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가 만난 사람들

10人의 목판화가

- 모기

위클리 수유너머 19호에 소개했던 목판화가 오경영 선생님에 이어 두 번째로 전국을 돌며 만났던 목판화가 10인을 추억하며 다시 만나보고자 한다. 한 분 한 분이 이 분야에서 중요하고 소중한 분들이지만 작품이나 내용보다는 작업실의 분위기와 인물에 초점을 맞춰 간단한 설명과 함께 그 안에서 작품을 감상할수 있도록 했다.

김종억(안성)


1)김종억의 작품은 이 땅이 간직한 지층의 깊이와 역사, 세상살이의 녹녹치 않음에서 오는 진한 감동이 있다 무엇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집요한 시선은 불편하지 않고,오히려 그 풍경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목판은 다 파고 난 후의 개운함이 있어요.그것이 참 좋습니다.노동의 맛도 있지요.사실 붓과 칼은 같습니다.그림 그릴때나 칼을 쥐고 판을 깎을때나 생각은 같아요.필력이 있고,칼맛이 있는 것이죠.그런 측면에서 둘은 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판화가 주는 노동의 맛은 붓에서 찾을수가 없어요.”


김준권(충북 진천)


2)최근 인사동에서 새롭게 변화한 수묵목판화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김준권 작가 자신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것은 ‘원형질’이라 했다. 90년대부터 밀고온 주제이고 조형적 화두이기도 하다. “원형질이지, 삶의 원형질. 쓸쓸한 동네, 사람이 떠난 동네,건조실,고추 말리던, 담배 말리던 창고,쓰러져 가는 기와집,붕괴되어 가는 농촌현실,하지만 풍경은 아름다운,역설을 담고 있단 말이야.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원형질’ 로서의 아름다음 때문이라 생각해. 예를 들어, 자연부락을 보면 길이 날만한 곳에 길이 있고,논밭이 적당한 곳에 있고,그리고 집들이 있지.중심이 있는집,나중에 들어온집,그것만 봐도 삶의 애환이 읽혀져.그곳이 가장 아름다운 조형 아니겠어.”


김익모(전라도 광주)


3)김익모의 몽상적 풍경은 푸른색 바탕위에 기호화된 심상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언뜻 모든 작품이 비슷한 유형으로 보이지만,풍경과 사물에 대한 기호적 해석은 훨씬 깊어졌다. “10년 넘게 동일한 주제에 매달렸어요.이제는 조형적 변화를 모색해야 할때라 생각합니다.최근에 와서는 몽유도원도 연구를 했습니다.그것도 일종의 ‘몽상적 풍경’일 테니까요.어떻게 변화될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지만,기호화된 풍경에서 분명 한발 나아갈 것입니다.”


강행복(전라도 광주)


4)강행복의 작품들은 심상(心象)의 이미지다.그러나 추상적이지 않다. 고요와 집중,사색과 고독,명상과 꿈,지향과 침묵 같은 매우 내면적인 언어가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삶의 과정을 뒤돌아 봤을때,뭔가 잘못된 삶이었어요.원래는 시각디자인 전공이어서 디자이너를 시작했죠.회사도 해보구요.그러다가 광주로 내려왔어요.그리고 여기서 불교를 만났죠.불교를 만나면서 새로 시작되었어요. 불교판화를 이때 처음 시작했는데,사찰을 찾기도 하고, 법문을 비롯해서 불교 관련 책들을 구해 읽었죠. 아,이런 세계가 있구나! 그때부터 불교는 내 삶과 예술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유연복(안성)


5)깡마른 체구,길게 늘어뜨린 머리칼,그러나 그 모습은 강한 예술가의 모습이라기 보다 차라리 농군에 가까웠다.그 스스로 ‘자연을 큰 스승 삼아’살아 왔기에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르겠다.목판화가에게 나무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나무는 ‘찬란한 생명’입니다.작가는 그것을 죽이는 자죠.나무도 암에 걸리는데,가지가 부러진 자리가 그곳이죠.상처로 빗물과 먼지,오염물질이 들어가 까맣게 변함니다.그 상처가 아물면서 나무는 독특한 모양새의 아름다움을 가지게 되죠.상처를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만들어 내는것은 여유와 시간입니다.나무의 치유력,그것을 보면 단지 재료가 아니고 스승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윤엽(안성)


6)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판쟁이로 살다가 군에 갔고,제대하고 다시 간판쟁이를 시작했다.그러다 26살에 대학을 입학했다.목판을 시작한 것은 1996년 대학 4학년 때부터다.화성시 정남면 백리에서 처음 목판을 시작했다.<산드래미 최씨>는 그가 내놓는 생애 첫 목판 작품이다.이 작품은 <민족예술>표지로도 쓰였다. “얼마전에 개인전을 목판화로 했어요.주제가 다 농사꾼이잖아요.농사꾼 애길 끄집어내려는 것이 아닌데,공감대가 맞는것 같아요.그네들을 보면,‘아,이쁘다.좋다!’ 그런거 느껴요.옛날에 노가다 뛰었는데,극장 간판도 그리고,그런 정서들이 작용하는거 같아요.재활용 센터에서 깡통을 주워 오는데,거기서 사람들을 만났어요.막 그려보고 싶은거에요.그런 삶을 이해할수 있을것 같아요.”


