존적 폭력 또한 정립하는)법정립적 폭력이 근거하고 있는 지점은 사실상 ‘신화적 폭력’이다. 신화적 폭력이 보여주는 것은 폭력이 어떤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발현(Manifestation)’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 먼저 증명된다. 분노의 감정은 사람을 극명하게 드러나는 폭력의 폭발로 이끈다. 이 폭력은 이미 어떤 확정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발현이다.

벤야민은 자신의 자녀들을 레테 여신의 두 자녀(아폴론과 아르테미스)보다 낫다고 자랑하다가 자녀 모두를 잃는 벌을 받은 니오베의 신화에서 신화적 폭력의 발현을 발견한다. 니오베의 교만은 그것이 법을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운명에게 도전했다는 점에서 자신 위에 내릴 숙명을 불러낸다. 신들의 폭력은 니오베의 자녀들은 피 흘려 죽게 하지만 니오베 앞에선 멈춤으로써 그녀를 영원히 죄 받은 존재로 남겨두며, 그것을 통해 인간과 신의 ‘경계’를 설정한다. 벤야민은 바로 이러한 신의 분노의 ‘발현’으로서의 폭력이 법정립적 폭력보다 더 근원에 놓인 ‘권력의 정립’을 보여주며, 바로 이것이 곧 모든 정립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이 자리 잡은 장소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 어떠한 목적적 결단이 아니라 말하자면 ‘운명’의 폭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법정립은 목적한 것을 법으로서 투입하는 순간 폭력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법 자체를 정립적인 폭력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이것을 통해 벤야민은 슈미트의 주권이론이 결국 “상례화된 비상사태”(『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로 귀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벤야민은 이 주권자의 정치신학을 전복하는 자신의 독특한 정치 신학, 즉 신화적 폭력의 “역사적 기능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신적 폭력’을 제시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정상을 규정하는 예외(비상사태)나 상례화된 비상사태가 아니라 오직 예외일 뿐인, ‘진정한 비상사태’(『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대한 사유이다.

“모든 영역에서 신이 신화와 대립하는 것처럼, 신화적 폭력은 신의 폭력과 대립한다. […]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 값을 치르게(sühnen) 한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사해주고(entsühnen),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

벤야민은 구약성서 민수기에 나오는 고라 일족의 심판 이야기를 니오베의 신화와 대립시킨다. 이야기 속에서 신은 어떤 경고도 없이, 그리고 피 흘리는 절차도 없이 모세에 대립하여 특권을 요구하던 고라 일족 전체를 몰살한다. 그런데 일견 두 이야기는 별반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고라의 심판이 죄값을 치루게 하는 폭력과는 다른 ‘죄를 사하는 폭력’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벤야민의 논의에서 양자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것은 ‘피’이다. 신화적인 법의 폭력은 피를 흘리는 존재, 즉 순수하고 단순한 생명 자체에 폭력 자체를 위해 가해지는 피의 폭력이고, 이와는 반대로 순수하게 신적인 폭력은 모든 생명에 대해 행사되지만, 이것은 생명체를 위한 면죄라는 것이다.

여기서 벤야민이 다루고 있는 것은 역사의 구원에, 혹은 혁명적 봉기에 있어 누군가의 ‘목숨’은 죽어야 하는 그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벤야민은 여기서 ‘살인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되는 ‘생명’을 ‘목숨’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우리에게 한 가지 힌트를 주고 있는 듯하다. 구약성서의 면죄하는 폭력에는 언제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함께 주어진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 계명이 판단의 척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계명은 무엇보다 “이미 실행된 행위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이며, “행동하는 인격체 또는 공동체에 대해 행동의 지침으로 있다. 행동하는 인격체나 공동체는 홀로 있으면서 그 계명과 대결해야 하며 예외적인 경우들에서 이 계율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 더 나아가 벤야민은 이 계명이 환기하는 것은 단순한 목숨이 아니라 ‘삶의 신성함’에 대한 것이라 주장한다. 생명은 ‘단순한 목숨’으로 표상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목숨 너머의 것이다.

