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여기서 꿈을 심을 수는 없을까?

- 풍경지기 박혜숙

풍경지기의 책이야기 17

『꿈이 있는 공동체 학교』, 윤구병, 휴머니스트

예전 선배교사의 소개로 『고함쟁이 엄마』(유타 바우어 지음, 이현정 옮김, 비룡소) 라는 그림책을 본 적이 있다. 엄마가 소리를 지르자 주인공 아기 펭귄의 머리는 우주로, 몸은 바다로 날아가 버린다. 아기 펭귄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부리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어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고, 훨훨 날고 싶지만 두 날개가 밀림 속으로 사라져버려 날 수가 없다. 뒤늦게 엄마 펭귄은 아기 펭귄의 몸을 모아 꿰맨다. 그리고 말한다.

“아가야, 미안해.”

이 책을 내게 소개해준 선배교사는 학년 초 학부모간담회에 오신 학부모에게 이 그림책을 읽어주었다고 했다. 자신은 최소한 이런 교사는 되지 않겠노라고 말했고 어머니 몇 분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아이에게 했던 잘못이라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자, 오늘은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자. 운동장에 종이를 들고 있는 윤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최시한 지음, 문학과 지성사)에 실린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소설 작품을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먼저 제시한 후 출석 번호를 불렀다. 한 아이가 일어났다. 그저 서 있기만 했다. 토론수업을 위해 좌석 배치를 디귿자 형태로 했기 때문에 교실 가운데 빈 공간이 있었다. 그 아이를 교실 가운데 빈 공간에 나와서 앉게 했다. 다시 다른 출석 번호를 불렀다. 아이가 일어났다. 나는 아이에게 뭔가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아이는 교실 가운데 공간으로 나와 친구 옆에 앉았다. 그 동안 한 아이는 그날도 역시 졸고 있었다. 잠을 깨우기 위해 이름을 불렀다. 무표정한, 조그마한 힘조차 없는 표정으로 눈을 떴다. 또다른 번호를 불렀다. 이 아이도 역시, 일어서자마자 교실
가운데로 나와 친구 옆에 앉았다.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려는 시도만이 아니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아이들이 줄을 이었다.

올해 국어 수업을 담당한 열 개 학급 중 가장 수업하기 힘든 반이었다. 여학생반 수업시간과는 풍경이 너무나 달랐다. 우리 학교는 남녀공학이다. 1학년은 여학생과 남학생이 별도 학급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여학생에 비해 남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 학급은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분위기가 학급 전체 분위기를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그날 학급 전체 인원의 70% 정도가 발표를 못하거나 아예 발표를 포기하고 교실 가운데로 나왔다. 나는 아이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생각보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 가운데에 앉아 있는 이 아이들이 바로 아기 펭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학급에 들어오는 교사마다 이런 수업분위기를 언급하며 아이들을 꾸짖었을 것이다. 꾸짖음이 하루 하루 쌓여가며 부리도, 날개도, 다리도 멀리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소리를 지를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엄마 펭귄은 뒤늦게라도 아기 펭귄의 날아가 버린 몸을 꿰매면서 미안하다고 눈물어린 사과를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학부모는 아직 아이들의 날개가 사라져버려 날지 못하고 부리가 날아가버려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런 현실을 윤구병 선생은 『꿈이 있는 공동체 학교』(휴머니스트)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미쳤다. 온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아이들이 살아 있는 ‘미라’로, ‘강시’로 ‘좀비’로 바뀌고 있는데도 아무도 이 아이들을 살릴 생각이 없다.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교육이란 게 별게 아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보살피는 일, 제 손발 놀리고 제 몸 놀려 먹고, 입고, 자는 나날의 삶을 알차게 꾸려가는 일, 제 손발 놀리고 제 몸 놀려 먹고, 입고, 자는 나날의 삶을 알차게 꾸려가는 길을 열어주는 일, 사람 새끼는 혼자 살 수 없으니까 이웃과 함께 서로 도와가면서 오순도순 살 수 있게 너른 마당을 마련하고 튼튼한 울타리를 둘러주는 일, 나아가 모든 목숨 지닌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삶을 잔치로 바꾸는 놀음을 거드는 것이 교육이 맡은 일이고, 교육자가 할 일이다.
그런데 지금 온 세상 교육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아이들에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기르는 일은 뒷전에 두고, 남의 몫을 가로채는 법, 남에게 기대 사는 법, 몸 놀리고 손발 놀려 살길을 여는 게 아니라 잔머리 굴려서 불쏘시개감도 못 되는 돈만 산더미처럼 쌓아올리는 게 유일한 꿈이라고 여겨 주식시장, 증권시장 같은 도박판을 기웃거리면서 마지막에는 패가망신하는 노름꾼이 되는 법……들만 가르치고 있다. 하루에 열 시간이 넘게 딱딱한 걸상에 궁둥이를 붙이고는 살아가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대학입시용 교과서만 달달 외우게 밤낮으로 몰아대고 있으니, 이게 무슨 학교 선생이 할 짓이고, 부모가 할 짓인가. 짐승도 비록 남의 새끼일망정 이렇게 모진 학대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랑의 이름으로, 교육의 이름으로, 위에서는 대통령, 수상이라는 연놈들부터 아래로는 어중이 떠중이 놈년들까지 모두 한통속이 되어 아이들을 집단으로 학대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집단 학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 윤구병,『꿈이 있는 공동체 학교』 머리말, 휴머니스트

