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시인의 거짓과 무지

- 고병권(수유너머R)

아주 유명한 이야기지만 플라톤의 국가에서 시인은 추방된 자, 즉 난민입니다. 이데아에 대한 회화나 조각의 모방도 탐탁지 않게 보는 그가, 도무지 묘사 대상을 알 수가 없는 시에 대해 가졌을 불만은 짐작이 갑니다. ‘시인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 게다가 걸핏하면 ‘격정과 광기에 휩싸이고’. 진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철인의 세계에서 시인의 거짓과 광기는 난민 생활을 해야겠지요. 그런데 플라톤도 한때는 대단한 문학청년이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를 만나고 나서 작품을 모두 불살라버렸다는 군요. 겉보기엔 플라톤 문학의 종언과 철학의 개시인 셈인데, 모르죠, 그게 다 문학적 뻥인지도.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혹시 그의 진짜 거짓과 냉철한 광기가 시작된 건 아닐까요.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시인에 대하여’)에서 플라톤을 패러디합니다. 제자가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이 언젠가 시인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차라투스트라가 한때 플라톤이었음을 암시하는 말인데요. 플라톤 역을 하는 차라투스트라(아니 플라톤이 가장 혐오했을 형상으로 되돌아온 플라톤)가 말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시인이다.”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크레타 사람의 말처럼 아주 이상한 역설을 뱉었습니다. ‘시인은 왜 거짓말을 한다고 하셨습니까’ 하는 물음에 ‘나도 시인이거든’이라고 답하는 차라투스트라!

어느 철학자는 플라톤이야말로 소피스트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플라톤이야말로 시인이라고 주장하는가 봅니다. 그런데 진실과 거짓의 알쏭달쏭한 역설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사이에 있는 대화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시인이라고 밝힌 것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인데요. ‘왜 시인은 거짓말을 한다고 했느냐’는 젊은이의 물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넌 지금 내게 ‘왜’라고 물었느냐? 나는 왜라는 물음을 던져도 좋을 그런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다.”

무슨 말일까요? ‘왜’라는 물음은 근거(Grund)에 대한 것이지요. 철학자의 변증술은 근거 제시를 요구하지만 시인은 그 물음을 거부합니다. 시인에게는 ‘근거’가 없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과거의 견해를 떠받쳤던 ‘근거들’은 이미 사라져버렸고, 자신의 비둘기장에는 이미 “낯선 동물들이 이사해왔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새들은 붙잡히는 순간 벌써 몸을 떨며 죽어갑니다. 논리와 근거는 정신에 날아든 새들을 금세 죽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한 발 더 나아가 시인들은 “아는 것도 적고 배우는 데도 서툴다”고 합니다. 그러니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고.

시인의 거짓말은 ‘근거없음’과 ‘무지’에서 나오는 모양입니다. 근거 없는 억지와 학식 없는 무지로 보이는 시인들의 거짓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호들갑 쇼’의 달인(달견?)인 거짓 불개와 ‘크나큰 사건’의 당사자인 진짜 불개처럼, 짜가(?) 시인과 진짜(?) 시인이 있는 모양입니다.

진짜 시인에게 근거가 부재한 이유는 그가 근거 바깥으로, 혹은 근거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사물들의 결합에 특정한 자격과 질서를 요구하는 근거를 뚫고 내려갑니다. 특정한 근거에 의해 배제된 모든 것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까지 그는 내려갑니다. 근거가 없고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그의 언어는 논리적으로(문법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의 함께 함 -들뢰즈의 용어를 빌자면 ‘불공가능한 것들의 공가능성(compossiblité)’-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어떤 번역이론가의 용어를 빌면 ‘불연속적인 것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거기를 우리는 근거없음(Grundlos)이라는 의미에서 ‘심연(Ab-grund)’이라고 부릅니다. 시인은 사람들 중에서 심연에 가장 가깝게, 가장 먼저 내려간 이들의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근거를 해체하고 논리를 중단시키고 앎의 생산을 멎게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니힐리스트도 아니고 단순한 억지꾼도 아닙니다. 물론 무식하지도 않습니다. 근거를 해체하는 일은 근거를 세우는 일 이상의 집요함을 요구하고, 논리의 억견(doxa)을 역설(para-doxa)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력이 요구됩니다. 다만 그들은, 숭산 스님이 화두처럼 했던 말, ‘오직 모를 뿐(don’t know)’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우리의 앎을 중단시킵니다. 그때 그들의 시는 울려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시란 심연이 내는 목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경지에 오르는 건 쉽지 않습니다. “시인들은 조개껍질과 닮았다.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진주를 발견한다. 하지만 나는 소금에 전 점액만을 보았을 뿐이다.” 소금물이 진주로 변할 때까지 심연에서 그것을 품고 있는 사람은 드물지요. 니체는 얕은 바다가 아니라 깊은 바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소 같은 독자 앞에서 허영에 들떠 꼬리를 쫙 펴고 있는 ‘정신의 공작들’, 근거없음과 논리의 중단이 모호한 횡설수설과 혼동되고, 심연의 깊이를 감정의 과장과 혼동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저 깊은 서랍장 어딘가에 누구에게 보여주기 창피한 몇 편의 글을 시랍시고 던져놓은 제 얼굴이 괜스레 붉어집니다.

이번호 위클리 수유너머 주제는, ‘시(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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