“’현존재의 행복과 정의보다 […] 현존재 자체가 더 상위에 있다는 점을 고백한다.’(쿠르트 힐러) […] 이 문장은 ‘현존재’가(혹은 ‘생명이’) ‘인간’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전체 상태를 의미한다면 엄청난 진실을 내표한다. […] 인간은 어떠한 경우라도 인간의 단순한 생명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인간 속의 단순한 생명과도, 그리고 인간의 어떤 특정한 상태나 특성과도, 심지어 인간의 신체적 존재의 유일무이함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적 폭력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지 ‘목숨’을 살리느냐 죽이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적 폭력은 때로 날것으로서의 목숨을 끊어놓는 내리침의 사건 속에서 인간 전체라는 ‘생명’을 사하며 살리는 그런 폭력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신적 폭력의 사유를 구원하는 폭력에 관한 것으로, 즉 메시아의 정치신학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사유에서 운명과 투쟁하는 ‘영웅’과는 달리 유대주의의 사유에서 메시야는 언제나 심판함으로써 구원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폭력이 상례화된 예외상태를, 그리고 법이 무너지더라도 또다시 법정립이 발생하고야 마는 운명의 악순환을 돌파한다.

“신화적 법 형식들의 마력 속에 머무는 이러한 순환 고리를 돌파해내는 데에서, 법과 더불어 그 법에 의존하는 폭력들처럼 그 법이 의존하는 폭력들 전체, 즉 종국에는 국가권력을 탈정립하는 데서, 새로운 역사 시대의 토대가 마련된다. 만약 현재 여기저기서 신화의 지배가 이미 무너지고 있다면, 법에 대한 반대가 불가능할 만큼 새로운 시대가 까마득하게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에서 이러한 신적 폭력의 이미지에 상응하는 것은 무엇일까? 『폭력비판을 위하여』 안에 있는 근거들을 탐색해보자면 일차적으로 그것은 소렐에게서 영감을 받은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다. 소렐은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을 법정립적인 법정립적 총파업, 즉 입법적이고 제헌적인 정치적 총파업의 폭력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법을 파괴하는, 따라서 국가를 파괴하는 총파업이며, 순수 수단으로서 비폭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신적 폭력을 곧장 프롤레타리아 총파업과 연관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정작 신적 폭력을 다루는 마지막 문맥에서 ‘프롤레타리아 총파업’ 자체는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혁명적 폭력’ 역시 조건법으로 말해지고 있다. 벤야민은 어쩌면 ‘신적 폭력’은 실정적인 방식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즉 폭력이 행사되는 그 순간에는 알 수 없는 폭력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벤야민의 서술 속에서 신적 폭력은 여전히 다른 예로 제시될 수 없는 ‘신적 폭력’ 그 자체로 남는다. “특정한 경우에 순수한 폭력이 언제 실제적으로 있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가능하지도 않고, 똑같이 시급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비할 바 없이 큰 영향을 속에서가 아니라면 신적인 폭력이 아니라 오로지 신화적인 폭력만이 그 자체로서 확실하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폭력이 인간에게 주는 면죄하는 힘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라고 말한다. “역사의 ‘철학’인 이유는 그 역사의 결말이라는 이념만이 그 역사의 시대적 자료들에 대해 비판하고 구분하며 결정하는 입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즉 역사의 결말은 어떤 사례나 모델로서 우리에게 올 수는 없는 것이다.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살짝 보여주었고, 뒤를 이은 수많은 좌파들이 아주 분명하게 제시했던 것과는 반대로. 벤야민은 어떤 실정적인 것으로 이 신적 폭력이 말해지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그것의 퇴락을 막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전태일과 광주라는 우리의 역사적 기억을 다루어보는 것은 어떨까. 전태일이 자신의 목숨에 불을 붙였을 때, 그것은 1970년대 전체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광주도청의 마지막 총성이 울렸을 때 그 역시 80년대의 모든 ‘생명’을 구원하는 폭력이 그곳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결국 신적 폭력을 통한 구원은 실정적인 방식으로 말해질 수 없지만, 분명히 역사 속에 존재했던/할 어떤 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가 역사를 바라보았던 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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