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역사의 공간 – ‘사건과 사건간의 투쟁’

- 박카스(수유너머R)

역사의 공간

대학시절 과동기 중에 가로수정비사업으로 인해 도심에 버려진 나무들을 모아두는 ‘나무 고아원’을 찾아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4년 내내 ‘나무고아원, 나무고아원’ 하더니 졸업할 즈음이 되어서 대학로 어느 카페로 나를 불러 ‘나무고아원’이라는 제목의 연극대본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각종 행사의 촬영을 하고 돈을 받는 회사에 들어갔는데 입사한 지 3년이 지났을 즈음, 친구가 늘어놓는 불평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이미 찍을 앵글이 다 정해져있다니까’ ,’나는 그냥 카메라만 잡고 있는 거야.’ 친구는 그렇게 한참을 불만을 토로한 뒤 끝에 가서는 쓴 웃음을 지으며 ‘언제 한 번 저기 종로에 있잖아.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들 좀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어. 무슨 이야기들을 꺼내놓으실지 궁금하지 않아?’ 그러곤 곧 친구는 괴로워하며 ‘도대체 왜 난 대학을 졸업해서도 이런 쓸데없는 데 자꾸 관심이 가는지 모르겠다. 다들 정신차리고사는데, 근데 그렇다고 도통 정신을 차리고 싶지도 않은 이 기분은 뭐냐.’ 어느 만화의 제목처럼 ‘울기엔 좀 애매한’ 심정이 이런 심정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읽었던 『역사의 공간』이라는 책에서 소심한 이 친구와 나누고 싶은 말들을 옮겨왔다.

소수적 역사에서의 즐거움

나는 ‘진보’,’이념’이라는 단어에는 그다지 감응을 못 느낀다. 하지만 『역사의 공간』에서 말하는 ‘진보의 이념을 갖는다는 것’ 다른 말로 ‘소수적인 역사’를 산다는 것에 대해 주목하게 된 이유는 책에서 말하는 ‘소수적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진보에 대한 정답찾기’로 들리기 보다는 ‘우리는 과연 어떤 즐거움, 어떤 두려움과 마주하며 살 것인가?’ 라고 묻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말은 어떤 하나의 연속적 흐름에 통합된 지나간 사실들의 집합을 의미하며, 현재에 부단히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미래적인 방향을 부여한다고 믿어지는 사실들의 연속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역사란 특정한 서사를 통해서 사실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고, 서사를 구성하는 ‘전체’의 관점에서 그 사실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대문자) 역사는 사건에 대한 의미부여라는 점에서 사건들 간의 투쟁에서 남겨진 사건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쓰여지는 대문자 역사에는 과거사실을 불러와 자기행위를 긍정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모습으로 세계를 통합하려는 욕망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쓰여지는 대문자역사에는 언제나 은폐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대문자 역사는 그것이 쓰여지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보이지 않게 하고 보이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이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 역사는 치안을 유지하는 기능, 믿음을 조작하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는 대문자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대문자 역사란 ‘국민’들에게 주어진 자리를 확인하게 하고 그 자리에 걸맞은 것을 요구하고 그에 부합하여 행동하게 하는 치안의 장이다.”

근대이후 신문에서는 여러 곳에서 여러 순간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오늘’이라는 말로 묶고 여기에 현재성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개개인을 사건의 장으로 ‘오늘’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이란 선 위의 ‘오늘’을 사는 존재로 만들어놓는다. 그리고 ‘국민’이라는 단어를 통해 그 시간선 위에 놓인 사람들에게 정신적 일체를 요구한다. 시계-시간위의 국민의 이름으로 묶인 개인들은 국가의 통제에 의해 자신의 경제관, 사랑관, 인생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정신적으로 일체가되어 대문자 역사가 요구하는 삶을 산다. 그렇게 국민이라는 하나의 이름에서 개개인은 국가가 유도하는 즐거움과 두려움을 따르며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 치안의 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의 역사법칙을 따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할 수 있는가? 『역사의 공간』에서는 오히려 초월적 척도로 자리한 맑스주의에 대해 경계한다. 그리고 초월적 척도로 내재한 맑스주의에 따라 치안의 장에 대한 소수자를 정규직 노동자계급에 국한하고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현실에 이의를 제기한다. 마찬가지로 맑스주의 법칙을 따라 생기는 지배-피지배 관계가 있다면 이는 대문자 역사와 같다는 것이다. 초월적척도에서의 즐거움은 지배-피지배관계에서 생겨나는 즐거움이다. 가령 돈에 대한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미 그 돈을 많이 버는 사람에게 복종하며 반대로 그 복종으로부터 얻은 돈의 능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돈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즐거움, 돈이 없을 때 생기는 두려움과 함께 살아간다.

