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정의란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가?

- 최진석

― M. 샌델의 정의론에 대한 비판적 시론

1.

식민지의 역사로부터 시작된 미국의 정치 전통은 자유주의Liberalism를 기틀로 삼아왔다. 여하한의 외부로부터의 간섭과 개입도 배제하며 자유로운 선택과 자기 결정의 자유를 미국적 가치의 근본으로 여겨왔으며, 이는 곧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서구 사회의 기본 원리와도 상통한다(미국적 가치의 다른 편에는 공화주의Republicanism가 있다). 샌델에 따르면 이 자유주의는 무연고적 개인주의와 결합해 롤스 정의론의 기저를 이룬다. 우리는 여하한의 자연적 조건들로부터 절연된 상황을 가정함으로써(‘무지의 장막’) 오직 진리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에 의지하여 무엇이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될지를 ‘선택’할 능력이 있다. 장막에 싸인, 원초적인 평등 상태란 하버마스의 이상적 대화 상태와 유사하게 우리들을 공평 무사한 결단으로 이끌며, 바로 거기서 우리는 정의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헤겔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판하며 추상적이고 이론적으로 탄생한 자아의 불가능성을 통박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존재론적으로 추출된 자아는 사유의 투명한 공간 속에 ‘가정’될 수는 있어도 피와 살이 붙어있지 않는 한 공허한 관념이다. 그 추상성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게 역사인 셈인데, 헤겔의 논리학이 역사 철학을 필연적으로 요구했던 까닭이 여기 있다. 제아무리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자아의 전능함을 내세워도 그가 발딛고 설 대지가 없고 살아갈 시간이 없다면 존재론적으로 순수 無에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자아는 역사 속에서 지양되는 동시에 ‘역사 속의 이성’으로서 회귀한다. 자아가 자신을 인식하고 확보하며 마주치는 과정들이 바로 민족과 공동체/사회, 국가의 삶이고, 역사의 종점에 이르러 자아는 자신이 곧 정신임을, 이성임을, 그래서 민족, 공동체/사회, 국가와 동일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헤겔의 체계에서 이성의 최고 실현 단계를 국가라 본다면, 정의는 곧 국가가 된다(절대 이성으로서 국가는 민족 국가를 넘어서는 동시에 민족 국가에서 끝난다).

2.

유려한 논리와 온당한 어조로 포장되어 있음에도, 샌델의 논법은 어딘지 지난 세월의 역사, 헤겔주의의 부침을 미묘하게 연상시킨다. 물론, 위에 기술한 투박한 논법보다는 훨씬 세련된 스타일로다. 샌델을 직접 헤겔과 대면시키기보단 그가 좋아하는 칸트와 칸트의 후예들(신칸트주의)의 역사 속에서 이 과정을 되풀이 해볼 수도 있겠다. 미리 말해두지만, 두 번 반복되는 역사에서 첫 번째는 비극이었지만 두 번째는 그야말로 코메디다!

샌델의 적절한 지적대로 칸트의 형식주의 윤리는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도덕 원리로서 최고선을 요청한다. 현실에 구애받지 않기에 최고선이라는 원리는 의무적으로 주어져야 하고, 개인이 처한 갖가지 조건들을 ‘무조건’이라는 명령으로 돌파해 나간다. 아마도 이 ‘무조건성’ 혹은 ‘무차별성’이란 롤스의 ‘무지의 장막’과 유비적으로 이해해도 좋으리라. 칸트가 살아있을 때부터 비판받기 시작했던 그의 의무론적·형식주의적 윤리학은 신칸트주의자들에 의해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다. 특히 서남학파가 주목했던 것은, 우리가 직접 발딛고 선 현실의 구체성들, 민족과 문화, 역사, 전통 등에 의해 다양하게 조건화된 개별 공동체의 실재를 추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성립 가능한 보편적 원리를 찾는 것이었다. 빈델반트와 리케르트가 주목했던 것은 ‘문화적 가치’였다. 그것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겪은 오랜 경험을 통해 타당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과 관습 속에 녹아있는 가치를 뜻했다. 형이상학적 진리가 민족과 국가, 시대에 관계없이 불변하는 보편적인 진리 가치를 내세운다면, 문화적 가치는 역사와 지리, 제도와 관습에 따라 달라지지만 적어도 동일한 공동체 내에서는 조건 없이 수용되는 일반적 타당성을 갖는다.

