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진실, 그 너머

- 달맞이

달맞이의 책꽂이
『재스퍼 존스가 문제다』크레이그 실비 / 문세원 옮김 / 양철북

1.

팔이 아프다. 저릿저릿하게 때로는 묵직하게, 간헐적으로 통증이 찾아온다. 손으로 누르는 것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픈 날이 있는가 하면, 거짓말처럼 말짱한 날도 있다. 기가 막히는 건 외형상으로는 아무런 증표가 없다는 것. 그러니 아프다는 내 하소연은 번번이 엄살로 귀결되거나, 구박을 받는 원인으로 소급되고 만다.

달포가 지나자 상황은 더 우스워졌다. 아픈 날과 안 아픈 날이 제대로 구별이 되지 않는데다가, 이놈의 통증이라는 것이 완전 불규칙 바운드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손목에서, 손가락으로, 팔목으로, 어깨로 왔다갔다. 써야 할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통증이 배가되는 것으로 보아, 심리적인 요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합리적인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지청구를 듣는다. 물건 살 일이 있을 때마다 동행하자고 조르는 내게 아들이 툴툴거렸다.

“아픈 거 맞아?”
“진실을 외면하는 것도 죄야, 너.”
아들이 불온한 시선으로 날 바라 봤다. 당신이 주장하는 진실이 과연 참말이냐는 듯이.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니 진실이다. 그러나 딱히 내 말이 진실이라고 증명할 근거가 없다. 아니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이를 설득하고픈 생각이 없다. 아이의 눈빛이 ‘난 진실 아닌 쪽에 더 마음이 끌리오.’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녀석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싶기는 한 걸까? 아이는 어쩌면 내가 아프다는 것이 진실로 판명되는 걸 원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심부름을 거절하기 어려울 테니까. 엄마가 아프다는 게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닐 테니까. 거짓말이라고 판명되면? 그래도 아이는 썩 유쾌하지 않을 게다. 엄마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인정하자니 찝찝하고, 거짓말로 그동안 자신을 부려먹었다는 걸 확인해 봤자 약만 오를 테니까. 그러니 아이는 진위 여부 보다는 그냥 자신을 귀찮게 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나 역시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 이 상황을 지연시키고 싶다. 팔에 문제가 있다고 밝혀질까 봐 두렵다.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설령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도(거짓으로 판명이 난다고 해도) 쉽게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화살을 엉뚱한 데로 돌려 내 아픔에 무관심한 아들 녀석을 향해 맹렬한 증오를 품을지도 모른다. 거짓에 맘이 더 기울어져 있다면, 아이는 내 증오를 부당하다고 느끼며 억울해 할 테지만…….
진실과 거짓,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리 간명한 문제가 아니다.

2.

『재스퍼 존스가 문제다』는 살인사건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쳐 가는 이야기다. 진실 여부보다는 진실과 마주한 사람들의 허위와 위선을 드러내는 데 작가는 더 주력한다. 어떻게 진실이 왜곡되고 각색되는지, 진실을 외면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진실이라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한 것인지 조목조목 보여준다.

백인 중산층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조용한 탄광마을. 열여섯 살 난 주지사의 큰 딸이 실종된다. 소녀의 시체를 발견한 재스퍼 존스는 주인공 찰리 벅틴에게 도움을 청한다. 무인도에 버려진 조난자 행색의 재스퍼 존스를 보는 순간, 찰리 벅틴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사건에 휘말려들고 만다.

재스퍼 존스는 소녀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찰리를 데려간다. 소녀가 자신의 여자 친구 였으며, 그녀가 목을 매단 곳이 둘 만의 아지트였다고 고백한다. 소녀는 타살된 것이 분명하나,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미치광이 살인마 잭 라이어넬을 진범이라고 지목하기까지 한다. 그가 진범이라는 것을 밝힐 동안 시간을 벌어야 하니, 소녀의 시체를 감추자고 제안한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나는 몹쓸 짐승이야. 그래서 나를 우리에 가두고 싶어 하지.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될 거야.”

