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기술복제의 파시즘적 전망

- 고헌(수유너머R)


벤야민의 논문「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이제껏 영화이론의 첫 출발로, 매체미학의 선구적 역할로, 맑스주의적 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아 왔다. 또한 ‘기술과 기계, 그리고 대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벤야민을 두고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공상적이라는 지적이 있어 왔다. 실제로 그가 예찬 했던 영화는 현대에 와서 가장 혁명적이기를 포기한 매체처럼 보인다. 영화는 헐리웃의 대자본의 기획 하에서 끊임없이 주류적인, 자본주의적인 가치에 대해서 읊어 대고 있지 않은가? 영화야 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대중들에게 싸구려 위안을 제공함으로써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 영화의 이러한 현실은 아마도 당시에 벤야민이 가장 우려했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는 이 논문에서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비관적으로 전개되는 현실에 대한 우려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이러한 우려의 목소리는 보지 못한 체 낙관적 전망에만 들떠 그의 이론에 열광했던 것일까? 현재의 우리는 벤야민의 이론을 어떻게 다시 읽어야 하는가?

제의가치와 아우라

이 논문에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은 역시 ‘아우라’이다. 아우라란 사물이 있는 그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로 정의 된다. 사물의 일회적 현존재, 사물의 ‘여기와 지금’으로 정의되는 아우라. 우선 간단하게 사물이 갖고 있는 권력이라 정의해 두자. 예술작품이 갖는 아우라 즉 예술작품의 권력은 그 작품이 처했던 역사를 통해 구성된다. 세월의 무게에 의한 물질적 변화, 소유관계의 변화와 그 작품이 처했던 사회적 역사적 맥락들과 전설들, 이러한 모든 종류의 아우라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작품의 진품성, 즉 단 하나 밖에 없는 원본의 권위이다. 아우라는 이렇게 진품성을 통해 사물에 달라붙는다. 아우라는 사물에 달라 붙어있는 잉여이고 권력이며, 물신숭배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 요소이다.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벤야민은 ‘제의가치’를 통해서 라고 말한다. 벤야민은 예술의 기원이 종교적 의식에 있다는 점을 들어 ‘제의가치’를 예술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본다. 의식을 행할 때 주술을 위한 사물들은 특권적 권력을 지니며 그것의 미적인 면보다 그것의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 했다. 주술을 위한 사물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그 영향력(주술)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이때의 사물들은 의례가 행해진 뒤에는 감춰지고 시야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그리고 사라진 사물의 권력 아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 사물의 ‘지금 여기’를 느끼는 것이다.

예술작품에서의 이러한 ‘제의가치’를 무력화 시키는 것이 ‘전시가치’이다. 복제기술의 발달로 인해 ‘제의가치’는 ‘전시가치’로 대체된다. ‘전시가치’란 말 그대로 예술작품을 사람들에게 전시하여 그것을 보고 즐김으로서 생기는 가치를 말한다. 감춰져 있던 제의도구들은 복제되어 사람들 앞에 전시되기 시작한다. 주조와 압형, 활자의 발달, 사진의 발명 등, 역사 이래로 복제기술의 발달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수호해 주는 ‘제의가치’에서 그것을 파괴시키는 ‘전시가치’로의 이동을 촉진시킨다. 이러한 복제기술 중에도 사진의 발명은 혁명적인데 왜냐하면 사진예술은 원본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보기에는 많은 반동적인 예술가와 이론가들이 이 혁명적 매체의 탄생을 바라보면서도 그 속에서 아우라를 수호하기 위해 마지막 몸부림을 친다. 사진이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열정적이지만 쓸데없는 논쟁과 기존의 미술작품의 아우라를 흉내 내려 노력했던 당시의 사진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반동적 예술가와 이론가들과 더불어 사진에서 아우라가 마지막 저항을 하는 곳은 ‘인간의 얼굴’에서 이다. 인간의 얼굴은 그 자체로 그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다. 개인의 얼굴에는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비밀스럽게 행했던 모든 의식, 의례들이 외화 되어 남아 있다. 주름살하나, 표정하나에 그 사람의 아우라가 남는다. 또한 초기 사진에서는 기술적 한계 때문에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장시간의 노출시간이 필요했다. 이 길고 긴 노출시간 속에 사진촬영 현장의 공기가 사진 속에 담겨 아우라를 만들어 낸다.

