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한 수 배웠다

- 매이아빠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매이데이

매이를 키우다 보면 매이에게 한 수 배울 때도 많다. 아내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다. 지난 주 일요일 집 앞에 있는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예배 후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나서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뛰어노는 시간이었는데, 그날따라 매이 또래의 친구들은 일찍 가고 두살 많은 언니들만 남았다. 평소 그 나이의 언니들 세명이 뭉쳐 놀았는데 그날은 매이를 곧잘 놀이에 끼워주던 ‘착한’언니 한 명이 안 와서 둘만 있었다. 둘은 노골적으로 텃세를 부리며, 매이는 너무 어리다고 자기들끼리만 놀겠다고 했다. 매이는 언니 둘이 노는 옆에 앉아서 ‘나도 같이 놀고 싶은데, 나도 그거 잘 할 수 있는데.’ 하는 표정으로 계속 쳐다보지만, 언니들은 자리를 옮겨가며 매이를 따돌렸다. “너는 아기라서 안 돼!”

아내는 매이가 안 돼 보였지만, 괜히 간섭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보고만 있었는데, 급기야 매이가 엄마손을 끌고 언니들에게 데려갔다. ‘어떻게 좀 해 달라’는 표정으로. 아내는 언니들에게 “매이도 같이 있으면 안 돼?” 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그냥 우리끼리 해야 될게 있어서요.” 라는 얄미운 대답만 돌아왔다. 아내는 그 자리에서 ‘얘들아, 우리 가게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을까?’ 라며 물량공세를 해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치사하고 나쁜 방법이라는 생각에 꾹 참았다. 언니들이 급기야 아내와 매이에게 “저리 좀 가주세요”라고 말하며 아내를 밀치기에 참다못한 아내는 “매이가 계속 같이 놀고 싶어서 옆에 있는 건데, 끼워주지도 않고 니네 너무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언니들은 정색을 하고 “뭘요? 우린 그냥 우리끼리 노는 거예요. 그리고 매이가 끼워달라고 말하는 거 우린 듣지도 못했어요” 하고 단호하게 말하더란다. 아내는 억울한 느낌까지 들어서 ‘됐어, 치사하다. 치사해. 매이야 집에 가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찰라, 매이가 “응? 껴줘, 껴줘, 쪄줘, 껴줘”하고 작은 소리로 계속 말했다.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아내는 일단 그 자리를 피했다.

아내는 화장실에 가서 분을 식혔다. 자기 마음 같았으면 벌써 “가자!”하고 말했을 테지만, 그러면 매이는 울음을 터뜨릴 것이고 집에 와서도 “언니들이랑 놀지 못했다”며 떼를 쓸 것이고…그보다 그건 매이가 원하던 것이 아니어서….결국 매이는 엄마가 인간관계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갈등만 증폭시킨다고 생각하게 되겠지…라는 생각에 차라리 모르는 척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마침 화장실에서 그 얄미운 언니가 들어왔지만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뚱한 표정으로 못 본 척 그냥 나왔다. 아내는 매이 곁으로 가지 않고 어른들 옆 자리에 어중간하게 앉아 있었다. 얄미운 언니 엄마는 참 착한 사람인 것 같은데 딸이 저렇게 미운 짓을 한다는 걸 알까? 싶으면서도 그걸 또 어떻게 엄마에게 말하고, 엄마가 그러지 말라고 한들 그게 무슨 도움이 되랴 싶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니들 부모가 아이들 쪽을 봐주면 좋을텐데 하는 마음으로 시선을 아이들에게 돌렸더니, 그사이 어찌된 일인지, 매이가 언니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매이는 머리에 뭔가를 붙이고 깔깔 웃기도 하고 언니에게 알랑방구를 끼기도 했다. “넌 아기니까, 이건 못하고 저거나 하고 있어” 라며 아직 차별대우가 남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놀이판에 끼워준 건 분명했다. 매이는 차별하거나 말거나 신이 나서 “응, 언니!” 하며 깔깔거리며 흡족해져서 놀았다.

아내는 심히 안심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 분야에 있어서는 매이가 한 수 위라는 것을. 아내는 어렸을 적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고, 맨날 방에서 고양이 하고 놀았다. 체구도 작고 운동신경이 떨어져서 무슨 놀이든 잘못해서 낄 수 없었다. 그나마 동네 캡장이었던 언니 덕에 언니 친구들 틈에 껴서 ‘깍두기’ 노릇한 게 고작이었다. 언니가 중학교에 가서 바빠진 이후엔 혼자 집에서 TV보고, 라디오 듣고, 창문 내다보고 공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내는 가끔씩 자신이 사회성이 떨어지고 리더쉽이 없고, 신경이 과민하고 우울성향이 있는 것이 그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아내는 자신이 매이처럼 끈질기게 놀아달라고 해본 적이 없었고, 한번 퇴짜를 맞으면, 아니 퇴짜를 맞을 것 같기만 해도 자존심이 상해 ‘까짓꺼 난 친구 같은 거 필요 없어’ 하며 돌아섰다며 급 반성 중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한번만 더 참고 더 매달려보면 되었을 것을, 자존심이 상해서 혹은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이 두려워서 그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관계를 끝내버린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다고 한다. 아내는 그런 자신에 비해 매이가 마음이 아주 튼튼한 것 같다며 “매이는 자기를 닮았나봐” 라고 했다. 그리고 매이를 꼭 안아주면서 “우리 매이 대단해요. 언니들이랑 놀아서 기분 좋았어요? 아까는 많이 많이 속상했지요…그래도 매이 너무 잘했어요. 이제 언니들이 매이랑 또 놀아준대요?” 하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대견해했다.

