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사고하다

[2호] 이산하는 죽음 (오키나와, 일본)

- 윤여일(수유너머R)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은 전사자의 묘지이다. 광장에 가지런히 세워진 검은 석제 묘비는 한자 한자 전사자의 이름을 새기고 있다. 광장 뒤편의 기념비는 일본의 각 도시·부·현 단위로 전몰자를 위령하고 있다. 찬찬히 비석들을 훑어본다. 일본인만이 아니라 적국이었던 미군 병사의 이름도 눈에 띤다. 전쟁의 역사를 뒤로 하여 민간인과 군인 전사자의 이름이 국적을 불문하고 함께 새겨져 있다.

1960년대 오키나와 현지사는 미국의 전쟁기념공원을 방문했다. 그는 거기서 2차 대전의 미군 전사자만을 추도하는 장면을 보고는 오키나와에 국경을 초월하여 죽은 자를 추도하는 공원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오키나와전의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현지주민의 반대정서가 없을 리 없었다. 하지만 긴 설득과정 끝에 평화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이후 매년 8월 15일, 미국에게는 승전일이며 일본에게는 패전일인 그날이 되면, 이곳에서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일본 시민과 미군 병사는 나란히 서서 자국의 사자를 추도하며 각각 헌화한다.

평화기념공원에는 한국인 위령탑도 세워져 있다. 韓國人慰靈塔이라는 글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비문은 시인이자 사학자였던 이은상씨가 썼다. 오키나와전에는 1만 명 가까운 한국인 전사자가 있었다고 한다. 위령패에는 한글로 이런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순국선열을 기리며”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은 당신을 기립니다.” 위령탑에 가지런히 모여 있는 석자의 한국인 이름들을 보면 이곳은 확실히 국경을 넘어선 추도공간 속에 한국인을 위해 마련된 자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감상은 일본의 현 단위로 세워진 비문으로 시선을 옮겨 빼곡하게 채워진 넉자의 이름들 사이로 김(金), 이(李) 등으로 시작되는 석자의 이름을 발견할 때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다시 한국인 위령탑으로 시선을 옮겨오면 그 이름의 주인들은 저 여러 비문 속으로 흩어져 있는 이름들만큼이나 여러 사연의 죽음을 맞이했으리라는 상념에 사로잡힌다. 하나의 한국인이라는 표상은 흐트러진다.

그들은 조선인으로서, 그리고 일본의 신민으로서 죽어갔다. 미군에게 살해당한 자도 있었을 테며, 미군을 살해한 자도 있었을 것이다. 미군에게 붙잡혀 치욕스럽게 죽기 전에 천황을 위해 옥쇄(玉碎)하라는 일본군의 명령에 자결한 자도 있었을 테며, 그런 일본군에게 저항하다가 죽어간 자도 있었을 것이다. 누가 죽였을까. 죽기 전에 누가 그들의 적이었을까. 그 여러 죽음의 의미는 결코 자명하지 않다. 순국선열을 기린다고 할 때 대체 그들은 어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떤 나라가 있었길래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 위령패에는 어떻게 ‘대한민국 만세’라는 문구가 써질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다. 다만 각기 다른 죽음들이 내게 안긴 다른 상념만큼은 말할 수 있다. 한국에 방문한 일본의 시의원들을 가이드해서 서대문형무소에 간 적이 있다. 가이드로서 사전답방은커녕 사전조사도 못했지만, 음산한 독방과 전시된 고문기구, 그리고 사형대는 그 공간에 얼룩진 죽음의 의미를 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옥사한 유관순이 그곳의 죽음을 상징한다. 실제로는 복잡했을 서대문형무소 조선인들의 죽음은 한국 근대사에서 일제에 맞선 저항으로 의미화되었다.

하지만 식민지인의 죽음은 제국의 궤적을 따라 자기 삶의 장소를 떠나 이산(離散)한다. 태평양전쟁은 ‘식민지-제국’인 일본의 전쟁이었지, 식민지를 배제한 일본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 전쟁에는 전쟁이 끝나고 등장하는 국가의 이름으로는 회수되지 않는 죽음이 있다. 식민지 인민이며 제국의 군인인 이들이 있었다. 중국대륙에서 어떤 조선인은 중국인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으며, 동남아시아에는 현지인을 포로로 감금했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약 3000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1942년 8월부터 정식 군인이 아닌 군속의 신분으로 채용해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주로 포로감시원의 임무를 맡겼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열린 BC급 전범재판에는 총 5700여명이 회부되었는데, 그 중에 148명은 조선인이었고, 23명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23명 중 16명은 통역이었고, 나머지는 포로수용소 감시원이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소재가 되었던 연합국 포로의 노동력을 이용한 태면(泰緬)철도 공사와 관련해서 조선인 35명이 기소되고 그 중 9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식민지인의 죽음은 여기에도 있다(BC급 전범재판에서 처형되지 않은 조선인 전범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일본국적을 박탈당한다. 그들은 형이 확정된 시점에 일본인이었다는 이유로 형의 집행이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인에게는 지급되는 군인은급이나 원호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들의 전쟁협력을 들추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게는 역사가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생존이 걸렸을 그 절박한 상황을 역사의 뒤에 온 자로서 어떻게 쉽게 단죄할 수 있겠는가. 그보다는 그들의 복잡한 죽음의 의미를 지금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다는 사실에 기대어 사회를 이해하는 나 자신의 감각을 되묻고 싶다. 흔히 사회는 국제세계의 기본적인 구성단위이며, 세계를 분할하면 자기충족적인 문화와 정부, 경제를 가진 유기적인 통일체로서의 사회가 나타난다는 상식이 지배적이다. 한 사회와 한 개인은 하나의 국민국가에 속하며, 국제 세계는 복수의 자기충족적 단위인 ‘사회=국민국가’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배타적인 동일성의 원리가 깔려있다. 한 사람이 복수의 국민, 민족, 인종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를 분할불가능한 개체(individuum)로 보는 감각은 개인(individual)을 분할불가능한 실체(individuum)로 보는 이해방식과 더불어 근대국민국가의 기본적 논리가 된다. 어떤 사회는 가령 한국 사회이거나 일본 사회이며 어떤 개인은 한국인이거나 일본인이지, 동시에 그 두 가지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조선인의 죽음은 이 틀에서 비어져 나온다. 제국의 경험은 폭력을 동반한 뒤얽힘을 낳으며, 그 뒤얽힘으로 말미암아 제국의 시대가 끝난 후 출현한 국민국가의 역사로는 회수되지 않는 영역이 생긴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관계, 즉 한 개인은 한 사회에 속하며, 한 사회는 한 국가의 것이라는 구도로는 포착되지 않는 영역이 생긴다.

따라서 네이션의 경계를 의미교환의 자명한 단위로 삼아 피(彼, 일본, 국외)와 아(我, 한국, 국내)를 쉽사리 가를 수 없다. 어떤 문제와 섞여 들어가느냐에 따라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관계는 종적질서로는 사고할 수 없는 복잡한 입체감을 갖는다. 조선은 그저 한국사에 딸려있지 않다. 어떤 조선은 한국사 바깥에 있으며, 그 조선은 한국인에게도 낯설다.

– 윤여일 (수유너머 R)

응답 1개

  1. 심이말하길

    생각하게 만드는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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