인격과 아우라의 해체, 몽타주의 출현

‘인간의 얼굴’과 긴 노출시간은 아우라가 사진 속에서 마지막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 이후 외젠 앗제에 와서 비로소 복제기술에 걸맞은, 아우라가 소멸된 사진이 탄생하였다. 앗제는 파리의 텅 빈 거리를 찍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파리의 풍경, 텅 빈 거리 속에서 ‘인간의 얼굴’은 찾아 볼 수 없다. 마치 범죄현장의 증거물 확보를 위한 것처럼 건조하게 찍힌 사진은 아우라가 아닌 ‘전시가치’에 봉사하게 된다. 작품의 의미는 아우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진에 달린 설명문구에 의해 좌우된다. 여기서 몽타주로서의 예술의 가능성이 열린다. 사진은 이미지 그 자체가 아니라 문구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기 시작한다.

영화예술도 몽타주의 결과이다. 지금 숏의 의미는 전 숏과의 관계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미지나 숏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따라 모든 이미지의 의미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몽타주로 구성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벤야민의 논의는 정신분석과 만난다. 사진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이 정신의 무의식을 나타낸다면 사진은 시각의 무의식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사진이 우리 눈에 잘 포착되지 않던 시각적 무의식의 순간들을 포착해 주듯이 영화 또한 우리의 지각, 감정들을 낫낫이 해부해 보여준다. 그리하여 벤야민은 ‘예술이 지금까지 그것이 피아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으로 여겨져 온 “아름다운 가상”의 왕국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 영화촬영 현장은 “아름다운 가상”을 파괴하는 현장이다. 인간은 하나로 통합된 인격적 주체를 갖는다는 발상을 영화가 여지없이 깨주는 것이다.

벤야민은 카메라맨과 화가를 외과의사와 마술사로 비유했다. 마술사는 환자에게 손을 얹거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체 주술로서 환자를 낫게 한다. 하지만 외과의사는 환자의 몸 깊숙이 침투해 들어간다.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체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화가와는 달리 카메라맨은 대상 속에 들어가 그것을 해부하고 해체시킨다. 인간이라는 통합된 자아상 역시 영화촬영 카메라 앞에서는 여지없이 해체된다. 수많은 컷과 앵클로 나뉘고 조명, 분장, 세트, 여러 카메라 기법에 의해 배우의 인격은 분열된다. 이 때 분열된 컷들은 바로 전 컷들과의 관계를 통해 다시 몽타주 된다.

여기서 우리는 벤야민의 논의가 들뢰즈, 가따리의 『앙띠 오이디푸스』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우리의 신체의 각 부분을 욕망하는 기계로 파악하고 그 부분들로 찢어 놓는다. 각 부분들은 욕망하는 기계에게 컨트롤 된다. 벤야민은 카메라 앞에 있는 배우들을 컨트롤 하는 것은 결국 대중이라고 말한다. 배우는 카메라 너머에 있는 같은 욕망 기계 안에 있는 대중(역시 분열된 대중)의 컨트롤을 받는 것이다. 벤야민의 미학이 유물론적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카메라, 사진 등의 기계장치에 대해 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계장치 속에서 분열적인 인간이라는 기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촉각적 수용’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뒷받침 해준다. 기존 예술작품은 ‘정신집중’속에서 작품을 관조하며 시각적으로 수용하는데 그친다면 복제예술은 ‘정신분산’속에서 ‘촉각적 수용’을 하게 한다. ‘촉각적 수용은 주의력의 집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습관을 통해 이루어진다.’ 촉각을 통해, 우리 몸의 미세 지각들을 통해, 분열된 우리의 신체를 통해, 영화는 이렇게 우리의 세포를 깨우며 우리의 분자적 욕망과 만난다. 가따리가 말하는 분자혁명의 전망을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컨트롤의 부재, 빼앗긴 ‘복제되기’의 권리

