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2호] 외부, 이끌림과 망설임 사이에서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외부, 이끌림과 망설임 사이에서
-[외부, 사유의 정치학](이진경)을 읽고-

1. 망설임

얼마 전 친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나 한의대 가볼까?” 이 친구는 공대를 나왔고, 지금 잘 나가는 대기업에 취직해서 돈도 제법 잘 벌고 있다. 이유 없이 배알이 꼴려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왜, 돈 좀 벌어볼라고?” 그러자 친구가 그건 아니라고 얼굴이 새빨개지며 항변한다. 지금 한의사가 포화상태라 한의대 나온다고 무조건 돈 잘 버는 게 아니며, 개업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나 그렇다고, 심지어 개업해도 망하는 곳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하긴 한의대 6년 동안의 등록금에다가 그 기간 동안 회사를 그대로 다닐 경우 받을 수 있는 연봉만 계산해도 상당한 적자이긴 적자다.

그럼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뒤죽박죽이다. 책을 몇 권 읽어보니 매력적이긴 한데 비과학적인거 같기도 하고(그 친구는 공학도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새로운 세계에 풍덩 뛰어들어 자기 삶을 가꾸고 싶다가도 과연 내가 그걸 해서 행복할지 고민이 된단다. 그 뒤죽박죽인 말들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알 수 없는 매력에 이끌리다가도, 지금의 기준에서 생각해보면 비합리적이며 가당찮다.’ 쯤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이 친구는, 졸업한지 6년 만에 다시 대학생이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닌 한의학을 공부할지, 그냥 안정적인 직장 다니면서 집안을 부양하고 태평성대를 누릴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제법 두툼한 책인 <외부, 사유의 정치학>(이진경)을 덮은 후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이 친구였다. 아마도 그 친구의 입장에서 본 한의학이 책에서 말하는 ‘외부’의 예가 아닐까 싶었고, 또 그 친구의 반응이 우리가 ‘외부’앞에 섰을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외부’란 내 안이 아니라 밖에 있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익숙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한의학은 그 친구의 입장에서 완전히 밖에 있다. 이제껏 공부해온 학문의 논리 밖에 있으며,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의 궤적 바깥에 있다. 그렇기에 몹시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두렵기도 하다. 우리 역시 살아가며 익숙지 않은 여러 ‘외부’를 만난다. 하지만 그 때마다 우리는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한편에서는 이끌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망설인다.

아쉽게도 보통은 망설임이 이끌림을 압도하는 것 같다. 어디 내 친구뿐이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경로와 전혀 다른 길을 마주하며 고민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제껏 익숙한 삶을 선택하곤 한다. 이끌림을 따라가다가는 지금의 삶이 망가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다가 때려치우고(혹은 잘리고) 밴드를 시작하는 당찬 아저씨들이나, 평범한 가정주부이기를 그치고 새로 자신의 인생을 찾아나서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들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이 결국 외부 앞에서 돌아서야 했던 아쉬운 경험을 어루만져 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다보니 세상은 ‘외부’로 가득 차 있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거기서 거기다. 엄청난 생의 결정기로에 서는 경우는 드물더라도, 우리는 익숙지 않은 수많은 외부를 일상적으로 만난다.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책이나 음악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외부’를 우리는 보통 피해버리거나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나와 다를 뿐인 저 사람은 성격이 이상하다면서 피해버리고, 내게 익숙지 않은 주장은 비현실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며 쉽게 정리해버린다. 수많은 음악을 접하지만 이미 많이 들어 익숙해진 음악만을 듣곤 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연애를 하지만 거기서 새로운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늘 비슷비슷한 과정을 거쳐 헤어지곤 한다. 그러다보니 생에서 엄청난 분기점에 서는 일은 잘 생기지도 않는다. 외부 앞에서의 끊임없는 망설임 혹은 익숙하게 만들기. 저자인 이진경이라면 이를 지독한 “내부화”의 메커니즘이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2. 이끌림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외부의 ‘이끌림’ 역시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괴로워할 것임을 알지만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려하고, 늘 속으면서도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게다가 내부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해서 외부에의 이끌림을 막아야 하는데, 가끔은 그것이 실패해서 정말 엉뚱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랑에 휩싸이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전에는 싫어했던 종류의 음악이나 책에 빠져든다. 이런 경험은 우리 삶을 눈 깜짝할 사이에 바꿔놓는다. 십 수 년 간 누구보다 자식을 잘 안다 여겼지만, 대학에 들어간 고작 몇 개월 동안 ‘이상한 책’과 ‘이상한 선배’를 만나 ‘운동권’이 되어버린 자녀를 대할 때 부모님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준다.

저자인 이진경이 볼 때 이끌림이 망설임을 압도하여 순식간에 삶을 바꿔버리는 일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다. 그에 따르면 어떤 대상의 본질은 대상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 어떤 대상 주위의 ‘배치’가 달라지면 대상의 본질은 변화한다. 망치가 도구인 것은 망치가 못 대가리와 벽에 접해있기 때문이다. 망치가 못 대신 사람의 머리와 만날 때 망치는 도구가 아닌 흉기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를 설명해주는 것은 내 주위의 것들이다. 나의 본질은 내 몸 속에 꽁꽁 숨겨진 어떤 비밀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먹는 음식들, 내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에 다름 아니다.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이 바뀌면 ‘나’는 생각보다 쉽게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익숙지 않은 ‘외부’를 계속 내부화하려는 시도는 이런 이유에서 발생한다. 주위의 환경에 따라 내가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내 주위의 것들을 최대한 익숙한 요소와 형태로 구성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헛된 일이다. 자기 신체 뿐 아니라 주위 사람이나 사물까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마법 같은 능력이 없는 한, 누구도 주위의 대상들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로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끊임없이 바뀌어간다. 세상에 무한히 많은 존재 중 내게 이미 익숙한 것은 오히려 드물며, 내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낯선 요소들, 즉 외부들은 현재 나를 규정하는 익숙한 배치를 향해 쉼 없이 틈입한다. 내부는 끊임없는 외부의 도전에 직면하고, 일시적으로 작동하는 내부화는 결국 실패하기 마련이다. 오히려 “어떤 것의 본성은 뜻대로 되지 않는 외부에 의해 규정”된다.(169쪽)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본성상 ‘외부’는 ‘내부’에 선행하며 더 강한 힘을 가진다고. ‘이끌림’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망설임’보다 더 강하다고 말이다.