매이는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자기 욕망에 충실했다. 그렇다고 여느 사내 애들처럼(모든 사내 아이들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상대방의 의사는 아랑곳 않고 폭력적으로 관철시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근에서 자기 욕망의 간절함을 무언의 언어로 표현할 뿐이었다. 어떤 아동학자가 그랬다고 한다. 놀이집단에 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옆에서 무척 끼고 싶다는 표정으로 얼쩡거리는 것이라고. 그러다보면 틈이 생기고 철옹성 같던 텃세도 일순간 무너지게 된다고. 그 순간을 못 기다리고 어른들이 개입하거나 먹을 거나 돈으로 마음을 사려고 하면 마음의 벽을 허무는 방법 자체를 아이가 터득하지 못하게 된다고.

‘은근과 끈기’라는 식상하고 수상쩍은 단어가 요즘 들어 가슴에 와 닿는다. 노들 장애인 야학에서 장애인 학생들과 세미나를 하면서 나는 아무리 들어도 알아 들기 힘든 말들을 야학 활동가들은 척척 알아듣는 걸 보았다. 지적 장애인들이 생활하는 시설 조사를 하면서 오래동안 자원봉사를 온 사람들 조차 그들의 생각과 욕망에 귀기울이지 않은 채 “쟤네들은 아무 것도 몰라요. 1+1도 모르는 사람들하고 어떻게 대화를 해요” 라고 말하는 것도 보았다. 은근과 끈기, 그리고 타자의 욕망과 소통하겠다는 강렬한 욕망이 없으면 쉽게 포기하고 쉽게 재단해 버린다. 할 수 없다고. 그들은 원래 그렇다고.

모든 상황은 기적같은 비약의 순간까지는 전혀 변할 것 같지 않다. 비둘기 걸음처럼 소리 없이 오지만 벼락같이 일어나는 변화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자는 은근과 끈기로 자기 욕망에 충실한 자다. 아내의 오버스러운 반성과 더불어 나 역시 언니들과 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언니들의 벽에 틈이 생길 때까지 언저리를 맴돌며 기다린 매이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쓸 데 없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양보해린 일들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아내의 오해와 달리, 나도 사실 그리 마음이 튼튼한 편이 못 된다우.) 매이야, 한 수 배웠다. 화이팅!

응답 8개

  1. 성향말하길

    ㅎㅎ맨날 몰래 읽고 가다가 처음으로 글 남기고 가요.
    은근과 끈기.. 자존심! 매이 대단해요! 함께 놀고 싶은 욕망과 자존심… ㅎㅎ 저도 항상 자존심이 이겼었는데

  2. 민지말하길

    그러고보니, 매이랑 놀기도 같은 방법으로 하면 되더라고요. 그리고 매이는 아주 순순히 (1시간은 커녕) 5초정도 애절하게 쳐다보니까 저랑 놀아주었다는.,,히히, 마음이 튼튼한데다가 타자에 대한 배려심까지 아주 휼롱합니닷. ^^ 그나저나 유나랑 매이랑 놀기 넘 재밌었어요. 기회(혹은 능력)가 없어서 오랫동안은 못해봤지만. ㅋ

  3. 안티고네말하길

    를 읽으며 느끼는 거지만, 매이는 정말 대단해요~

  4. sros23말하길

    “쓸 데 없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양보해린 일들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허허, 저도 참 부끄러워집니다. 잘 안고쳐지네요. 언젠가는 끊어야 될 터인데…쩝

  5. 은숙말하길

    아이를 키우다보면 저런 상황이 꼭 있더라구요.
    저도 매이 엄마와 비슷한 성향인데 제 아이가 저런 상황이 올때면 정말 난감하더군요.
    하지만 이제 조금 압니다.
    그저 기다려 주는 일..
    제가 끼어들지 않고 아이가 해결할 수 있게 기다려 주는 일이 가장 좋은 방법이란 걸요 ^^

  6. 말하길

    은근과 끈기로 둘 옆에 붙어 서서 ‘나도 그거 잘 할 수 있는데’ 하고 쳐다보고 있으면 되요. 대략 1시간 정도.

  7. 단단말하길

    으앙~~~~근데 왜 매이는 유나랑 놀때 날 잘 안끼워주는걸까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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