여기서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영화매체의 이러한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시대의 영화는 그 혁명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가? 혁명적 역할은 커녕 오히려 가장 반동적인 매체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 동안 영화, 혹은 영상 매체가 우리에게 새로운 지각을 깨워준 것은 사실이다. 수많은 케이블 채널들을 통해 방송되는 영상들, 현란한 뮤직비디오들, CF 영상들 등 다양한 영상 콘텐츠들을 보자. 아주 미세하고 분자적인 욕망들을 극도로 증폭시켜 놓은 이러한 영상의 촉각적 수용을 수십 년 전의 사람들은 상상이나 했겠는가? 실제로 넘치는 감각들 속에서 우리의 촉각은 상당히 훈련되어 있다. 우리는 미세한 감각이나 욕망을 캐치할 수 있는 신경증적 기질을 영상매체를 통해 습득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혹은 영상매체 전체)는 이미 벤야민이 말한 혁명적 기능을 수행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문제이기에 왜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벤야민에게 영화는 ‘컨트롤’의 예술이다. 이는 비단 영화 뿐 아니라 모든 기술복제예술작품의 특징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배우는 같은 욕망 속에 있는 대중의 컨트롤을 받는다. 영화는 이처럼 배우에 대한 대중의 컨트롤, 현실에 대한 카메라의 컨트롤, 컷과 컷 사이에 대한 컨트롤(몽타주)이 일어난다. 이것이 곧 연출과정인 것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컨트롤 즉 자신에 대한 연출할 권리를 갖는다. 영화와 같은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기계화된 노동과정 속에서도 자신을 연출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복제예술 속에서 ‘복제되기’에 대한 정당한 요구가 있으며 이러한 것을 가장 잘 실천한 것은 초기 러시아 영화들이다. 이들의 영화는 노동자 스스로가 주인공이며 스스로를 연출하여 영화를 제작하였다.

하지만 현재에 이 스스로 복제되기의 권리는 무시되고 있다. 벤야민은 논문의 말미에서 파시즘에 대해 언급한다. 파시즘은 브루주아적 생산의 소유관계는 그대로 유지한 체 노동자들에게 표현만을 제공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를 복제할 권리를 빼앗긴 체 모든 것을 거대 미디어 자본에게 맡겨 놓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연출할 능력을 거세당했다. 우리의 웃음은 우리의 웃음이 아니고 우리의 울음은 우리의 울음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소유하지 못한다. 요즘 내 또래의 20대 젊은 남자 아이들의 술자리에 참석하면 나는 우리의 무능을 실감한다. 우리는 대화조차 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대화로서 연출하지 못한다. 대신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연출된 TV프로그램을 소비한다. 농담조차 어렵다. 오로지 농담거리라고는 버라이어티 쇼에서 본 몇몇 소재들, 유행어들 밖에 없다. 우리는 그 농담들을 소비할 뿐이다. 미디어 속에 범람하는 미세한 감각들의 연쇄들은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이다.

생산력의 자연스러운 이용이 소유 질서에 의해 저지당할 때는 기술적 수단과 속도 및 에너지 자원의 증대는 불가피하게 생산력의 부자연스러운 이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고, 또 이러한 필연성의 마지막 출구가 바로 전쟁이다. …… 제국주의 전쟁은 일종의 기술의 반란이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 전쟁에서 기술은 사회가 평소 자연적 재료를 통해 기술에 부여하지 못했던 권리들을 “인간재료”에서 거두어들이고 있다.

복제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에도 그 생산력의 자연스러운 이용은 소유 질서에 저지당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미디어를 소유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복제되고 연출될 기회를 저지당하고 있다. 특히나 근래 몇 년 동안, 현 정부에 들어서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누구나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것을 되돌려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20세기에 겪었던 파시즘보다 더 진화되고 한층 업그레이드 된 파시즘을 만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위 글은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 제2판)를 기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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