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한국 영화 속 ‘부모를 죽인 아이들’

- 황진미

‘부모를 죽인 아이들’이란 제목을 보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말할 것도 없이 ‘패륜아’가 자동 연상될 것이다. 1994년 100억대 재산을 노리고 부모를 죽인 박한상 사건부터 최근 강남에 살고 싶어서 어머니와 누나를 청부살해한 17세 장모군 사건까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패륜범죄’의 보도를 접하면서, 부모살해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이렇게 구성된다.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은공을 저버리고, 오직 돈에 눈이 멀어 부모를 살해하는 가장 반인륜적인 범죄라는 것.

그러나 부모를 죽인 자식을 무조건 패륜아로 단정 짓는 것은 사태를 바로보지 못하는 것이다. <존속범죄의 실태에 관한 연구>(한국형사정책연구원, 1996)의 광범위한 자료 분석에 의하면, 부모살해의 범행이유로 가장 흔한 경우는 가해자가 정신이상(39.2%)과 피해자의 가족학대(35.5%)이며, 보험금이나 유산을 노리는 등 가해자의 반사회적 성격에 기인한 경우는 11.4%에 불과하였다. 이는 최근 논문 <살인사건 중 존속살해와 정신분열의 연관성 분석>(정성국, 2009)에 의해서도 확인되는데, 정신분열에 의한 살인이 43.1%인 반면 계획적인 살인은 전체 존속 살해의 4.2%에 불과하였다. 한편 <존속범죄의 실태에 관한 연구>는 존속살해 피해자의 41.7%가 음주상태에서 상습적으로 가해자와 가족구성원을 학대해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 가족학대로 인한 사건의 피해자는 주로 아버지(83.7%)였고, 학대받던 대상자는 본인(16.5%)보다 어머니인 경우(19%)가 더 많았다. 요컨대 수 십 년간 술에 취해 아내와 자식을 폭행해온 남자가 자식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부모살해 사건의 40%에 달한다는 뜻인데, 이런 사건의 경우 가해자의 53.3%가 19세 이하 청소년이다. 이는 전체 존속살해 사건 중 가해자가 19세 이하인 경우가 임에 비해 매우 월등히 높은 수치이다. 즉 ‘부모를 죽인 자식들’ 중에는 ‘패륜아’보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이 훨씬 많으며, 가해자가 청소년일 경우에는 ‘학대받은 아이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0년 부모를 망치로 살해한 후 시체를 토막 내어 지하철 역등에 유기하였던 이은석 사건은 ‘명문대 생 엽기패륜사건’으로 많은 이들을 몸서리치게 했지만, 이 사건의 배후엔 지속적인 학대가 있었다. 사건 직후 그를 면담한 심리학자의 책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이훈구. 2001)와 8년간 상담을 통해 완성한 책 <심리전기와 상담>(박순. 2009)에는 부모로부터 멸시를 당해온 청년의 황폐한 삶이 잘 드러나 있다. 학대사실은 사건 직후부터 알려졌지만, 1심의 사형을 2심의 무기징역으로 바꾸는데 그쳤다. 외국의 경우엔 부모살해 사건의 90%가 아동학대에 의한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사건에 접근하며, 학대가 인정되면 정당방위로 판결받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부모살해는 ‘존속 살인죄’ 규정에 의해 ‘살인죄’에 비해 가중 처벌되며, 정상 참작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반면 부모에 의한 자녀 살해는 가중 처벌되지 않으며, 특히 영아살해는 “치욕을 은폐하기 위해, 양육할 수 없음을 예상하거나 특히 참작할만한 동기”가 인정될 경우 ‘살인죄’보다 가벼운 ‘영아살해 죄’가 적용되어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형법의 규정과 판례 등에서 보듯이, 유교문화의 뿌리가 깊은 우리사회에서 부모살해는 이유를 막론하고 반인륜적 범죄로 간주되는 반면,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은 미미함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부모살해는 어떻게 그려질까? 외국영화의 경우 <용의자 X의 헌신>, <귀향>등 다양한 예를 꼽을 수 있는데, 한국 영화에 국한시켜보면 그리 많지 않다. 부모살해를 그린 몇 편의 한국영화를 유형별로 살펴보자.

1. 사이코패스 혹은 모호한 이유 <공공의 적>, <모빌>

<공공의 적>(2002)은 가장 부모살해를 그린 영화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본 영화로, 부모살해를 전형적인 패륜범죄로 그린다. “사람이 사람 죽이는데 이유가 필요하냐?”고 묻는 냉혈한 펀드매니저가 큰돈을 굴리기 위하여 부모를 무참히 살해하는데, 살해되는 부모는 악마적인 자식과 대구를 이루는 착한 사람들이다. 자식을 사랑으로 키웠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하며, 죽어가면서도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증거를 인멸한다. <공공의 적>은 선명한 선악구도로 ‘부모살해범=패륜아=공공의 적’라는 도식을 공고화하며, 부모살해범을 이해와 용서가 불가능한 사이코패스로 정형화한다.

