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나의 술 이야기 3 – 주도에 풍류는 있는가?

- 김융희

우리가 일상 즐겨먹는 먹거리로 술처럼 다양한 경지의 음식은 없을 것 같다. 바람의 속성이 나처럼 어데나 때도 없이 끼일려고만 하면 주저없이 끼일 수 있는 것이 술이다. 품이나 격은 도대체 없는, 속성으로 치면 십상 천덕꾸러기인 것이 술이다 싶어 어이 술의 풍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싶은데, 술은 오랜 세월을 풍월주인으로 지금까지 절대 지위를 지켜오고 있다. 풍류도 예사 풍류가 아닌, 詩酒風流요 呑花臥酒와 같은 말로써, 술의 풍류기질은 가장 아름다운 꽃과 시를 동반한다. 최상의 술꾼이란 풍류가 있는, 그래서 얼근히 취한 기분을 모르는 사람은 자격없는 술꾼으로, 애주가는 이처럼 정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술의 정서였다.

그런데 오늘날 주도에 풍류가 있으며, 지금도 그 정서는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요즘 나는 전철 출입이 두렵다. 전철을 타기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전철을 타거나 기다리면서 촘촘히 설치된 모니터에서 흘러나온 술광고의 소음이 두려운 것이다. 공공성의 장소에 설치된 광고의 내용은 규제를 받는다는 것을 얼핏 듣는 것도 같은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건지, 아님 내용에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음에서 인지는 몰겠다. 그 상품의 광고컨셉이 “흔드름”이나 보다. 처음엔 제품의 병을 흔든듯 싶더니, 막상 흔드는 것은 병이 아니라 술을 드는 사람들의 몸을 흔들어대는 것이 본격이다. 직장의 회식인지? 넓은 장소에 많은 남녀의 젊은이들이 술판을 벌려 술을 마신다. 아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보이지 않고 모두가 술병을 들고 몸을 흔들어데고 있다. 하나같이 몸을 비벼 흔드는데 맨 앞의 주모델인 여자의 흔드는 섹시한 몸놀림이 가장 돋보이면서 흔들며 즐기자는 멘트가 귀를 때린다. 귀를 막고 외면해도 소용없다. 광고의 이미지는 잠자리까지 따라온다. 지독한 악몽이다. 세태의 변함이려니 이해하자며 아무리 지우려 하지만 아님은 각인된 이미지 탓인가? 아날로그인 구세대의 소견머리 없는 이해부족에서 일까?

80년대에 쓰여진 정신과 전문의요 수필가이신 최신해박사의 “술과 인생”이란 글에, 술이란 남자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인 만큼, 술 마시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문제가 될 것 같다며, 우리 선조들의 풍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옛 얘기에, 우리 선조의 어떤 가난한 선비는 섣달 대목날 친구에게서 세찬으로 술 한 독과 안주를 받아 하인에게 지워서 남산골 자기 집으로 돌아가다가, 남산 기슭에 이르자, “자네, 무거운 걸 우리집까지 지고 갈 것 뭐 있겠나. 여기서 내가 마셔버려야겠네.“하면서 지게에서 술독과 안주를 내려놓고, 한 그루의 소나무와 마주 앉아서 자기가 한 잔 퍼서 마시고는 “소나무야, 자네도 한 잔 들게.”하면서 술 한 잔을 퍼서는 소나무 뿌리에 붓는다. 이렇게 권커니 잡거니 해 가면서 거뜬히 술 한 독을 비워버리고서는, 옷을 털고 일어나서 친구집 하인에게 빈 독을 지워 보내고, 자기는 흥겹게 시를 읊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선조들의 풍류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옛 이야기요 풍류라지만 선듯 수긍하기 어려운, 이것이 술의 풍류라니…

