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진의 사진공감

평양의 봄

- 임종진

10년도 더 지난 예전 기억이 문득 새롭습니다.

기자의 신분으로 기회가 닿아 처음 북녘 땅을 찾았지요.

그곳 평양 시내의 한 공원에서 바라본 봄날 오후입니다.

겨울잠이 아직 아쉬운 나무들 사이 진달래가 살짝 봉우리를 틔웠습니다.

봄기운에 서둘러 보랏빛 자태를 뽐내려 했을 터인데,

가엾게도 그만 장난꾸러기 꼬맹이들 손에 들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악 익어가는 따스한 바람에 신이 났던 탓일까.

봄의 전령사 진달래는 호기심 꽉 찬 아이들 손에 들려 이제 못다 핀 꽃이 되었습니다.

만개한 봄꽃 들녘이 아쉬워 꼬맹이들 이마에 알밤 하나씩 주고 싶은 맘이 슬쩍 들었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그러했던 시절이 덩달아 스쳐갔습니다.

도무지 밉지 않던 아이들의 그 모습이 오늘 다시 새롭습니다.

반을 가른 아래 위 땅 들녘에 가을바람이 선선한 요즘입니다.

무더위에 물난리에 실려 여름은 저만치 지나갔는데,

핏대 섞인 목소리는 아래나 위나 여전하기만 합니다.

아주 잠깐 스쳤던 평화와 화해의 기운은 이제 가뭇없이 사라지는데,

다시 만날 길이 없는 북녘 땅 꼬맹이들의 철없는 장난질이 문득 떠오릅니다.

1999. 4.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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