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채무자에게 임금을

- 정군(그린비출판사)

진정한 욕망이 축제 속에서, 즉 유희적 긍정과 파괴의 포틀라취 속에서 빨리도 표현되었다. 상품을 파괴한 인간은 상품에 대한 인간적 우위를 보여주였다. 그는 자기 욕구의 이미지에 달라붙은 추상적 형태에 더 이상 붙잡혀 있지 않다. 소비에서 소진으로의 이행이 왓트의 불길 속에서 표현되었다.
「스펙타클 = 상품 경제의 쇠퇴와 붕괴」(『국제 상황주의자』제10호)

 1965년 8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왓트 지구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인용된 문장은 상황주의자가 그 폭동을 분석한 내용이다. 당시 그 폭동은 자주 인종문제로 다뤄졌다. 그러나 상황주의자는 상품세계의 거부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슈퍼마켓을 습격하고 상품을 약탈하는 가난한 자. 강탈한 물품을 필요에 따라 나누는 상호부조. 파괴된 슈퍼마켓의 인출기에서 돈을 꺼내고 걷어차며 노는 아이들. 전기도 안 통하는 집에 냉장고나 텔레비전을 가져가 환희하는 젊은이들. 분명 인종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세상은 일하고 출세하면 고급 상품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살 수 있는지 여부가 사람의 위계를 가늠하는 척도다. 그러나 일단 빈곤에 떨어진 인간은 아무리 일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게 태반이다. 따라서 “조금만 참아라. 상품을 살 때까지 힘내서 일하자”는 언설은 사실상 불합리하다. 대체 인간을 재는 척도가 소비라니 어찌된 일인가. 인간은 상품보다 위대하다. 살 수 없는 것이라면 걷어차 버리면 그만이다. 어느 쪽이 주인인지 확실히 해두자. 이쯤 되면 폭동의 의미가 드러난다.
 최근 젊은 세대가 기업의 유리창을 깨고 차에 불붙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반세계화 항의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같은 광경을 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제 한국에서 G20서미트가 개최되는데, 상품세계를 거부하려면 상황주의자의 시점은 지금의 운동을 생각할 때도 분명 참고가 될 것이다.
G20서미트의 특징에 좀 더 천착해보자. G20서미트는 2008년부터 세계의 금융위기가 심각해지자 개최된 20개국의 수뇌 회합이다. 중심 의제는 금융 문제다. 방만한 금융를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 논의되고 있지만, 달리 말하자면 금융자본에 기대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안정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일부 반세계화 단체들도 금융의 문제는 실물 경제와 괴리된 지나친 금융거래에 있다며, 그것을 규제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G20서미트의 하한선에 불과하다. 문제는 다른 위상에 있다.
 금융은 노동의 장래적 가치를 나타낸다. 투자가는 끊임없는 정보의 교환을 통해 금융상품에 담긴 장래의 가치를 예측하고 이윤을 산출한다. 물론 금융이 상품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비물질적인 재(財)를 교환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제적(擬制的) 생산이 아니라 현재 인지자본주의의 생산 자체가 그러하다. 지식과 정보 같은 인간의 인지능력이 생산의 원동력이며 상품이 된다.
구글이 전형적이다. 사이트의 이용자는 그저 정보를 검색할 뿐이지만, 기업광고를 클릭하면 어느새 구글에 이윤이 쌓인다. 인간의 일상적 정보교환을 상품화하여 거기서 사적소유권이 발생한다. 인지자본주의는 지불되지 않는 무수한 활동으로 돌아간다.
 금융화는 바로 인지자본주의의 권력을 가장 명확히 보여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일부의 전문가만이 아니라 중산계급도 금융화에 빨려들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오늘날에는 아무것도 갖지 않은 빈자의 삶마저 삼키려 들고 있다. 그 일례가 서브프라임론이다. 얼마간 가난해도 주택융자를 받을 수 있다. 왜 그런 융자가 허용되는가. 바로 리스크가 높으면 이율이 높은 금융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융자가 세계공황을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빈자가 주택에서 내쫓긴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빈자는 금융화로 인해 무엇을 빼앗겼던가. 주택만이 아니다. 융자를 받아 상상력을 빼앗겼다. 애초 빈자들은 쾌적한 장소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 바람을 실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사회적 권리로서 공공주택을 구할 수도 있었고, 빈 집이 있다면 스퀏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융자를 받은 빈자는 마이 홈을 구입하는 데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자기실현의 수단은 이미 상품세계의 감옥 속에만 있다. 부자는 빈자가 마음속으로 그려온 미래 생활의 이미지를, 달리 표현하면 인지능력을 금융상품으로 사적소유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윤을 챙기고 있다. 그 동안 빈자는 마이 홈을 자명한 것으로 여겨 융자의 변제를 강요당하며 노동의 지옥으로 내쳐졌다.
현재 금융화의 움직임을 보건대 주택융자만이 아니라 학자금 대출, 자동차 융자, 신용 융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금융화는 인간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다. 상품세계가 달라붙은 인간의 사고를 해방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처음에 인용한 상황주의자의 글귀를 떠올려 보자. 상품세계의 거부. 폭동과 기업 습격은 어디까지나 한 가지 수단일 뿐이다. 지금 당장은 금융화에 기댄 상품세계를 내파하기 위한 기초적 사실만을 언급해두자. 빚지고 있는 빈자는 그만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 빚은 모르는 동안에 운용되어 믿을 수 없는 액수의 이윤을 산출하고 있다. 빈자는 빚을 내어가며 무의식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채무자에게 임금을! 그게 아니라면 모든 빚은 즉각 없던 일로 해야 한다.
빚을 짊어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말한다.
채무자의 봉기를 일으키자. 빌린 것은 받은 것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