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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의 권리> 수유너머N 상영회/토론회

- 정정훈(수유너머N)

지난 9월 27일 수유너머N 연구실에서는 ‘파리국제철학학교’를 다룬 다큐멘터리, <철학에의 권리>가 상영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현재 일본의 동경수도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철학자 니시야마 유지가 만든 것으로, 일본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순회 상영되었고 앞으로도 독일, 홍콩, 영국에서도 상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니시야마 유지 선생은 이 순회 상영회와 더불어 오늘날 철학 연구와 교육을 위한 방식과 제도를 고민하는 이들이 함께 토론하는 자리를 동시에 마련해왔다. 수유너머N에서 열린 <철학에의 권리> 상영회와 토론회 역시 그러한 기획의 일환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철학에의 권리> 수유너머N 상영회에는 홍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인원이 모여들었다. 학교 선생님을 따라온 중학생들부터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직장인들이나 인문학 전공자들과 학생 등 30여명이 함께 이 영화를 관람했다. 일본에서도 이 상영회/토론회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수유너머N을 방문했다. 니시야마 유지 선생 외에도 10여명의 일본인 연구자들과 학생들이 참여하여 철학공부에 대해 함께 논의했다.

영화는 7시 30분에 상영되기 시작하여 9시에 끝났고, 곧바로 토론이 이어졌다. 일본 측 연구자 두 명의 발제와 <철학에의 권리>에 대한 수유너머N 연구자 두 명의 논평으로 시작되었다. 일본 측에서는 이 영화의 감독인 니시야마 유지 선생과 니가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미야자키 유우스케 선생이 발표했고, 우리 측(수유너머N)에서는 이진경 선생과 내가 발표를 했다.

발표가 끝난 이후 발표자들 간의 상호 토론 및 청중과의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 과정에서 형성된 몇 가지 쟁점들 중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철학 연구와 교육을 위한 제도의 역할에 관한 입장 차이였다. ‘파리국제철학학교’는 철학자(특히, 데리다)와 국가 사이에 벌어진 교섭의 결과물이고, 이 학교가 운영되는 데에는 국가의 지원이 중요한 토대역할을 해왔다. 연간 4억6천만원의 지원금을 이 학교는 국가로부터 받고 있다. 그렇지만 ‘파리국제철학학교’는 국가교육제도에 완전히 편입되어있지 않고 시민결사의 형태로서, 연구자와 시민들의 자발적 연구-교육 장치로서 존재한다고 한다. 완전히 제도 밖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도에 절대적으로 포섭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 현실 속에서 연구자들의 독립적인 코뮨을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되, 국가제도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제도와 비제도 ‘사이’보다는 제도 ‘외부’에서 자율적으로 구축되는 연구-교육 집단이라는 형태가 한국적 현실 속에서는 자유로운 인문학 공부를 위한 더욱 타당한 형태가 아닐까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일본 측 연구자들은 제도와의 끝없는 교섭 없이 단지 제도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코뮨적 연구-교육활동이 자칫하다가는 자족적인 공동체나, 심지어 제도의 은폐된 보완물이 될 수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또 하나의 쟁점은 대학인문학의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단지 오늘날 대학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기업화 된 것이, 혹은 국가제도에 의해 철저하게 포섭되어 통제되는 것이 과연 인문학 위기의 본질일까라는 질문이 들었다. 이 질문에는 인문학이 자본의 이윤창출과 국가경쟁력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문학에 대한 공적 지원이 줄어든 것이 인문학 위기의 근본적 이유는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오히려 인문학이 우리 삶과는 유리된 채 하나의 고급 지식이 되어 버린 것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더 이상 인문학 공부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역량을 키우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텍스트에 대한 지식과 독해력을 키우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 인문학을 무기력하게 만든 근본원인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도와의 교섭을 통해 인문학이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을 구축하는 것보다 시급한 것이 인문학과 우리 삶의 직접적 연관성을 다시금 복원하는 일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이 토론회에 임하면서 들었다.

토론회는 시간이 갈수록 열기를 더해갔지만, 토론을 더 이어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공식적인 토론회는 끝이 났다. 그리고 뒷풀이가 수유너머N 연구실에서 이어졌다. 그리고 이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 사이의 토론은 보다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보다 더 깊어져갔다.

응답 3개

  1. 기픈옹달말하길

    인문학이 어떻게 삶을 껴안을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삶이 빠진 인문학이 횡횡하고 있는 건 아닌지…

  2. 여하말하길

    성리학의 용어를 빌면, 공(같이 살자)과 사(나만 살자)는 제도 안팎을 가리지 않고 서로 긴장하면서 싸웁니다. 조금 제도/비제도를 실체화하는 느낌이랄까, 하는 게 있군요.(맥락은 알겠으나.) 대학 인문학 위기는, 늘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 ‘인문학’은 위기인 적도 없지요. 삶이 있는데 인문학이 위기일 수가 있나요? 늘 인문학자의 위기지요. 말씀하셨다시피 삶과 유리된 지식놀음의 당연한 결과겠지요. 대학만 얘기하자면,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로 ‘인문학과의 위기’를 은폐하는 것이겠고. 발표, 토론 알려주어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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