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농사 일지 7

- 김융희

지금은 수확의 계절이다.

자연은 변화한다. 시간은 계속 흐르며,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한다. 동토에 트인 새 싻이 성장을 거듭하여 드디어 결실의 계절이 되었다. 자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영겁을 지속하고 있지만, 계속된 무더위에 비의 횟수가 좀 길고 잦으면, 서둘러 조금만 빨리 얼음이 얼고 첫 눈이 내리기라도 하면, 이상 기후라며 호들갑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사위를 둘러봐도 흐르는 시간에 계절의 변화는 어김이 없다. 있다면 우리들 기억의 착각이요, 마음안에 조급함이 있을 뿐이다.

팔월이 지나고 구월이 되었지만, 늦더위는 여전하여 기승을 피우는데, 그렇게도 몹시 나를 괴롭혔던 모기들은 뒷걸음질로 슬금 슬금 사라졌고, 시월이 되면서 결실을 맺은 작물들이 익어가고 있다. 빨간 고추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요란스럽다. 맑은 창공을 가로질러 기러기떼가 지나면서 질러덴 소리가 그리 요란스러운 것이다. 마치 그동안의 안부와 더불어 돌아와 반기는 환호의 인사처럼 즐거운 소란이다. 기럭 기럭의 한가로운 기러기 노래가 아닌 찌륵 끼르륵 찌끼륵데는 소리는, 마치 사열중 구호처럼 들렸고, 인사를 치루는 의식 같았다. 허리를 펴고 모처럼 쳐다본 하늘은 참 높고 푸르렀다. 나는 그들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랬더니 맨 뒤엣 놈이 항오를 이탈하여 내 머리위에서 한 바퀴 선회를 하지 않는가. 알아 들었는지, 답례이 듯, 나의 아전인수요,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풍성한 결실의 황금 들녘은 컴바인 소리와 함께 꽉찬 공간이 자꾸만 비워져 쓸쓸해지고 있다. 무성하게 치솟았던 오이 줄기는 벌써 말라 버렸고, 벼에 이어 깨와 들깨, 콩과 팥도 걷혀가고 있다. 그런데 시월의 중순을 맞아 뜬금없이 몰아 닦친 한파에 영하의 날씨로 서리는 물론 꽁꽁 얼음이 얼었다. 가을 햇살로 아직도 고온에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지만, 머잖아 서리가 내리리란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잘 여문 결실이 척척 걷히고 있는 들판에 갑작스런 한파의 피해는 정말 처참했다. 밤에 내리는 이슬이 얼어 변한 서리에도 견디기에 힘겨운 농작물들이 갑작스런 한파로 완전 파죽음으로 초토화됐다. 농작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거의 모든 생물들에게는 말그데로 치명타였다. 늦장을 부린 여치와 같은 곤충들, 개구리가 얼어 죽었고, 심지어 땅속의 지렁이들도 운신의 부동이다.

북쪽에 위치하면서 비교적 오염이 적은 때문인지, 우리 지역의 은행나무 단풍은 정말이지 맑고 고와 아름답다. 코스모스가 어울어져 하늘거리는 곧게 뻣는 들판길을 제법 년륜도 있는 잘 생긴 은행나무들이 곱게 물들이고 있는 가을의 정경은 자랑거리로 손색이 없었다. 더구나 올해는 가을의 명소로 만든다며, 우리 군에서는 27km나 되는 도로변에 코스모스를 심어 관리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한파로 코스모스는 물론 은행잎도 모두 얼어 검게 변한 모습이란 아름답기는 커녕 참으로 몰골이 비참하다. 이처럼 얼어 말라 검게 변해버린 은행잎을 보는 것은 내 초유의 경험이다.

이번 한파에 아쉬운 잃어버린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였다. 농약도 치지 않았고, 그렇게도 부드럽고 싱싱했던 고춧잎이며 호박잎, 늦 상추, 들깻닢등. 특히 무우와 배추, 몇 개가 안된 배추는 좀 덜하지만, 무우는 아직 밑도 들지 않는 것들이 잎사귀와 함께 얼어 문드러져 버렸다. 무배추는 금년내내 나를 그토록 괴롭히더니 끝내는 이꼴이 되어 나를 떠나고 말았다. 호박이란 놈들도 얄밉다. 언제까지나 지낼 것 같은 생각에선지, 여름내내 개으름을 피우며 열매는 물론 꽃도 잘 안 피우더니, 부랴 가을이라며 시월이 되면서야 마구 꽃을 피우고 파죽지세로 열매를 맺더니 갑작스레 닦친 한파에 여지없이 망가진 꼴이 처참하다. 미리 좀 열리지 않고 늦게 열려 포도 송이처럼 매달려 검게 변해버린 호박신세가 머리만 굴린 인간처럼 얄밉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이런 일들이란 일시적인 현상일 뿐, 자연은 역시 변함없이 정직하다. 잡초 속에서 녹아 없어진 줄로 알았던 고구마의 줄기가 몇 개 보여 캐어 보았더니 밑이 탐스럽게 들어있다. 비록 한 자루가 한 바가지로 양만 바뀌었을뿐이다. 잡초에 묻힌 콩도 베어 봤더니, 역시 몇 차례의 콩밥을 지어 먹겠다. 고추 가지도, 호박잎 들깻잎도, 모두들 녹아 없어졌지만, 그건 한파탓이 아닌, 나의 금방은 아니겠지란 안일한 생각의 구실이요 태만이었다. 서서히 수확의 계절은 끝나고 있다. 텅 빈 저 들판처럼, 나의 장포처럼, 이제는 소생의 계절인 봄을 기대리면서 마음을 비워야 한다. 마음을 비우려니, 아직도 좀더 전했으면 싶은 많은 주위가 떠오르며, 그동안 더 보내드리지 못했던 아쉬움에 마음이 허허롭고 허전하다. 또 한 해를 보낸다는 세월의 아쉬움도 크다. 가는 시간이 아쉬워 빠른 시간이란 말을 쓰지 않으려 한사코 바쁘다고만 표현해왔던 터, 그러면서도 또 소생의 계절을 기다리면서 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게 된다. 구워 먹을 고구마도, 깎아 먹을 무우도 귀한 올 겨울을 보내려니 겨울이 더 길 것만 같다. 나이 듦의 맘보인가? 순환의 시간이면 좋으련만! 흐르는 세월은 없어지고 순환의 계절만 있었으면 싶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과 함께 땀을 흘리며 지천의 먹거리를 포장했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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