지금까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이들을 서서히 옥죄고 생각과 의지를 죽여가는 것. 그러면서도 수업시간이면 좀비가 된 아이들을 붙들고 왜 잠만 자느냐고 야단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윤구병 선생은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변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있다. 그리고 현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삶터와 일터, 배움터가 하나인 공동체 학교’를 꾸리고 있다. 선생은 도시와 농촌의 삶을 비교한다. 지금의 도시는 자연의 순환이 멈춘 곳이며 자신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빠져버린 곳이다. 도시가 살아남기 위해서 농촌을 착취하고 수탈한다. 도시는 도시 주변의 생산 공동체를 볼모로 제국주의 팽창 정책처럼 생산 공동체를 흡수하려고 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삶은 감각기관이 마비되고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생각의 깊이가 얕아지며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자연을 존중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생은 농촌에서 자연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삶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선생은 이런 제안을 한다.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곳이 농촌이다. 자연이 큰 선생이 되고 사람이 작은 선생이 되어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감각을 일과 놀이와 학습에 효과적으로 통합해야 한다. 그리고 끼리끼리 어울리게 해야 하고, 자유롭게 느낌과 생각을 드러내도록 부추겨주어야 한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건강한 파괴자’가 될 수 있다. 선생은 ‘나쁜 사회를 망가지지 않게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학교교육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쁜 사회를 나쁘다고 여길 수 있는 머리를 가진, 비판의식에 충만한 파괴자로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진실이 아닌 것을 거부하고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찾아내어 땀 흘려 만들어내는 창조와 건설의 힘을 가진 아이로 기를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준비해간 공기 다섯 알을 꺼냈다. 어제 문구점에 들렀을 때 이 공기 다섯 알이 눈에 들어왔다. 수업시간에 공기놀이를 하면 졸고 있는 아이들을 깨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발표를 하지 못해 교실 가운데 나와 있는 아이들에게 ‘이 공기를 던져 한꺼번에 4개 이상을 잡는 사람’은 벌에서 제외시켜준다고 했다. 아무런 반응 없이 멍하게 앉아있던 아이들의 눈에서 갑자기 빛이 났다. 멀찍이 앉아있던 아이들이 공기놀이하는 친구를 보기 위해 가까이 몰려들었다. 한 명씩 공기를 던질 때마다 환호성과 탄성이 뒤섞였다.
‘이렇게 살아있는 아이들인데 나는 하루하루 죄를 짓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아이들이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수업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원망도 해보았다.

수능 등급 잘 받는 걸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성적이 살아가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너희들처럼 뭔가를 하겠다는 의지,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려는 의지조차 갖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운운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게 울림을 가지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처받은 아기 펭귄에게 엄마 펭귄은 사과를 했다. 이것은 아기 펭귄에게 손을 내밀고 아기 펭귄의 상처를 따뜻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이제 이 아이들이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 손을 내밀어 봐야겠다. 그리고 이 아이들과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궁리를 해봐야겠다. 아이들의 살아있는 눈빛을 보았으니 뭔가 길을 찾을 수 있을 게다.

응답 1개

  1. tjsal말하길

    나는 하루하루 죄를 짓고 있었구나.. 다들 하는 생각이 아닐까요. 교실에서 흐린 눈빛의 아이들을 체육대회나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볼 때면 느끼는 마음들… 눈부시게 빛나는 표정, 웃음들. 눈빛을 흐리게 하는 수업이라면 수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요즘엔 학교선생님들 표정도 눈빛도 흐려지는 듯해요. 지쳐서 찌들어서 흐려지는 눈빛을 매일매일을 살아내는 사람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들에게도 농촌이 대안일까요? 도시에서 꿈꾸고 이루기… 소비를 넘어서 주체로 살아가기… 가능할까요? 이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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