그렇다. 확실히 문화적 가치는 초월적 가치보다 더욱 피와 살에 와 닿는 느낌이다. 예컨대 ‘지하철 패륜녀’ 동영상은 처음엔 동방예의지국에서 노인네에게 반말하고 발악하는 ‘버릇없는 여자’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시절이야 어떻게 변했거나 아직도 장유유서를 따지고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을 유지하려는 사회적 감정이 반영된 사태일 게다(한국 사회의 보수성[집단주의]에 대한 샌델의 논평을 기억해보라). 개인적으로야 어떻게 받아들이든, 이것은 무시할 수 없는,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문화적 가치다. 하지만 가치 관계는 항상 충돌한다. 특히 신·구간, 계급간, 이데올로기간 가치 관계는 더욱 그렇다. ‘지하철 패륜녀’ 동영상은 어느새 ‘2호선 파이터’로 이름을 바꿔가며 논쟁을 점화시키는 중이다. 그럼 이 가치의 충돌은 어떻게 풀릴 것인가?

3.

문화적 가치는 보수화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는 샌델은 스스로 공동체주의자의 레테르를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공동체 내부에서 승인되는 문화적 가치, 전통, 관습과 제도 등은 언제나 토론과 비판에 개방되어야 하며, 제아무리 껄끄러운 문제라도 ‘까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시민적 덕성’이란 것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유사한 논쟁에서 하버마스가 망각하고 부르디외가 제기했던 문제는 토론의 장은 언제나 공평 무사하게 열려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논쟁의 무대에 나서기 위해 먼저 우리는 그 권리와 자격을 인정받아야 한다(대학교수인가 아닌가? 전문가인가 아닌가? 당사자인가 아닌가? 넌 누구냐? 등등).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진입장벽을 넘을 수 있는 ‘밑천’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가치들간의 경쟁을 환영하고 “마음껏 토론하라, 합당한 가치를 발견하라”고 박수치는 샌델의 입장은 기실 그가 비판하는 롤스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셈이다.

물론 샌델은 타고난 자질(부와 재능)로부터 연유하는 이익을 배제하기 위해 역으로 롤스를 끌어들인다. 그것은 “더 가진 자가 더 많이 내놓는다”는 재분배의 원리다. 하지만 샌델이 끌어다 쓴 이 원리를 잘 살펴보면 좀 아이러니컬한 이면이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더 많은 이익, “영광과 명예”는 능력으로부터 연유한다(텔로스). 그건 사실이다.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스트라디바리를 가질 자격이 있듯, 삽질을 제일 잘하는 넘이 사대강 운운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잘 하는 넘이 더 갖겠다는 건 너무 당연해서 문제도 아니다. 그럼 못난 넘들은 어떻게 하나? 결정적으로 샌델이 옹호하는 재분배는 정의로부터 연원한 결론이 아니라, 해당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연대감으로부터 나오는 도덕적 의무감의 결과, 곧 동정심이라는 가치에 더욱 가깝다. 달리 말해, 너희들은 빈자와 약자를 감싸고 보살피는 강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는 강자로서의 정체성, 소속되고 연대해 있다는 ‘강한’ 정체성을 요구한다. “나는 미국 시민이다”라는 정체성은 ‘우리’와는 ‘다른’ 한국인들에게 광우병 소고기를 먹일 충분한 근거가 된다(미국은 능력/힘이 있으므로). 물론 약자인 한국인들이 광우병으로 죽어갈 때 (약간) 싼 값에 백신을 팔 수도 있겠고, 원조도 할 것이다. ‘우린’ 강자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판로가 막혀 신음하며 죽어가는 미국 업자들을 생각하면(ㅠㅠ), 한국인들은 별로 불쌍하지 않다. 이걸 비난해야 하나? “넘들 때문에 ‘우리 형제, 자매’를 죽이는 게 너희 한국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우리’ 미국은 ‘덕성있는 공동체’라서 ‘합의가 필요없는 연대 의무나 소속 의무’를 인정하고, 그러므로 “내 나라와 역사에 진정한 자부심을 느낀단다(억울하면 너희도 그렇게 하구).”