이어 소개된 일본식 풍류란, 걸식을 해 가면서 유랑하는 나그네가, 갈 곳을 장만하지 못한 채 산에서 밤을 맞았다. 수중에는 돈 한 푼 없고, 근처에 인가도 없는 산중에서, 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앉았노라니 보름달이 떠오른다. 달은 밝고 경치는 아름다워, 저절로 흥이 나건만, 수중에는 돈도 없고 한 잔 술도 없다. 흐르는 맑은 물을 표주박에 떠서 앞에 놓고서, “명월을 벗으로 삼고 흐르는 물을 술로 대신하여, 내 무릎을 장고삼아 이 밤을 즐겨 보노라.“하면서, 한잔 술(물)을 쑥 마시고는 술에 취해 가는 듯이 무릎을 치면서 노래를 읊은 것이다. 어떤 과객이 우연히 지나다가, 아름다운 노래 소리에 발길을 멈추고서 한참 보고 있으려니, 이 풍류객은 술 대신 물을 퍼 마시면서 주흥을 못 이겨 즐기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과객은 인가 있는 데로 와서, 술 한 병을 사서 심부름꾼에게, 홀로 노래하고 있는 풍류객에게 갖다 주라고 하면서 이름도 안 밝힌 채 가버리는 것이었다. 일본식이란다.

그럼 중국 얘기로는, 죽림 칠현사의 한 사람인 劉怜은 어찌나 술을 좋와하는지, 가끔 자기집 하인에게 술 한 독과 괭이 한 자루를 지워서 자기 뒤를 따르게 하고는, 마음 내키는대로, 발 닿은 대로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거기다 술독을 나르게 하고는 술을 마시면서 즐기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괭이를 왜 가지고 왔느냐고 물으면, “내 일생을 술을 벗삼아 지내 왔거늘 내가 아무데서나 술에 취한 채 죽으면, 죽은 자리에 묻어 달라고 이렇게 무덤을 팔 괭이를 준비해 다닌다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중국인의 풍류란다.그러면서 요새 사람들이 술 마시는 걸 보면, 이런 풍류를 잊어버리고 그저 술을 마시기 위하여 술을 마시는 것 같이 강박적으로 조급하게 마시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글쎄, 술을 들면서 꼭 있지도 않는 허황된 짖거리를 하면서 술의 풍류라고 하는 것을 나는 수긍하고 싶지는 않다. 하기는 일본인의 풍류처럼, 중국 도연명의 현없는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즐기는 경지처럼, 술을 들지 못하면서 술 없이도 술의 정서를 누리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꽃밭에 불을 놓을 수는 있어도, 시라도 읊으면서 술을 드는 그런 경지의 전혀 아닌 주제인 내가, 감히 술의 풍월을 이렇쿵 저렇쿵 얘기하는 꼴이라니! 주제넘는 짖을 또 저질렀나 싶다.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를 몰고온 세찬 바람에 집앞 느티나무잎이 자박 자박 사람의 발자욱소리처럼 계속 바삭거리는 만추야이다. 어떻든 지금 나는 風月之先生의 梅妻鶴子같은 풍월이나 고담준론이 아닌, 더욱이나 흔들며 야단법석을 떠는 요즘 젊은이들의 술자리가 아닌, 투박한 질항에 담긴 빛깔 고운 막걸리 한 잔이 그리운 가을밤이다. 달빛도 밝은 이 밤에 술잔을 기울이며 정다운 이와 함께 담소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하다.

응답 2개

  1. 김정미말하길

    김융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용답도서관 김현미의 벗 김정미 입니다.
    글 맛있게 잘 읽었습니다. 지난번 대림동 자연밥상에서 함께한 막걸리 생각이 나네요. 참 맛있었습니다. 건강하시지요?
    여름에 계획한 연천행이 무산되어 많이 섭섭했었는데 이렇게 글로라도 만나니 정말 좋습니다. 갑자기 추워져서 겨울 김장농사가 잘 안됐나 봅니다. 그래도 기운내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언제 또 뵐 수 있을까요…..

  2. 김융희말하길

    갑자기 닥친 추위로 지금 농작물은 대혼란입니다.
    나도 그 치닥거리로 경황망조중 보낸 원고, 지금 보니
    이저곳에 오자가..
    내리고를 나리고로, 고담준론이 고준담론으로…등.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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