반면 소수적 역사에서는 끊임없는 돌발에 대해 긍정한다.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현재적 돌발이 존재하며 침묵시킨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보이지 않던 것에 눈을 돌려 들리지 않던 말,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하여 함께 사는 공간으로의 세계를 긍정한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같은 것만이 있어야 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소수적인 역사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침묵되는 것들을 바깥으로 불러내어 큰 역사로부터 잉여되지 않는 삶을 창출하고 촉발하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지배와 피지배에서의 즐거움이 아니라 모두가 판단주체로서 함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에서 이들은 즐거움을 느낀다. 자신의 외부를 끊임없이 긍정하고 보편없는 세계이자 모두가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위한 세계를 긍정한다.

역사는 사건과 사건의 투쟁의 장이다

얼마 전 장애인 미신고시설에 조사를 나간 적이 있다. 정부에 시설로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장애인들을 모아 놓고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시설환경을 점검하고 인권침해나 부당한 노동착취가 있는 곳에는 조치를 정부에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었다. 미신고시설조사를 나가면서 먼저 나는 도외지 곳곳에 이런 ‘시설촌’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 장애인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모아 두는 시설들이 주변이 황량한 도외지에 모여있다. 시설촌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장애인 시설은 인가가 없는 그런 외진 곳을 찾아들어가야만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본 몇몇 곳의 시설만이 그랬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장애인들은 그들의 경제적 능력과 행동에 대한 판단결정권을 시설장에게 내맡긴채 육체적 노동을 착취당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이 받는 불합리한 대우에 대해 침묵하려고했다. 왜 더 말을 못하냐고 물으니 ‘시설장에게 미안해서..’ 라고 일관되게 말한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살게 해주니까요.’ 라고 말한다.

무엇 때문에 장애인들은 자기 존재에 대해 타인에게 죄스러움을 느끼며 살아야하는 것일까. 역사는 사건과 사건이 부딪히는 투쟁의 장이라고 했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 이들을 같이 살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이들을 외진 곳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국가는 이들이 같이 살 수 없는 공간을 만들고 있는 자신의 무능력을 존재 자체에 대한 무능력으로 돌리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째서 끝끝내 같이 살 수 없다고 긍정하고 있는 것일까?

G20이라는 사건이 곧 한국에서 일어난다. G20이 열리는 동안 거리의 미관을 위한다는 취지로 함께 살고 있던 이주 노동자들은 강제 출국 단속이라는 사건과 마주했다. 내가 사는 곳 근처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함께 예배도 드리고 한국어 공부도 하고 주간의 피로를 녹이며 수다를 떨 수 있던 한 단체의 모임은 단속의 위협으로 당분간 중단됐다.

해방촌 오거리 앞에서 낮에 과일을 팔던 아저씨는 당분간 장사 시간대를 밤으로 옮기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거리의 미관을 해치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자신의 수입이 적어지는 데 불만은 있지만 G20이라든 데 어쩌겠냐고, ‘보기에 안 좋다잖아. 젠장’ 이라며 혀를 끌끌찬다. 도대체 어떤 친구가 오길래 우리는 마치 연병장에 돌을 줍듯이 바짝 긴장한 상태로 거리의 사람들을 내쫓고 함께 일하던 동료를 멀리 내쫓는가. 그 사건이 정녕 도외지의 시설들을 시내로 불러들이고, 이주노동자를 같이 살 수 있는 유연한 공간으로 만들며, 거리의 상인들도 물건을 팔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어떤 즐거움에, 무엇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어떤 사건을 부르고 있는 것인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앞에 닥치는 사건에 대한 긍정 혹은 나타나는 사건에 대한 암묵적 동의는 그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 내 눈 앞에 놓이는 것과 사라지는 것, 내가 듣는 것과 들을 수 없게되는 것, 만지는 것과 감각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불러내고 기록에 남겨두는 사건은 어떠한 것의 믿음으로 연결되고 믿음은 다시 믿음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부르는 사건들로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지금 누군가가 불러내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사건들은 우리의 삶의 아름다움과 관련한 것들인가. 혹시 그 사건은 삶이 아름다워지기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을 비루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정한 앵글만을 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탁한 공기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놓치고 싶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는 친구에게 나는 대학로 어느 모퉁이 카페에서 버려진 나무들에 대해 가슴아파하며 들려주었던 아름다웠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꼭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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