찰리는 죽은 소녀를 위해 진실을 밝혀 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진범으로 몰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재스퍼 존스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한다. 마을사람들이 재스퍼 존스를 어떻게 대하는지 뻔히 알기 때문에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신념을 깨고, 재스퍼 존스와 함께 소녀를 저수지에 수장시킨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짓말로 사건을 덮는 것이다. 경찰의 수색 사건이 시작되면서, 사건에 관련된 진실들이 하나하나 밝혀진다.

진실은 참혹했다. 타살이라고 여겨졌던 소녀는 친부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까지 하게 되자 자살을 한 거였다. 딸의 실종을 안타까워하던 주지사는 육체적 욕망을 위해 친 딸을 유린하고 폭행한 파렴치한이었다. 진실을 외면한 결과 역시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딸의 고통을 외면하고 거짓말쟁이라는 누명을 씌웠던 엄마는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언니의 자살을 목격했으나 방치하고, 유서를 통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실에 눈 감았던 동생 일라이저 역시 언니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어떤 것들은 알고 보니 왜곡되고 호도된 것이었다. 그 뒤에는 사람들의 속된 호기심과 무심한 언어폭력, 무관심이 겹겹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미치광이 살인마라고 알려져 있던 잭 라이어넬은 실은 재스퍼 존스의 할아버지였다. 위급한 며느리를 병원으로 데려가다가 차 사고를 냈을 뿐이다. 며느리를 죽였다는 자책감에 사로 잡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숲속 외딴집에 칩거해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며느리와 같이 차에 타는 것이 목격되었으며, 며느리는 죽고, 잭 라이어넬은 살아났다는 것만으로 무수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 그 이야기들은 진실이 되어 마을을 떠돌았고, 잭 라이어넬은 괴물, 살인마, 인간 말종, 미치광이로 규정되었다. 그들이 붙인 잘못된 표상이, 그들이 잭 라이어넬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타당한 근거로 소급된 것이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던 찰리 역시 자신의 생각을 번복했다. 일라이저가 진실을 알리고 옳은 일을 하겠다고 하자 자신과 재스퍼 존스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으니, 진실보다 자신과 친구의 안위를 먼저 선택한 것이다. 진실을 알리는 것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상처와 피해만 준다면, 진실을 알리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생각이 발동한 탓이리라.

작가는 굳이 세상에 진실을 환히 드러내지 않는다. ‘옳은 것이 무엇이며 정의로운 것은 무엇이며 진실한 것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는 찰리의 말처럼,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진실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중성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코리건을 떠난 지 이삼 주가 지난 재스퍼 존스를 우체국 화재와 관련해 거론한다. 늘 그랬듯이. 코리건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들에게 재스퍼 존스는 여전히 문제아, 몹쓸 짐승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실, 아니 어떤 사건과 마주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벽이다. 내 안에 이미 어떤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 내 안에 이미 어떤 하나의 벽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진실이라고 해도, 혹은 거짓이라고 해도 고대로 믿지 못하고, 그 진위보다는 내가 믿고 싶은 것을 그저 우기는 데 더 익숙하지 않은가!

작가는 어쩌면 일라이저를 통해 진실에 둔감한 우리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진실을 모른 척 한 자, 입을 열지 않은 자 또한 진실을 호도한 자, 거짓을 일삼은 자와 다를 바 없다고. 그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지 잘 보라고. 옳은 일 아니 진실을 밝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책임과 상처를 나누어 가지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그녀 또한 자기의 언니가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용기를 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녀 또한 그날 이후 밤마다 이를 갈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아마도 심장의 반쪽이 잘려나갔을 것이며 자신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태워서 이 말을 문신처럼 새기고 싶었을 것이다. 미안해.”

‘미, 안, 해.’
우리의 신체엔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이 문신들이 새겨져 있을까?

응답 1개

  1. 둥근머리말하길

    “미,안,해.”라는 말이 얼마나 나약한 언어인지요… 그 언어를 다시금 되짚어보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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