이경희(서울)


7)판화가 이경희는 우드 잉그레이빙 Wood engraving을 하는데,우리말로 ‘눈목판화’ 혹은 ‘목구목판木口木版’이라 한다.워낙 섬세한 작업이라 바늘침 같은 도구를 이용해 판각을 한다.돋보기를 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품구상이 끝나고 작업을 시작하는 그 순간,즉 첫 바늘침의 점을 찍기 시작하면 오직 점의 확산으로 펼쳐지는 그림의 세계에 집중해야 한다. “일단 점을 찍기 시작하면 끝까지 가요.아이들 자장면 시켜주고,밤을 새기도 하고, 며칠씩 머리를 감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사방 1센티미터를 파는데 1시간 정도 걸리고, 전체 이미지의 윤곽을 잡는데 일주일이 걸리죠.한순간도 놓을수가 없어요. 정말 미칠것 같은 시간이에요. 하지만 그이후에는 극기로 참아요. 그러고 나서 2주후에 한번 찍어봅니다.이미지를 보는 거에요.이때는 밀도가 없어요. 그리고 처음 찍었던 그 시작점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한바퀴 도는데 다시 일주일이 걸려요. 그리고 첫 작품을 찍어내죠. ‘간필지’로 찍어서 벽에 붙였을때 마음에 든다면 그만한 카타르시스가 없어요.”


정비파(경주)


8)1980년 초입부터 본격적인 판화작업을 시작한 작가는 계명대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으나 목판을 만난 뒤로는 줄곧 목판을 해왔다고 한다. “당시에는 판화가가 없었어요.판화를 하려면 독학을 해야했죠.서양화를 했지만 나와 맞지 않았어요.전통에 대한 생각이 많았는데,그것을 표현하려면 전통적인 제작기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판각에 주목했다.우리의 전통예술에서 ‘각(刻)’ 이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동양적인 선을 거기서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칼맛,칼의 선이 나와 맞아요.그러니 자연스레 그쪽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저는 겸재 정선을 좋아합니다.그가 바라본 자연이 좋고,그의 선이 좋습니다. 서양화로는 이러한 느낌을 표현할수 없습니다.전통의 맥을 잇는다고 했을때,저는 붓을 놓고 칼을 든것입니다.”


홍선웅(경기 김포)


9)80년대 중반 <민중교육>사건을 시작으로 해직과 복직을 거듭했고, 전교조 활동으로 다시 그일이 반복되면서 스스로 교단을 떠나 민예총과 민미협에 전념하면서 여러중책을맡아 조직생활을 했다. 그런 그가 작업을 위해 수도승처럼 길을떠난게 95년이었다.“젊음을 조직일에 너무 매달려서 작업량이 턱없이 부족했어요.그래, 지금은 작품만 해야 한다.그러면서 파고 들었죠.사실,몸도 좋지 않았어요.작업을 시작하면서 판화가 무엇인지 찾아 다녔습니다.도산서원,병산서원,학봉 유물전시관도 가서 직접 판을 확인하고,부석사,송광사 등 판목이 있는 곳이면 찾아가서 눈으로 확인했어요.그러면서 각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됐죠. 규장각에서 본 고서적은 많은 감명을 주더군요.” 줄곧 사용해 오던 베니아 목판을 버린것도 이때다. 팔만대장경처럼 마구리를 짜고 산벚, 후박, 돌배, 은행, 단풍나무를 쓰기 시작했다. 판화가 완성되면 본판을 버리던 습관도 고쳤다. 판(板)은 대지요, 각(刻)은 씨앗이며, 형(形)은 거기에서 난 산물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행위의 과정을 다시 다잡아 간 것이다.그의 작업실 1층 판고에는 그런 작업의 결과물인 목판들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이것은 우리 목판문화의 새로운 계승이 될것이다.

홍진숙(제주)


10)목판화가들을 함께 찾아다닌지 1년여쯤 미술평론가이자 경기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기전문화예술> 전문위원이었던 김종길씨와 찾은곳이 제주도였다. 그곳에서 목판작업을 하는 홍진숙 작가는 우리의 등장에 적잖이 놀라는 모습이었다. 설마 이곳까지 찾아올줄은 몰랐다고..우리가 찾아간곳은 <홍 판화공방>이란 현판이 붙어있는 홍진숙의 작업실이었다 “여기 판화공방에서 배우면서 목판화를 시작했어요.나무를 파서 찍는 과정,내가 직접 노동에서 얻는 작품이라는 점이 좋았어요.나무는 베니아판을 쓰는데, 제주에서는 좋은 목재를 구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제작방식이 소멸법이어서 그래요. 힘들때 위안을 줘요,나무는. 처음엔 주변 풍경을 주제로 했어요.살림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편하기도 하고,대학 자취하면서 뒷골목 누볐던 생각도 나고,그런 정서,제주에 와서도 계속 관심을 가졌어요.” 1999년 세 번째 개인전 <바람의 소리>전을 준비하면서 그는 제주의 풍경을 보러나갔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이었다. 360여 개의 오름과 그 오름에 얽힌 신화, 한라 영신과 마을에 전해내려오는 구전설화,제주무신궁과 무가,본풀이(무당의 노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에 생태적 관심에서 비롯된 제주도의 멸종위기 동식물 보호 홍보용 스티커를 제작했다. 노랑부리백로와 두점박이사슴벌레,한란 등이 그것이다.“개발을 많이 해요.스스로 두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원시미술의 바위그림처럼. 지금은 신화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제주도에는 1만 8천여 신이 살고 있는 땅이에요.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굉장히 많은 신이 있어요.그래서 그 신화를 작업으로 표현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자료도 많이 보고 현장도 가면서. 어느땐 어렵고 위험할수도 있다고 생각돼요.신화의 모습을 고정화 시킬 수도 있잖아요.” 전국에 더많은 목판화가들이 있었겠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이곳 제주가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가 되었다.

– 글/그림 모기

응답 1개

  1. 고추장말하길

    한 분 한 분의 이야기가 정말 천천히 음미해야할 것들이네요. 목판 신전에 다녀온 느낌 같기도 하고… 말과 글, 작품과 사람이 모두 뭉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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