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간절한 바람으로

- 풍경지기 박혜숙

풍경지기의 책이야기 16

『추방과 탈주』, 고병권, 그린비

책표지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추방’은 경계 밖으로 추방되었다. ‘탈주’는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중간고사 기간 내내 시험 문제에 오류가 있지나 않을까 마음 졸이고 있는 나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시험 시작 종이 울리고 답안지를 나눠주자마자 시험지도 보지 않은 채 답안지를 작성하고 엎드려 자는 아이들은 또한 어디쯤 있는 것일까? 암울해진다.

며칠 전 ‘희망찾기’라는 공부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에서 이번 학기에는 조한혜정 선생의 강연회를 준비하며 공부를 하고 있다. 조한혜정 선생이 추천해주신 세 권의 책을 읽고 매달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8월에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엄기호 지음, 낮은산)를, 9월에는 『쓰레기가 되는 삶들』(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새물결)을 읽고 토론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추방과 탈주』를 읽고 토론했다.

토론이 시작되자 국가권력에 의해 추방당하고 있는 우리 사회 상황이 쏟아져 나왔다. 한 동료는 ‘사교육 없는 학교’라는 이름 아래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입시교육이 이어지면서 인간다운 삶에서 추방당하고 있는 교사와 학생의 생활을 이야기했다. 또 한 동료는 교원평가로 인해 동료교사 간, 교사와 학생 간의 불신이 쌓여가고 있는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 외에도 이주 노동자, 노숙인, 빈곤층, 오갈 데 없는 청소년 등 다양한 내부난민(자기 나라 안에 있으면서 사실상 자신을 보호해 줄 정부를 갖지 못하는 이들)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전 모임과 마찬가지로 문제제기는 끝없이 되풀이 되었다. 그러나 ‘탈주’에 관한 이야기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탈주’에 대한 개념 규정도 조금씩 다른 듯 했다.

앞서 우리가 읽고 토론했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힘이 강한 책들이었다. 두 책 모두 신자유주의체제 아래에서 국가권력이 ‘불안’을 통해 우리를 어떤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지를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하지만 대안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막연했다. 물론 대안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그 자리에서, 초라하더라도 조금씩 찾아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긴 하지만 허탈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많은 책들이 ‘소통’과 ‘연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사실 자신이 없었다. 내가 과연 아이들에게 ‘소통’을 이야기할 수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그렇지 못하다. 올해 학교를 옮겼다. 아직 동료교사들이 낯설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바빠지고 있다. 특히 올해는 공부 모임이 많아지고, 간혹 글을 쓰는 일이 생겨나면서 수면 시간을 줄여야 할 만큼 바빠졌다. 당연히 학교에서 수업이 없는 시간이면 공부모임에서 읽어야 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학교 업무를 하게 된다. 그래서 강박증처럼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묶여있다. 그 결과, 동료교사에게 이야기할 것이 생기면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학교용 메신저인 ‘쿨메신저’를 켜고 이야기를 건넬 교사 이름을 클릭한다. 그런 후 용건을 글로 적어 전송한다. 같은 교무실 공간에 있는 교사에게조차 이렇게 의사전달을 한다. 예전 교무실에 냉,난방기가 설치되면서 교사 상호간의 단절이 일어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날씨가 추우면 석유난로 옆에 모여앉아 손을 쬐며 이야기꽃이 피우던 교무실 풍경은 이제 사라졌다. 모두 쾌적한 실내 온도를 즐기며 각자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보며 마우스를 쓰다듬고 있을 뿐이다.

