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불확실성의 시대, 유토피아의 정치학

- 고봉준

– 프레드릭 제임슨 외, 『뉴레프트리뷰』(길2009)

16세기, 토마스 모어가 “불안과 고삐 풀린 공포가 제거된 세계를 그린 자신의 청사진”(지그문트 바우만)에 ‘유토피아(utopia)’라는 이름을 붙인 이래, 근대는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으로 충만한 시기였다. 알다시피 유토피아는 ‘선한 곳’을 뜻하는 에우토피아(eutopia)와 ‘존재하지 않는 곳’을 뜻하는 우토피아(outopia)라는 두 개의 그리스어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었다. 근대적인 의미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진보는 유토피아라는 (도달할 수 없는) 허상의 뒤를 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사람들 각자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구체적 형상은 달랐을지 몰라도,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유토피아로 표상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열망은 단일한 것이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유토피아의 정치학」은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 이후의 현실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미래적인 가치를 투영하고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재의 패배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유토피아가 종말론적 시간의식을 전제하고 있다는 비판이 등장하고, 거대담론의 몰락과 함께 유토피아의 꿈도 사라졌다는 풍문이 들려온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유토피아는 고사하고 진보의 가능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제임슨의 말마따나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인간 역사가 이런저런 국가권력 체계가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반란이 가능하거나 임박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듯한, 일반적으로 무능하고 무기력한 상황에서 펼쳐졌다.” 그러니 지금이 그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별로 없는 셈이다.

한때 사람들은 ‘공산주의’라는 사회체에 유토피아의 꿈을 투영시킨 적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으로, 우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는 전체주의의 동의어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의 정치학은 진정 그 가능성을 모두 소진당한 것일까? 정말 유토피아라는 관념은 구시대의 유물이거나 초라한 현실을 은폐하려는 이데올로기적인 봉합술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그럴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유토피아를 하나의 모델로, 그러니까 마치 집을 지을 때 참고해야 할 설계도처럼 생각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 경우 설계도에서 벗어나는 모든 집짓기는 유토피아에 반(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또 따지고 보면 유토피아란 정의상 실현불가능한 것이다. 유토피아란 이 불가능성을 표상하는 단어이다. 바로 이 점이 때로는 우리가 유토피아를 갈망하기보다는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을 즐긴다고 비판받을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을 즐기는 자는 결코 그것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게 생각되지 않은 한에서만 그는 즐길 수 있다. 이 글에서 제임슨의 유토피아가 우리를 마주세우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간략하게 말하면, 이 불안이란 우리가 현실을 부정할 때, 동시에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모종의 쾌락까지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격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고 고통과 뒤틀림만 없애는 일은 상상할 수 없을 듯하다. 실존적 경험의 문제에서 취사선택이나 선별이란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지속적으로 폄하하고 부정하는 이유가 어쩌면 그것이 초래할 현실적인 쾌락의 박탈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현실이 살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다소 엉뚱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정신분석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러한 해석보다 차라리 패배주의적인 뉘앙스가 있을지언정 유토피아를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로 간주하는 대목이 훨씬 강렬하게 느껴진다. “유토피아의 기능은 우리를 도와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도무지 그런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는, 다시 말해 역사성이나 미래가 없는 비유토피아적 현재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여하튼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갇혀 있는 체계의 이데올로기적 폐쇄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것은 유토피아를 텅 빈 기표로 간주하는 방식이며, 유토피아는 오직 거울처럼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부정적인 방식의 기능만을 수행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유토피아’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텅 빈 기표를 통해서 현실의 부정성을 환기하는 이런 용법이야말로 유토피아의 기능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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