옴니버스 영화 <쇼 미(Show me)>(2003)의 단편<모빌>(임필성 감독)은 이은성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토막 친 부모의 시체를 쇼핑백에 담아 다니며 전철역에 버리고 다니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핸드헬드 기법으로 담은 영화이다. 마지막에 플래쉬 백으로 보여주는 피 칠갑의 부모살해 장면과 절망적인 표정으로 누나의 안부전화를 받는 청년(박해일 분)의 모습은 먹먹함과 망연자실함을 여실히 전해준다. 그러나 그가 왜 부모를 살해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는 단편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고, 영상적 표현을 강조하고 대사를 자제한 스타일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감독은 사건의 원인이 애초에 설명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진 듯하다. 그래서인지 화면 가득 묻어나는 박해일의 섬약한 표정과 초조한 눈빛은 학대에 의한 살인보다는 정신착란에 의한 살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2. 학대가 원인이긴 하지만 살인마의 데뷔 살인인 셈. <텔미썸딩>, <백야행>

<텔미썸딩>(1999)에서 변태적인 화가 아버지의 성적 학대를 받고 자란 여주인공(심은하)는 동성애적 관계에 있던 친구(염정아)와 함께 아버지를 살인하여 사체를 토막 친다. 그 후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접근해 오는 남자들을 모두 죽여 시체토막으로 퍼즐놀이를 즐긴다. 이 영화에서 부친살해는 1992년 ‘김보은, 김진관 사건’에 영향을 받은 듯, 성적 학대를 한 아버지에 대해 분노하고 그녀를 돕는 친구의 사랑에 동정적인 시선을 보이기도 한다. 즉 부모살해의 원인이 학대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을 이후로도 무고한 남자들을 죽이는 변태적인 살인자로 그리고 있으며, 그녀가 맺은 동성애적 친구 역시 살인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죽이는 착취적 관계로 묘사한다. <텔미썸딩>이 그리는 부친살해는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학대자에 대한 보복이지만, 가해자 입장에서 보면 매혹적인 여성 살인마의 ‘데뷰 살인’이다. <원초적 본능>의 샤론스톤 역시 첫 살인이 부모살인이었다고 나오는데, 이와 다를 바 없는 설정이다.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백야행>(2009) 역시 비슷하다. 중학생인 요한(고수)는 같은 반 친구 미호(손예진)를 성폭행하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흉기를 휘둘러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다. 둘은 현장에서 빠져나가고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미호는 경제적인 이유로 아저씨와의 성관계를 강요해온 자기 어머니를 가스중독으로 살해한다. 경찰은 미호의 어머니가 요한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결론 내린다. 각자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소년과 소녀는 14년 뒤 다시 살인을 저지른다. 이유는 이전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미호의 출세를 위해서이다. 미호는 악녀이다. 친모를 계획살인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출세를 위해 요한의 순정을 이용한다. 요한은 이용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위해 살인, 성폭행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른다. 미호의 친모살해는 명백한 학대 때문이었다. 영화는 어린 딸에게 성매매를 강요하며 “그깟 돈 때문이라고?”하며 뺨을 후려치는 어머니의 행태를 보여줌으로써 소녀의 고통에 주목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이후 미호에게선 어떠한 내면도 영혼도 느껴지지 않으며, 알듯 말듯 한 미소를 지닌 ‘차가운 악녀’의 모습만 존재한다. <백야행>은 <원초적 본능>, <텔미썸딩>과 마찬가지로 ‘악녀의 탄생은 부모살해로부터’를 증명하는 서사를 취하며, 여기에 그녀가 요한을 착취하는 모습으로 ‘그녀에겐 영혼이 없다’는 점을 더욱 부각시킨다.

3. 가정폭력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4인용 식탁>, <검은 땅의 소녀와>

<4인용 식탁>과 <검은 땅의 소녀와>에는 훨씬 어린 나이에 부모를 살해한 아이들이 나온다. 이들은 가정폭력으로부터 자신과 형제자매를 지키기 위하여 아버지를 죽이는데, 영화는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이들을 ‘악마의 씨앗’으로 그리지 않는다. <4인용 식탁>의 소년은 쓰레기차가 아이를 치어 유기하는 것을 목격하고 시신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그러나 박수무당인 아버지는 아들을 영험한 ‘동자 신(神)’이라며 돈벌이에 이용한다. 아버지는 소년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부적을 그리게 해 번 돈으로 술을 마시고, 만취 상태에서 소년과 여동생을 폭행한다. 소년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도 죽기 위해 방에 연탄불을 피운다. 무고한 여동생만은 살리고자 이불로 틈을 메운 다락에 재우지만, 불이 나면서 자신만 구조되고 동생과 아버지가 죽는다. 이후 소년은 기억을 지운 채,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살아간다. 그러나 결혼을 앞둔 현재,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죽인 어린 소녀들의 귀신이 자꾸 눈에 보인다. 소년은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동생만이라도 살리고자 아버지를 죽였는데, 그 과정에서 동생이 죽자 죄의식을 갖게 된다. 죄의식을 의식에서 지워버리고 살았지만, 자신이 가정을 꾸릴 나이가 되자 잠재되었던 죄의식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데 대해서는 죄의식이 없다. 영화는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에 의한 부모살인을 그리면서 소년의 상처받은 내면에 주목하며, 부모살해를 섣불리 폐륜으로 단정 짓거나 소년을 악한으로 그리지 않는다.