외부에 의해 만들어지는 변화의 고통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과장되어 있다. 외부 앞에서의 망설임과 두려움은, 지금 나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관성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변화가 불러오는 나의 삶의 깨어짐만을 보게 한다. 혹시 깨질 지도 모르는 가족, 친구, 직장 등. 하지만 깨지기만 하는 건 아니다. 외부는 새로운 가족을, 친구를, 삶의 방식을 가져다준다. 그 새로운 삶이 몹시 고통스럽고 비루해보일지라도, 그 판단은 지금의 ‘나’가 내린 판단임을 잊지 말자. 새로운 ‘나’는 전혀 다른 감성과 판단기준을 가질 것이며, 새로 만들어진 삶은 생각보다 흥미진진할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미친 학자나 연주하는 것이 너무 즐거운 음악가가, 우리가 보기에 비정상적인 삶(돈도 없고 집도 없고^^;;)을 산다는 이유로 우리보다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이진경은 이런 ‘외부’에 아예 우리를 활짝 열어젖힐 것을 주문한다. 망설이는 대신 이끌림을 따라 흘러가 보라고 한다. 그것이 예상치 못한 변신과 혁신을, 흥미진진한 삶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더 강하고 기쁨에 찬 삶을 원한다면, 외부를 기꺼이 활용해야 할 것이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이제껏 자격을 갖지 못한 자들(예를 들어 여성,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에게 자격과 발언권을 부여하는 랑시에르 식의 정치학은, 끊임없이 정치체 외부의 존재에 주목함으로써 정치체의 영구적 혁신과 건강함을 꾀하는 일종의 “외부성의 정치학”일 것이다.(240~246쪽)

물론 쉽지 않다. 아니 귀찮다. 아예 외부를 없는 셈 쳐버리는, 여전히 세상이 한국전쟁 시기에 머물러 있다고 믿으며 새로운 상황을 죄다 무시해 버리는 몇몇 할아버지들은 바로 이런 극단적 귀차니즘에 젖어 계신 분들이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다. 지금이 너무 행복하고 지금처럼 주구장창 살아도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외부를 애써 무시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의 삶이 조금이라도 꺼림직 했다면, 지금과 다른 삶을 꿈꾸고 있다면, 망설임을 무릅쓰고 이끌림에 응답해보자. 크게만 보였던 두려움이 별거 아니었음을, 그에 비해 외부가 가져오는 삶은 매우 흥미진진함을, 전에 없던 느낌과 경험으로 삶이 꽉 차오름을  생각보다 쉽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 수능 본답시고 10년 만에 분수 방정식 따위를 풀고 있을 그 친구에게, 그리고 오늘도 외부 앞에서 멈칫거리는 세상의 수많은 친구들에게, 파이팅과 함께 이 책을 권한다.

만세 (수유너머 N)

응답 3개

  1. 달타냥말하길

    저도 읽었습니다. ㅋ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읽고 또 읽고 했는데…감이 안오던데
    이진경 선생님 쌈빡하게 정리하셨더라고요. ㅋㅋ

    쌈빡한 정리 좋았습니다.
    저도 읽고 또 읽고 하면..그런 정리하나 할 수 있겠죠..ㅋㅋ

  2. 고추장말하길

    수유너머R에 두권이나 선물을 주셨는데… 아직도 읽질 못했네^^ 저자 귀국 전에 빨리 읽어둬야 할 텐데…ㅋㅋ 쿠카라차님처럼 나도 문장 하나 뽑아볼까 합니다. “변화의 고통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과장되어 있다.” 정말 공감 200%의 문장입니다. 그나저나 쿠카라차님, 정말 여기저기 좋은 댓글 많이 다셨네요… ㅎㅎ

  3. 쿠카라차말하길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미친 학자나 연주하는 것이 너무 즐거운 음악가가, 우리가 보기에 비정상적인 삶(돈도 없고 집도 없고^^;;)을 산다는 이유로 우리보다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라는 구절이 와 닿네요. 일전에 대구의 ‘부모 배움터’에 강의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간사분께서 자기 얘기를 하시더군요. 10년 전에 대학교수였던 남편과 함께 훌쩍 귀농을 왔더랬는데, ‘관’에 복종하지 않다보니 빚만 쌓여 경제적으로 곤란해져 자신이 돈을 벌며 남편 유기농 실험 지원하고 있다고, 딸 둘이 있는데, 중학교 때 그만두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공부하고 있다고(수유연구실도 다닌다네요), 그 간사분 머리색은 선연한 빨강, 딸은 선명한 녹색, 둘이 마트 가면 신호등 떴다고 다들 수군거린다는….가뜩이나 대구다 보니…그분 말씀이, 자기 빼놓고 다들 이상하게 본다고….역까지 데려다주면서 그분 하신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대단하시네요..’라는 표정을 지었더니, “원래, 물에 빠진 사람보다 밖에 있는 사람이 더 안달이라고…물 속에 있는 사람은 헤엄치느라 걱정할 정신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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