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공방 통신

영화 <바베트의 만찬>을 보고

- 제비꽃달팽이

음식영화에 꽂혔던 것은 일본영화 <카모메식당>을 보고서부터다. 이이지마 나미 카모메식당을 계기로 영화 음식전문연출가가 된 그녀는 카모메식당 외에도 안경, 도쿄타워, 남극의 쉐프, 드라마 심야식당, 카모메식당과 같은 감독이 만들었고 12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토이렛 등에서 음식 연출을 맡았다. 그간 일했던 영화와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음식의 레시피를 담은 책도 두 권 냈는데 역시나 별 내용이 없었다. 빌려보길 잘했다.

라는 푸드스타일리스트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속 일본 가정요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단 그 카와이함과 먹음직스러움에 반하게 만든다. (포털사이트에 이 영화 제목을 치면 영화에 등장한 음식을 손수 만든 인증샷이 담긴 블로그들이 함께 뜬다) 영화 속 인물들의 서먹한 관계는 음식을 함께 나누는 사이 마법처럼 훈훈해 진다. <카모메식당>은 오타쿠스럽고 경쟁구도를 가지고 있는 일본 음식만화들 예컨대 먹짱, 미스터초밥왕, 따끈따끈 베이커리, 어시장만 삼대째가 주는 것과는 다르게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음식과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소소한 일상에 대한 판타지를 주는 영화다. 이와 비슷한 영화로는 같은 감독이 만든 <안경>, <남극의 쉐프>같은 영화가 있고, 최근에 6권이 나온 만화 <심야식당>에 나오는 음식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카모메식당>과 그 궤를 함께 하고 있다.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고, 이러한 이유로 좋아하게 된 음식영화들 중 최근에 다시 본 <바베트의 만찬>에 대한 것이다.

잠깐 취직했었던 환경운동을 하는 잡지사를 그만둔 뒤로 생각과 삶에 변화가 생겼다. 음식에 관한 부분에서 보자면 생각의 변화는 자연을 생각하는 마음과 내 몸이 건강한 음식도 좋지만 맛과 모양 또한 중요하다는 것, 삶의 변화로는 예전만큼 열심히 내 손으로 요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잡지사에서의 경험 – 에너지 절약을 위해 선풍기는 되지만 에어컨은 되지 않은 3층 옥탑 사무실에서 보낸 7월 – 에 대한 반작용도 있지만, 더 실질적인 계기는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게 된 데에 있다. 올해 3월만 해도 빵을 구워서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었는데 지금은 공부로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다보니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아님에도 집에서든 연구실에서든 주방으로는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 그래도 하던 가닥이 있어 그런지 맛있는 요리가 나오는 TV프로그램이나 영화, 요리책, 82cook 키친토크 등을 열심히 보게 되는 요즘이라 자연스레 책상 한 켠에 있는 <바베트의 만찬> DVD쪽으로 손이 가게 되었다.

(스포일러 가득!)

