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정경미의 시 5편

- 정경미

교정 보는 사람

양계장 직송계란이 이천원에 판매합니다. 창문을 닫으며 나도 모르게 양계장 직송 계란을 이천 원에 판매합니다. 비문에 개의치 않고 트럭에 모여들어 계란을 사가는 사람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왜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하는지. 띄어쓰기를 거부하는 문장을 바르게, 나는 잘못 고친다. 간신히 틀려 놓으면 컴퓨터가 띄어쓰기를 해버린다.
때로 글자들에서 한나절 옥상에 말린 이불, 구운 햇볕 냄새가 난다. 스르르 글자 속으로 스미면 부푸는 공기, 새들이 날아오르자 음악이 울려퍼젔다…… 퍼젔다? 음악이 멈추고 천장에 부딪쳐 떨어지는 새. ‘퍼젔다’ 를 ‘퍼졌다’ 로 고치고 나는 지붕에서 내려와 또 어디 허술하거나 어긋난 곳이 없나 둘러보고 그는 만나지 못한 채 그의 집을 나온다.
글자 밖으로 빠져나온 글자들로 붐비는 퇴근길. 녹색등이 고장난 횡단보도 앞에서 사람들은 기다린다. 빨간불이 잠시 꺼진다.

재봉사 K씨의 하루

그는 찢으면서 꿰맨다

눈 뜨면 손가락 발가락 수를 헤아려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K씨는 여러 개의 꿈을 동시에 꾼다 그것들은 대부분 기억나지 않지만 지난 밤, 첫 번째 꿈에서 그는 수영장엘 갔는데 폼 잡고 다이빙을 했는데 물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죽었어, 두 번째 꿈에서 친구가 그의 없는 머리통을 툭툭 치면서 웃었다

초식 동물의 눈빛 녹슨 이빨에서 방긋 피어나는 박하향, 잠깐 기다려

세 번째 꿈으로, 번쩍이는 무대복 입고 친구는 노래 부르러 들어갔다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겠으나 소나기 오는 곳 있겠다 게놈프로젝트 초안이 완성되었고 127 건의 교통사고로 어제 하루 2명이 죽었다 김정심씨는 자신도 장애인이면서 장애인들을 위해 10년간 봉사해 왔으며 프로야구 경기에서 두산이 현대를 9 : 3 으로 이겼다, 아침 먹으면서 K씨는 신문을 읽는다 라디오도 듣는다 라디오에서 친구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는 정확하고 성실하다 실수를 하거나 일을 제때 못한 적이 없다 겸손하기까지 해서 주위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믿고 호감을 느껴왔다 그가 참지 못 하는 단 한 가지는 평소와 다른 시간에 오줌이 마려운 것, 자신에게 격분하여 그는 화장실에 안 간다 필사적으로 일에만 몰두한다

혀 끝에서 핏줄을 한 올 뽑아 그는 바늘에 꿴다 비명을 동력으로 재봉틀은 돌아간다 고통이 격렬할수록 아름다운 무늬 하나의 옷이 완성될 때마다 올이 다 풀려 그는 사라진다 끝없이 그는 다시 생산되고 신성하고 맹목적인 이 노동에 대해 그는 깊이 생각해볼 틈이 없다

화장은 일종의 부적이죠 고대인들이나 요즘도 아프리카 사람들은 온몸에 색칠을 해서 잡귀를 쫓는다잖아요 퇴근 무렵 루즈가 지워질 쯤이면 눈썹이 덜컹거려요 털난 푸른 손이 몸을 뚫고 나올 것 같아요 지신을 밟듯 그럴 땐 분으로 얼굴을 단단히 눌러줘야 해요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을 걸어나가는 뾰족하고 굽 높은 샌들, 싱싱한 그녀의 분홍 뒤꿈치 깨물고 싶다 생각한 적 있다 하지만 K씨와 헤어지고 그녀는 곧 아랍인과 결혼한다 피부 관리를 위해 요즘 그녀는 저녁마다 난초 목욕을 한다 치약을 골고루 얼굴에 펴 바르고 잔다 그때

그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새까맣게, 심장에 박혀 있던 불탄 씨앗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순간 지중해변의 해바라기 한 송이 목이 꺾였고 그는 눈물을, 그런데 눈물은 흐르지 않고 맺혀 있기만 했다 굳어져 갔다 질긴 고무 같은 그것을 급기야 옆집 노인이 쇠톱으로 잘라 주어야 했다