교사들의 관계가 이러할 진데 아이들 간의 관계야 오죽하겠는가. 예전 우리가 어렸던 시절에는 학급 친구들은 ‘내 친구’ 혹은 ‘우리 반 친구’로 불렸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은 ‘같은 반에 있는 아이’일 뿐이고 ‘내 친구’로 불리는 아이는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내부난민’으로 내몰리는 우리들 이야기, 기본적인 ‘소통’조차 되지 않고 있는 우리들 이야기, 어디에도 ‘연대’, ‘공동체’가 들어설 틈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탈주해야 할 것인가? 동료들은 ‘소통’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어야 된다는,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막연한 해법을 제시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변산 공동체, 아름다운 마을, 성미산 마을 이야기가 나왔지만 피부에 와닿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리고 과거의 마을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대가족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지만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라기보다는 과거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에 기대고 있는 ‘공동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소통’에 대한 의미 규정, ‘공동체’에 대한 의미 규정이 각자 너무나 다른 것 아닐까? 서로 간단한 인사 나누는 것을 ‘소통’으로 생각하는 사람부터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면서 관계 맺는 것을 ‘소통’을 생각하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공동체’에 대한 개념 규정은 더 다양했다. 과거 대가족 제도를 공동체로 이야기하기도 했고, 예전 농촌 마을을 공동체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생활해나가는 마을을 공동체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공동체’라는 말을 참 막연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4대강 살리기’라는 말도 막연하게 인식함으로써 빼앗긴 말이 되어버린 것처럼 ‘소통’과 ‘공동체’도 정확한 의미에 대한 고민없이 사용하다가는 ‘4대강 살리기’처럼 빼앗긴 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보다도 ‘탈주’에 대한 개념 규정이 아쉬웠다. 사실, ‘추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이 힘들었다. 무언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동료들 대부분은 ‘탈주’를 학교 현장을 벗어나 다른 삶을 찾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탈주’를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학교 현장에 남아 있는 한, 우리는 패배자일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탈주’가 학교를 떠나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탈주’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탈주’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우리가 학교 현장에서 할 수 있는 ‘탈주’를 이야기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한 동료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는 가출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저러나 하고 한심하게 생각하고 야단을 쳤어요. 하지만 여러 해 동안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그 아이가 예전과는 다르게 보여요. 아이가 학교 밖에서 경험한 일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어요.’

이 이야기가 그 자리에서 크게 힘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시선이 확장되는 것이 경계밖으로 발을 내미는 노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탈주’의 시작. 학교 안을 벗어나면 탈락하고 말거라는 불안감, 인생의 실패자,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조건 참고 견뎌야 한다는 맹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문제는 우리 ‘합의에 의해 배제된 자들’의 운명이다. 불안에 내던져진 우리 ‘홈리스’들이다. 자기 나라 안에서 정부를 잃은 이들, 의견을 형성할 자격을 상실한 이들이다. 우리들 중 상당수는 국가와 자본에 의한 삶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더 처절하게 거기에 매달릴지 모른다. 무질서에 대한 불안, 근거 상실에 대한 불안은 국가 질서에 대한 더 강력한 지지를 불러오기 쉽고, 그런 불안은 가령 기업 복지나 보험과 같은 상품에 더 기대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합의의 장에 대한 ‘난입’이 불가피하고, ‘실직’, ‘비정규직화’에 대한 싸움을 지속해야 할 때조차, 정부와 기업을 잃은 바로 지금, 그것들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삶의 실험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 아닐까. 근거를 잃은 자들, 자격을 잃은 자들이 비로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을 실험해야 하지 않을까. 국민, 직업, 지역, 인종 등 자격을 갖지 않기에 비로소 공통의 삶을 생산할 어떤 실험을 시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의와 공공성에서 배제된 자들이야말로 이견 있는 자들의 새로운 연대를 창출하고, 새로운 공공성, 즉 국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대안적 공공성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 아닐까. 그 속에서만 우리는 ‘국가인가, 시장인가’라는 나쁜 선택지에서 벗어나는 싸움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들이 내몰린 곳이 우리들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인지도 모른다. 낡은 질서의 상실이 예속의 조건이 될지, 자유의 조건이 될지는 ‘우리, 잃어버린 자들’에게 달려 있다.
(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71-72)

‘소통’과 ‘연대’, ‘공동체’를 말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욕망한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욕망은 잘못된 체제 속에서 ‘불안’을 통해 습득하게 된 욕망이기 때문에 이를 깨닫고 올바른 욕망을 갖자는 것이다. 올바른 욕망을 가진 이들이 만나 이야기 나눌 때 ‘소통’이 이루어지고,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가능하다. 이것은 ‘앎’이 있어야 가능하다. ‘앎’이 ‘삶’을 구원하는 영역이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가 모여 책을 읽으며 우리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이야기 나누는 것이 탈주의 시작이 아닐까? 그런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더 넓은 삶으로 확장시켜 주는 것이 탈주의 시작이 아닐까?

책표지를 다시 들여다본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모은다.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탈주’라는 글자에 나를 가져다 놓는다. 간절한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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