이 영화는 1987년에 덴마크에서 만들어진 영화인데, <카모메식당>의 시초격인 영화다.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작은 마을에 마니타와 필리파, 두자매가 살고 있다. 이 자매의 아버지는 마을의 목사이자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마을 사람들을 잘 지도했다. 자매는 미모도 뛰어나고 성품도 고와 마을 청년들은 물론 마을 밖에서 여행이나 요양을 온 남자손님들도 자매에게 반하곤 했다. 하지만 자매의 아버지는 자신의 목회에 두 자매를 오른팔과 왼팔로 삼았고, 자매 또한 그것을 기쁘게 받아 들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결혼을 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돌보며 자매는 나이를 먹어 어느새 노년을 맞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매의 집으로 중년의 여인이 찾아온다. 그녀가 가지고 온 편지에는 그녀의 사정이 적혀 있었다. 예전에 이 마을에 머물며 자매 중 한 명에게 반했던 남자의 편지였다. 편지에는 ‘이 여인의 이름은 바베트인데 내전 통에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은 불쌍한 처지다. 덴마크에서 살고 싶어 하는데 떠오르는 건 당신뿐이어서 이렇게 부탁을 한다.’ 는 내용이 있었고 바베트는 이 자매와 함께 살게 된다. 바베트는 사람들을 돕고 사는 두 자매를 위해, 아버지를 뒷바라지 했던 자매처럼, 알뜰하게 살림을 살았다. 바베트가 유일하게 프랑스와 이어져 있었던 끈은 복권이었는데 1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복권이 당첨되었다. 바베트는 복권 당첨금으로 100만 프랑을 받게 되었고, 자매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프랑스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며칠 뒤 돌아가신 목사님의 생일을 기리는 마을 파티가 있었는데 바베트는 그 파티 때 자신이 저녁 만찬을 준비하고 싶다했다. 자매는 이를 허락했고 바베트는 재료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범상치 않은 것들이었다. 살아 있는 메추라기, 자라에서부터 1m도 넘어 보이는 얼음, 소 혹은 양처럼 보이는 동물 등. 이를 본 마을 사람들과 자매는 바베트에게 요리를 하라고 허락한 것을 후회하고, 파티 날 밤 음식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 다짐한다. 하지만 거북이수프를 시작으로 나오는 화려하고 맛있는 음식들과 전채용, 본 코스용, 후식용으로 바뀌어가며 나오는 와인으로 사람들은 점점 무장해제 되어간다. 사실 바베트는 프랑스에 있을 때 유명한 레스토랑인 ‘까페 옹글레’의 수석 셰프였던 것이다! 저녁 시간이 무르익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풀어지기 시작한다.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사람들 사이에 있던 사소하거나 혹은 깊은 갈등들을 터놓고 마술처럼 화해에 이른다.

영화가 끝났다. 영화를 다 보고나면 기분이 좋아 질 거라 생각했는데 별로 그렇지가 않았다. 예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때에는 이 아름답고 화려한 음식들과 와인들을 보느라, 그것들을 먹고 발그레 취해가는 인물들의 얼굴을 보느라, 맛을 상상하고 인물들과 같이 기분 좋게 취하며 마음이 누그러졌었다. 그런데 이번에 영화를 볼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는 주방에서 바베트가 땀 흘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나의 초라한 텝스 성적이 떠올랐고, 일을 그만둔 후 많이 벌려만 놓고 수습이 잘 안 되는 세미나들이 떠올랐다.

예전에 식빵 만들기에 처음 성공했을 때에도 무려 다섯 번이나 실패한 끝에야 반죽을 얼마나 치대야 하는지, 어떤 온도에서 어느 정도 발효해야 하는지 등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또한 식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죽 발효 성형 발효 굽기>까지 적어도 네 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바베트가 그렇게 엄청난 요리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주방에서 그렇게 땀 흘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요리를 개발하는데 들인 시간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무엇보다 내게 필요한 시간이 그런 시간이다.

아아, <바베트의 만찬>을 보고 이런 고3 수험생 같은 생각을 하고 말다니ㅠㅠ 하지만 요즘 열심히 읽고 있는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님도 그런 이야길 했다. 탈주는 하다 말면 안 하느니만 못 한 것이라고. 탈영토화 한 것에서 더 나아가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시키는 재영토화가 필요하다고. 월동 준비하는지 잠은 점점 많아지고 벌려놓은 세미나들 책 읽기도 벅찬 내 모습을 본다. 좀 더 열심히, 집중력 있게 시간들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

덧, 요즘 수유너머N과 달팽이공방에서 바베트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은 유선언니다.(뭐 내가언제 바베트 같았던 건 아니지만) 질 좋고 맛있는 재료들로 멋진 빵을 구워 사람들에게 팍팍 나누어 주는 바베트뉴! 언니는 본인이 즐거워서 빵 굽고 커피 볶고 하지만, 달팽이공방 일들을 열심히 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입장으로선 유선언니가 바베트가 되어줘서 무척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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