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미의 시경읽기

숨어 사는 즐거움

- 정경미

“옛날 선비들은 때에 따라 출처出處를 달리 했다. 세상이 나를 알아줄 때 힘과 재능을 다해 세상을 위해 일한다. 이른바 출세出世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즉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공부해도 운이 닿지 않아 벼슬자리를 못 얻거나, 정치적 불화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날 때, 조용히 숲속에 숨어 살면서 자연을 벗삼아 책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다. 이렇게 벼슬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숨어 사는 선비의 삶을 ‘고반考槃’이라고 한다. 고반한 누구는 지금 고향에서 뭐하나··· 이 ‘고반’이라는 말이 시경詩經 위풍衛風의 「고반考槃」에서 나왔다.”

考槃在澗 움막을 시냇가에 지으니
碩人之寬 석인의 마음 넉넉하도다
獨寐寤言 홀로 자고 깨어 말하며
永矢弗諼 오래도록 이렇게 살겠노라 하네

‘고考’는 ‘성成’과 같은 뜻-‘이루다’라는 뜻이다. 반槃은 ‘쟁반’이라는 뜻과 함께 ‘즐거운’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고반考槃’이라고 하면 ‘즐거움을 이루다’라는 뜻이 된다. 은거하는 삶의 내적 특성을 이르는 이 말이 후대에 와서는 대유代喩적으로 ‘은거하는 사람의 집’ ‘얼기설기 지은 초가집’ ‘움막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즉 ‘고반’은 ‘은거’를 뜻함과 동시에 ‘은거하는 사람의 움막집’을 가리키기도 한다. ‘석인碩人’은 ‘큰 사람’ ‘위대한 사람’의 뜻이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크면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세상이 요구하는 역할에 딱 들어맞지 않아 불화하는 경우. 그래서 ‘석인’이라는 말에는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홀로 자고 깨어 말하며[獨寐寤言]’는 인용이 많이 되는 구절이다. 혼자 자다가 깨어 혼자 말하는 모습. 은거하는 삶의 관용적인 표현이 되었다. ‘오래도록 이렇게 살겠노라 하네[永矢弗諼]’라고 할 때 ‘화살 시 : 矢’는 원래 ‘화살’이라는 뜻인데, 화살을 분질러 맹세하므로 ‘맹세하다’라는 뜻도 가지게 되었다.

考槃在阿 움막을 언덕에 지으니
碩人之薖 석인의 마음 여유롭다
獨寐寤歌 홀로 자고 깨어 노래하며
永矢不過 오래도록 이렇게 살겠노라 하네

시냇가(언덕 위) 오두막집. 남들이 보면 초라하다 하겠지만 복잡한 세상살이의 시비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을 벗삼으며 유유자적하는 삶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 시는 고반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사실, 권력의 중심에 있을 때에는 부귀와 명성을 누릴 수는 있지만 정작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볼 여유를 갖기는 쉽지 않다. 남들의 시선에 포획된 삶. 그래서 부귀와 명성을 물거품과 같이 헛되다고 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이 행복하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바쁜 일정 때문에 미뤄 두었던 책-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이 얼마나 즐거운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고반의 즐거움을 모르고 나더러 불쌍하다 하겠지. 숨어 사는 즐거움 아무도 모를 거야. 쉬잇! 자랑하지 말자. 사람들이 알면 이 즐거움을 빼앗아갈지도 모르니. 나 혼자 오래 이 즐거움 누리리라.

考槃在陸 움집을 높은 곳에 지으니
碩人之軸 석인이 한가롭네
獨寐寤宿 홀로 자다 깨고 다시 누우니
永矢弗告 이 즐거움 남에게는 말하지 않으리

벼슬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쓴 ‘고반’ 시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일 것이다. “돌아가자. 교제를 그만두고 교유를 끊어야겠다. 세상이 나와 맞지 않으니 다시 수레에 멍에하여 무엇을 구하겠는가. 친척들의 정담을 기뻐하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며 근심을 잊으리라.[歸去來兮 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도연명陶淵明, 귀거래사歸去來辭) 무용無用이 대용大用이라고 한다. 세상에 쓰이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의 ‘쓸모없음’을 말해주지만, 그 쓸모없음은 또한 더 큰 쓸모-대자유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경 위풍의 「고반考槃」이라는 시는 은거의 삶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권력의 중심에서 버려진 ‘소외’가 아니라, 자족적 삶의 ‘자유’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속의 헛된 부귀와 명성만을 좇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숨어 사는 즐거움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이 즐거움 남에게 말하지 않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는 마음-나갈까 말까 하는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세상의 시비를 피해 숲으로 숨으려 하면 스스로 고립되어 자신을 더욱 황폐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진정한 은거는 숲으로 숨는 게 아니라 저잣거리에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이라고 한다. ‘시은市隱’이라는 말이 있다. 《진서晉書》 「유찬전劉餐傳」에 나오는 말이다. 은거란 애초에 내 마음에 달린 것이지 외부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은자는 조정에도 숨을 수가 있고 저잣거리에도 숨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은거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굳이 속세를 피해서 숨지 않는다는 뜻이다. 숨어 사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 「고반考槃」은 중심에서 이탈한 자, 스스로 중심이 된 자의 자유를 보여준다. 그러나 숨어 사는 즐거움이라 할 때, 어디로 숨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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