“인간은 말하는 존재”라는 명제만큼 타당한 게 또 어디 있을까?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 서사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모든 서사는 단지 스토리가 아니라, 인과적 모티브들을 갖는 이야기(fabula)라고 했다. 특정한 계기(플롯)가 촉발하면, 서사는 어느새 장엄한 서사시로 변형되어 우리 앞에 군림한다. ‘제3제국’이나 ‘아마테라스’ 신화 따위가 ‘먹혔던’ 것은 독일인과 일본인들이 바보 멍청이나 정신병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서사는 본래적으로 사기성이 농후하며 작위적인 것, 또한 마찬가지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샌델처럼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는 진짜 잘못 던져진 질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딴 소리하는 건 대체 누구냐?”(니체) “어디서 왜 그딴 소릴 하냐?”(푸코)라고 질문해야 옳다. 샌델 자신이 올바로 알고 있듯, “내가 속한 이야기와 타협할 때만이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되는 서사란 진정 소설 같은 삶, 허구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딴 허구에서 샌델은 천진스럽게 부분과 전체를 동일시할 것을 권장한다. “자신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이해하고 감당하는 기질, 그것은 시대의 요구다.”

4.

‘지하철 패륜녀’ 혹은 ‘2호선 파이터’로 되돌아가 보자. 매우 예언적이게도, 신칸트주의자들은 가치들의 경쟁에서 중재자 또는 판관으로 국가를 선임했다. 근대 이성주의의 산물이자 하나의 예술품으로서 국가는 그 자체 역사와 문화, 풍습, 전통, 제도/법과 생활 전체가 녹아있는 최고 가치의 담지자다. 시민 사회의 보호자로서 국가는 상호 이반하는 가치 관계들을 허락하고 조율하며 육성/제거하는 주권자다. 이렇게 신칸트주의의 말로는 신헤겔주의였다(그렇다면 공화주의의 말로는?). 그런데 ‘덕성있는 공동체’로서 국가는 개인이 그렇듯 결코 가치 중립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나 원조는 강자로서 국가가 짊어질 도덕적 의무겠지만, 기본적으로 국가는 강자 지향적이다. 왜냐면 소속원들이 자신들의 삶과 운명을 동일시할 전체인 국가는 ‘강자의 서사’로써 포장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본래 중립적이지 않다! 국가는 특정한 가치에 힘을 실어주고 그것을 본질적인 차원에서 그것의 좋음(good)을 확증하게 마련이다. 동성 결혼? 좋다! 배아복제? 좋다! 하지만 국가의 가치는 거기있지 않고, 다만 관용할 따름이다.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할 수 없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바람직하지 않”다. 국가는 약자/엇나간 자에게도 다만 관대할 뿐, 강자의 손을 들어주는 게 잘못은 아니란 것. 그것이 국가의 정의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샌델의 주장에 다분히 그럴 듯하게 들리고 시종 온당해 보이는 까닭은 그의 수사법과 여러 가지 논증들의 교묘한 뒤섞기 때문인 듯하다. 가령, ‘좋음’에 대한 그의 주장은 니체의 어법에 익숙한 우리에게 친숙하게 들리며, 그러다보면 “그래~ 그래~”하면서 그의 결론에 함께 손잡고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샌델의 ‘좋은 삶’에 대한 논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텔로스)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의 공동체주의는 개방성과 내부 비판, 배려와 연대의 도덕에 기반해 있기에 대단히 유연해 보이지만, 위에서 길게 논술했듯 특정한 문화와 가치에 대한 선호,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며, 그에 기초한 시민적 덕성의 함양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그토록 역설하던 이상 국가―“올바름, 곧 정의란 무엇인가?”가 국가론의 동기였다―의 이미지가, 그 이상적 외관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체제와 닮았다는 사실을 보곤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온갖 화려한 논증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샌델이 내놓은 ‘공동선의 정치’의 모습들, 즉 (1) 시민 의식, 희생, 봉사 (2) 시장의 도덕적 한계 (3)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4)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 등이 과연 얼마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로부터 먼 것인지 자못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응답 2개

  1. vizario말하길

    문제의식에 공감하신다니, 아직 정의에 관해 더 이야기해 볼 친구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가질 수 있고 구성해 볼 수 있는 또다른 정의의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해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 뿌요뿌요말하길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정의에 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려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을 수 있으니 한번 읽어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권유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 상당히 불편하게 읽었습니다. 읽어가는 줄 곧 국가론적 이대올로기 내에서의 정의만을 상정하는게 과연 올바른 것인가 부터 시작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죠. 이 책 읽고나서 정의가 무엇인지 더 혼란스러워 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글을 만나니 참 반갑습니다. 위의 글 글쓴이는 자신이 센델보다 투박한 문체를 쓴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 와 닿는것 같습니다. 어쩜 센델보다 더 내공이 있으신 분일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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