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西山雄二의 영화 <철학에의 권리>에 대한 몇 가지 단상

- 이진경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논평해야 할까? 영화에 대해? 혹은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국제철학콜레주에 대해? 영화에 대해 논평해야 한다는 사실은 영화에 대해 말할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영화평론가로서 초대받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영화보다는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국제철학콜레주에 대해 논평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하지만 그에 앞서 영화를 보면서 아쉬웠던 것을 간단히 언급하며 시작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 영화는 국제철학콜레주를 통해 ‘철학에의 권리’를 다루지만, ‘디렉터’라고 명명되는, 아마도 학교를 운영하거나 강의를 운영하는 분들의 이야기만을 보여주고 있다. 디렉터가 아닌 ‘디렉티드’, 혹은 양자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국제철학학교를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교사가 말하는 학교는 학교의 아주 제한된 한 측면일 것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입장’에서는 그 학교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모른다면, 그 학교에 대해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 강의의 청강생들, 그 학교의 운영에 관여하고 있는 ‘공무원’들, 그리고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던,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던 지식인들의 이야기들. 또 하나는 디렉터들의 얘기는 주로 국제철학콜레주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어떻게 하고자 하는지를 말해주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제적인 관심을 가진 입장에서는, 그것이 어떤 난점들과 만났던지, 어떤 성공, 어떤 실패를 했는지, 그런 난점이나 실패를 어떻게 넘어서 나아갔는지, 그것을 통해 학교의 기획이나 운영방식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등을 들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영화에서 말하고 있듯이, 돈과 자본이 지배하는 글로벌화의 흐름 속에서 철학적 사유를 지속한다는 것이 갖는 저항적인 의미를 나 또한 받아들인다. 국가나 제도가 정한 방식으로 일정한 방향이나 가치를 갖는 공부와 다른 방식의 공부를 함께 한다는 것의 중요성에 나 역시 공감한다. 그리고 제도와 비제도 ‘사이’에서 진행되는 제도적인 것의 해체(탈구축)과 “새로운 제도의 디자인” 등은 나로선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국제철학콜레주는 “데리다주의자들”의 학교는 아니지만, 그것은 데리다적인 해체를 책의 바깥으로까지 밀고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의도가 있든 없든 간에, 데리다의 흔적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그런 점에서 데리다의 해체라는 작업이 갖는 의미를 실천적으로 가동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한국에서도 이런 학교가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들에 이런 학교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에서 그러한 소망은 적어도 한동안은 공허한 것 같다. 일년에 4억 6천만원의 예산이 이런저런 정부기관에서 나오고, 거기에 가서 강의하면 학교의 강의와 일을 반은 면해주는 조건은 언감생심,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런 지원 없이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코묻은 돈’을 모아 연구소를 만든다거나 ‘사회과학 대학원’을 만들겠다는 시도들이 있지만, 그것이 정부의 탄압을 아직 받지 않는 것은 그것의 영향력이 아직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좌파적인 성향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그것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는 순간, 가령 예전에 <수유+너머>가 그랬듯이, 그들이 약속했던 작은 지원조차 거부당했던 것처럼, 어느새 국가와 부딪치게 된다. 김대중 노무현 시절,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던 단체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 지원금이 끊겨 고생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거꾸로 이런 힘든 조건이 단체의 자생력을 키워준다는 것을, 반대로 정부 등의 지원에 기대게 되면 그런 자생력을 잃게 되어 결국 단체가 괴멸하거나 정부에 대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정부가 국가, 제도와 교차하면서, 그것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그것과 동화되지 않는, 오히려 그것을 바꾸는 그런 ‘사이’의 전략, 해체의 전략이 한국에서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바람직한 것인지 하는 의문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제도화되는 순간 이전의 활력이 소멸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령 일본에서 2009~10년의 하켄무라가 그런 경우였음을 유아사 마코토 씨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확인했다.) 환경운동단체들의 치열한 새만금 반대투쟁이, 노무현 정부와의 우호적 관계 속에서, 대법원의 판결 하나로 중단된 황당한 사태 또한 자발적 ‘어소세이션’이 제도와의 교차를 통해 무력화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로 기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비록 일 년에 4억 6천만원이 아니라 4천6백만원도 쓰지 못하는 소규모 집단이지만, 넘들이 딱히 좋아할 리 없으면서도 거절할 수 없는 절묘한 ‘사이’의 공간을 찾기보다는, 미련스럽게 그것들의 ‘외부’에서, 자본주의나 국가로 회수될 수 없는 외부를 창안하려는 미련하고 소박한 시도를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와의 모든 타협은 금물이라는 단순무식한 생각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제도의 안팎을 횡단하며 그런 외부를 창안하고, 외부적 요소들을 촉발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적인 요소를 이용하는 능란함으로 인해 오히려 그 제도에 어느새 휘말려 들어가는 합리성보다는, 제도 안에서조차 우직하게 작은 구멍을 파는, 제도로부터의 이탈의 벡터를 가동시키는 그런 미련함(비합리성!)에 더 가까운 것일 게다.

덧붙여, 사소한 것이지만, 우리의 문제의식을 ‘인문학’의 학식을 재야로 전개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문학이나 ‘지식’, 혹은 ‘공부’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하고, 그 사람들 속에서, 기존의 제도나 지식, 욕망에서 이탈하려는 성분을 포착하여, 그것을 더 세게 촉발하고 가속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코뮨적인 삶의 공간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해주길 나는 바란다. 그리고 그런 코뮨적 외부를 통해 또 다른 외부를 만들려는 욕망을 촉발하고 싶다. 그런 욕망과 접속하여 자본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외부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고 싶다. 우리가 국제철학콜레주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는 어떤 냄새에 유인되고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스타일의 연구방법이나 비/제도적 형식보다는 제도를 흘러넘치는 공부에 대한 욕망의 냄새, 외부에 대한 욕망의 냄새 때문일 것이고, 그런 외부와 접속하려는 욕망의 냄새 때문일 것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