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진의 사진공감

가래여울마을

- 임종진


“예전에는 여기가 강폭이 일케 크지도 않았어. 조그만 여울이었지. 내가 여기서 고기 잡아다가 내다 팔았거든. 쪼그만 목선 타고 말이여. 없는 물고기가 없었어. 엄청 많았지. 그걸로 우리 식구들 자알~ 먹고 살았지. 밭뙈기도 쪼금 허구. 허허.”

“근디 전두환 때 뭐 틀어막고 모래 퍼 담아내고 그러더라고. 우린 뭐 그런가 보다 했지. 힘없는 놈들이 뭐 대들 수나 있나. 암튼 그러고 나서는 고기도 안 잡히더라니께.”

마을 어귀에 자리한 추탄상회 앞 평마루 위,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의 얘기꽃이 솔솔 끊이질 않는다. 젊은 시절 마을에 들어와 50여 년을 살았다는 그의 이마엔 세월의 더께만큼 가득 주름이 쌓여있고 딱 걸맞는 농익은 입담도 예사롭지 않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오후 한나절이 절로 지나간다.

“가래나무? 아! 그걸 몰르는감?

거 있잖여~. 손으로 쥐고 쪼물락쪼물락 허믄 뽀드득 소리 나고 그러잖여어~.”

“호두 모냥 생겼지만서두. 고것보다는 쪼금 크지. 그게 잔뜩 열매처럼 나는디 따다가 말려가지고 쪼물락 거리믄 몸에 좋고그려. 옛날에는 마을 여기저기 나무가 많었는디 지금은 이제 거의 없어~.”

흘러간 세월만큼, 딱 그만치 들어찬 나이만큼 기억은 가뭇가뭇 흐려질 법도 한데 노인은 잠깐 들른 과객의 소매 끝을 붙잡고는 하염없이 놓아줄 줄을 모른다. 마을 이름의 유래를 묻는 질문에 손짓 발짓 섞어가며 어린 손주에게 옛날 얘기 들려주듯이 구수하기까지 하다.

서울 동쪽 끝자락인 강동대교 남단 아래 한강 둔턱에 위치한 한 작은 마을.

강동구 강일동 가래여울 마을.

말 그대로 이름이 참 곱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홀로 찾아 나선 길. 그 위에 얹혀진 가을 햇살에 눈까지 부셔 실눈이 따로 없을 정도다. 강동교통 2번 마을버스는 동네 구석구석을 돌더니 종점인 이 마을 어귀를 한바퀴 돌아 내려준다. 이름을 알아 무엇하느냐면서도 마을소개에 여념이 없던 노인을 그 자리에서 만났다. 한참을 그렇게 주저앉아 있다가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마을과 몸을 섞었다. 자전거도로로 포장된 둔치를 넘어 강가로 넘어가니 갈대와 잡풀이 무성한 풍경이 오래된 강변마을이었음을 그대로 고즈넉하게 보여준다. 재개발의 광풍은 어김없이 이 구석진 마을에도 찾아오고 있는 것일까. 강 건너 우뚝 들어선 고층 아파트 단지가 병풍처럼 드높다. 왠지 느낌이 무겁다. 조금전 노인의 마지막 얘기가 다시 귀에 울린다. 내년 이른 봄이면 길도 새로 나고 뭐도 바뀌고 뭐도 들어서고…. 그랬다.

강변 자갈밭에 배를 대고 물고기 머릿수를 세었을 젊은 시절 노인의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괜스레 어른거린다. 왠지 사라져가는 것은 아쉽다. 오래되어 오히려 귀한 것도 있을 터인데 낡은 것이라 여겨 금새 사라지는 요즘 주변 상황이 슬그머니 떠오른다. 머리를 털고 다시 수풀 사이를 거니는데 이름모를 하얀 들꽃 아래 삶을 다한 오랜 낙엽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지난해 겨울 결에 떨어졌을 낙엽들이 나무 그림자 틈으로 비집고 든 가을빛에 몸을 사렸다. 이제 거의 베어 없어졌지만 마을 체면을 살리려는 듯 심어진 가래나무도 눈에 들어온다. 나랏님들의 어설픈 생색꺼리 마냥 그마저 참 애처로이 작기만 했다.

마을 중심부에 여러 채 자리잡은 붕어찜이며 매운탕 집들만 여유로운 한낮 주객들의 웃음 속에 시끌벅적 호들갑스럽더니 오후 햇살이 낮아질 즈음 다시 조용해진다. 한가로이 마을 골목길을 오가는데 오래된 담벼락과 나무대문들이 정겹게 눈에 들어온다. 세월이 흘러감에 초가집 투성이에서 슬레이트로 다시 기와로 덧대어진 지붕들 틈사이 오랜 삶의 기운들이 함께 달려나온다. 마을 끝 둔치 앞에 자리잡은 경로당은 비닐하우스에 방수막을 덧입힌 허름한 모습이지만 마을어른들의 쉼터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슬그머니 건네는 인사에 화답하는 노인들 몇 분이 하얀 이를 드러내 웃고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냄비에 찬거리 몇 얹힌 접시를 챙겨가는 모습이 어디 막걸리라도 나누시려는 품세다.

그닥 멀리 돌아다닐 것도 없이 손바닥만큼 작은 가래여울마을.

바둑판 처럼 잘 정돈되고 포장된 시멘트 길 보다는 한결 옛스러운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펼쳐진 마을정경은 볼수록 맘이 편안해진다. 막 풀어헤친 옷자락처럼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그 사이사이 닿은 주민의 손길들은 섬세하고 단단하기만 하다. 풍성하게 자란 텃밭 배추들. 먹음직스럽게 매달린 감나무. 오래도록 한자리를 지켜온 텃마루. 그리고 소담스럽게 한철 꽃을 피웠을 화분들….

바깥으로 높다랗게 채워가는 콘크리트 숲은 여전히 회색빛인데 마을 안 여기저기엔 화사한 기운이 그렇게 가득하기만 하다.

강동교통 2번 마을버스 종점. 가래여울마을.

짙게 드리워 가는 가을, 빈 의자에 걸친 그림자가 왠지 외롭지만은 않아 보인다.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들이 하루의 고단함을 풀어내는 곳도 이 자리가 아닐까. 이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노을빛 물든 막걸리 한두 사발에 기대고픈 생각이 절로 든다.

응답 2개

  1. 조영옥말하길

    햇살 따뚯한 한낮 – 더욱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2. 김현식말하길

    좋은 이야기 사진, 감사드려요. 언제 한번 햇볕 좋은 날 가보면 좋을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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