<검은 땅의 소녀와>는 더욱 성찰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탄광촌의 영림(9살)은 발달장애가 있는 오빠 동구(11살)를 돌본다. 이 가족은 가난하고 엄마가 없으며 동구의 교육이 걱정이지만 아버지의 사랑으로 행복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진폐증으로 보상도 없이 퇴사당하고, 집마저 철거될 상황에 이른데다, 퇴직금으로 빌린 트럭으로 동구가 사고를 내자, 가족의 경제 상태는 극한으로 내몰린다. 이런 위기에서 아버지는 차츰 변한다. 술을 먹는 일이 잦아지고, 자식을 돌보지 않는다. 아버지의 외상술을 사와야 하는 영림은 술을 훔치기에 이르고 마침내 결심을 한다. 소녀는 오빠를 쪽지가 담긴 보따리와 함께 특수학교 문 앞에 데려다 놓고, 아버지에게 쥐약을 탄 라면을 끓여드린다. 마지막 장면, 소녀는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리던 버스정류장에 서서 화면을 응시한다. 지금껏 이들의 삶에 거리를 두고 관찰하던 카메라와 관객에게 시선을 되돌려 주듯이. 영화는 소녀의 부친살해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오직 이들이 겪는 어려움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이 가족관계의 어려움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가족을 보살피던 가장이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존재로 변했을 때, 그로부터 자신과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인 오빠를 지킬 사람은 소녀자신 밖에 없다. 영화 중간에 오빠의 콧잔등을 쫀 닭을 소녀가 거꾸로 매달아 응징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없는 오빠를 지키려는 소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 부친살해 역시 자신과 오빠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 선택이었음을 유추케 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소녀는 악마이거나 미쳤거나 멍청하지 않으며, 오히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똑똑하고 주체적이며 자신과 가족을 사랑하는 모습이다. 영화는 9살 소녀의 부친살해를 보여주면서, 선정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신파적인 접근을 하지 않는다. 담담한 시선은 오히려 이들 가족의 고통에 무심한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영화 속 동구를 찾아 헤매던 소녀와 아버지는 교회 종소리가 울리자 동구임을 직감하고 달려가지만, 이들 외에는 요란한 종소리에 눈길 한 번 주는 사람이 없다. 탄광촌의 무채색의 풍광처럼, 소녀가 버스를 타고 가야 할 세상 역시 그러할 것임을 영화는 처연하게 알려준다.

이밖에 영화 <예의 없는 것들>에서는 자신을 입양한 양부가 자신을 성폭행하여 낳은 딸을 또 성폭행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청부살인하는 여자이야기가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또 영화는 아니지만, 연극<유리의 성>(2005. 현태영 극본, 연출. 창원예술극단)은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에 의한 부모살해를 본격적으로 그리며, 인식의 전환을 촉구한 작품으로 언급할 만하다. 부모살해 사건이 일어나자 검사 측 의뢰자인 정신과의사는 정신이상소견은 없으며 학대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그러나 변호사는 유교문화가 강한 우리사회에서 아동학대 사유만으로는 형량을 줄일 수 없다며, 학대 피해자로서 그를 동정한다면 정신이상소견을 내달라고 대립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 역시 부모의 학대를 받은 피해자들이었다. 이들의 대화로 인해 그때까지 불분명했던 청년의 살해동기가 밝혀지는데, 자신에 대한 학대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여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성폭행과 어머니의 묵인 때문이었다.

이상 부모살해를 다룬 몇 편의 한국영화를 살펴보았다. ‘부모살해=패륜’이라는 도덕적 판단을 공고화하는 <공공의 적>부터 빈곤이 가정폭력을 낳는 과정과 학대에 내몰린 아이의 처연한 선택을 그린 <검은 땅의 소녀와>까지, 부모살해에 대한 인식차를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부모살해 중 소수에 불과한 ‘패륜범죄’에 대한 선정적 보도로 인해, 그보다 훨씬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방지노력이 집중되어야 할 ‘학대로 인한 부모살해’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매 맞는 아내’에 대한 실상이 알려지고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전환이 촉구되기까지 ‘남편살해범’은 이유를 막론하고 ‘악녀’로 인식되고, 재판에서도 정상참작을 인정받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부모살해에 대한 인식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부모를 죽인 아이들’이란 제목을 보고 ‘폐륜아’가 아닌 ‘아동학대 피해자’를 먼저 떠올릴 때, 부모살해에 대한 예방과 치유를 위한 사회적 노력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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