너와 함께 갈 때
나는 반대쪽으로 가고 있는 거야

얼마나 걸었을까 비가 왔어 저승에서 뻗쳐 오는 치렁치렁한 네 머리칼 내 목을 감아 조르고 설탕의 방을 지나 흰그늘 테라스에서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어 어느새 맑게 개인 여름 밤하늘 왕궁에서 쏘아 올린 불꽃을 쳐다보며 사람들은 병을 깨고 서로의 팔뚝에다 사랑해 사랑해 속삭였어

K씨의 마지막 일과는 비디오 시청 오늘 그가 빌린 테잎은 동물들의 생태에 관한 다큐멘터리이다

뒤엉킨 뱀 두 마리, 어느 순간 한 마리의 아가리 속으로 다른 한 마리 미끄러져 들어간다 대가리 몸통 꼬리…… 씹어 먹힌다 천천히 사라진다 너무 황홀해 그는

숨이 막혔다 입에서 혀가 넘쳐 목구멍을 막았다 얼음을 꺼내려 냉동고를 열자 숨바꼭질하다 도대체 어디 간 거냐고 백발이 성성한 아이들이 소리쳤다 삼천 년 동안이나 찾아다녔다고 이번엔 네가 술래라고 흩어지며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충치

날카로운 초침 소리 거울 속에서 한 움큼씩 머리칼이 잘려나가고 그 날 오빠는 사진의 제 얼굴을 도려내고 있었다 어둠을 타고 흐르는 전류 e-mail이 왔지만 먼 혹성의 언어 끊임없이 누군가 메시지를 전송하고 그때마다 감전된 물고기 배를 뒤집고 어항에서 떠오르기도 하는 지금은 수심 이천 미터의 바닷속 티브이 혼자 파랗게 발광한다 플러그를 뽑지 마, 몰려온다 들소떼 천둥소리로 온몸을 밟고 지나간다 안테나를 움직여 봐 납작하게 짓눌린 화면에 자욱이 먼지 붉은 흙먼지 가라앉으면 랄랄라 일몰의 지평선으로 소풍 간다네 단란한 가족의 한 때 차창 밖으로 집어던지자 까르르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이들 우리는 거인의 귓속에 끓는 참기름을 부으러 가요 말하면 죽는 동굴에 거인의 탈색된 눈동자 야옹, 찢어진 쓰레기봉투에서 썩은 내장이 쏟아진다 스포이드로 정확히 세 방울 쓸개즙에 사과주를 섞어 화분에 부었더니 모란이 피었다 강철로 된 그 꽃잎, 플러그를 뽑지 마 생나무 매운 향기 속 지금 그가 오고 있다

아라베스크

낡은 구두의 주름살 장님의 지팡이 아침을 뜨개질하는 새소리 따라갑니다 골목에 은은히 배어 있던 쓰레기 썩은 즙 냄새는 얼어붙었습니다 꼭지를 틀면 햇살이 쏟아지는 풀밭이에요 고호의 귀 한 쪽이 떨어져 있네요 너무 오랫동안 허공에 입맞추어 입술이 다 지워졌어요 아무리 문을 열고 들어가도 바깥이에요 비닐 치마에 얼굴을 묻고 흐느낍니다 그때 하늘에서 밧줄 하나 내려옵니다 목을 걸자마자 밧줄은 끊어집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매달렸던 그 밧줄 이제 너무 닳아 쓸 수가 없구나 튼튼한 밧줄을 찾아 헤매느라 아직도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데요 볕이 무거워 점점 등이 구부러집니다 빙판을 뛰어가는 하이힐 박자에 맞추어 집집마다 찌개는 끓어넘치고 얼음꽃 무늬 심장이에요 들리나요 등 깊은 어둠 속으로 울려퍼지는 음악을 따라 간간이 판 긁히는 소리 서로의 얼굴에 활짝 핀 곰팡이 뜯어주며 시침 위에 분침이 수줍게 포개집니다

도레미파솔라, 할 때의 라 말고
솔파미레도시라, 할 때의 라

내려가는 물의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은빛 바늘을
나는 삼켰다

응답 1개

  1. 찬영말하길

    선생님… 저는 시를 잘 모르지만…
    선생님 시를 읽고 나니까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마음이 막 울렁거리네요.
    그러면서 선생님의 다른 시도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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