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환대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코미디 <방가?방가!>

- 황진미

최근작 <방가?방가!>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코미디의 형식에 담은 영화이다. 이주노동자 문제를 코미디로 풀다니, 인종적 혐오와 차별 같은 심각한 문제를 가볍게 희화화시킨 것은 아니냐는 우려가 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묵직한 사회고발의 측면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따뜻한 정서와 발랄한 재미를 고루 갖추고 있다.

소수자 위장? 위장취업?

영화는 <보랏>처럼 소수자가 아닌 사람이 소수자를 위장하는 전술을 구사한다. 그러나 <보랏>이 했던 것처럼 이러한 위장을 통해 소수자의 저열함을 드러내고 희화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간다. 바로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받는 차별에 공감하는 것이다. 예전 <개그 콘서트>에서 “사장님 나빠요…”라고 말하던 ‘블랑카’ 의 극영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희화화되는 것은 그릇된 편견과 배타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우리사회의 모습이다. 가령 취업이 되지 않아 부탄인 이주노동자로 변장한 채 살아가는 방가(김인권)에게 버스 안의 고등학생들이 시비를 걸 때, 방가가 유창한 한국어로 “니들 공부 열심히 해라. 안하면 나처럼 된다.” 라고 말할 때 희화화되는 것은 학생들의 되먹지 못한 인종차별적 시선이다. 영화는 방가를 통해 이주노동자들은 이상한 존재가 아니라, 단지 취업을 위해 국경을 넘은 노동자일 뿐이며, 취업이 어려운 88만원 세대의 입장에서 그들의 문제는 곧 ‘나, 우리’의 문제임을 역설한다.

양극화로 인한 박탈감과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국내 노동계급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착각에 파시즘적인 인종혐오에 빠질 수 있지만, 주인공은 그들과 공감하고 연대한다. 그것은 주인공이 그들의 입장, 아니 그들 중에서도 왕따 당하는 신참이라는 더욱 약자의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외국인 노동자로 위장하여 취업을 하고, 그들의 입장에 공감하고 대변하게 되는 설정은 언뜻 80년대 노동현장에 위장취업을 했던 운동권 대학생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이를테면 <그들도 우리처럼>). 하지만 80년대 대학생이 기득권 세력이었음에 반해, 21세기 청년백수는 우월적 입장에 놓여있지는 않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보다 내국인 노동자가 우월적 입장이긴 하지만, 주인공은 (아마도 ‘지잡대’ 출신으로) ‘내국인 노동자-되기’의 문턱에서 좌절된 사람으로, 취업의 걸림돌이 되는 ‘애매한 포지션’을 버리고, 궁여지책으로 외국인 노동자로 위장해서라도 취업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이는 소설<숲속의 방>에서 주인공의 언니가 대졸 여성으로 취직이 어려워지자 고졸 대우로 은행원으로 취직했던 상황이나, 60년대 코미디 영화 <서울은 여자를 좋아해>에서 남자가 여장을 하고 취직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차츰 진행하면서 그가 차별받는 이주노동자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는 현장 활동가처럼 되어 가는데, 이는 80년대 위장취업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무기가 된 욕과 정체성이 된 노래

영화 속에서 욕과 노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욕은 무기이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사빠티스타의 구호처럼, 말은 침묵을 강요당하는 하위주체가 주체로 인식되게끔 하는 강력한 표식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수행력과 힘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은 ‘욕’이다. 그들을 ‘말하는 주체’로 생각하지 못하고, 혹은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욕이나 비하를 퍼붓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한국어 욕으로 되받아쳤을 때, 비로소 그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 감정과 지성을 지니고 있으며 대등한 위치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방가는 그들에게 한국어 욕을 가르쳐주고, 그들은 농성을 하면서, 한국어 욕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노래 역시 그러하다. 영화에서 <찬찬찬>은 거리에서 투쟁 가요처럼 불리기도 하고, 출입국관리소에 갇힌 그들에 의해 불릴 때는 이들도 우리와 똑같은 정서를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운다. 관리소 직원하나는 그때 마음이 움직이는데, 이 장면은 다소 신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그 혐의가 벗겨진다. 자신들의 노래를 부르는 그들을 통하여 정작 마지막에 진짜 무대에 올랐을 때, 그들은 연습한 <찬찬찬>이 아니라, 즉석에서 그들 나라의 노래를 부른다. 영화는 카메라와 음악을 최대한 집중시켜, 영화 속 관객들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이들의 노래를 경이롭게 경청하게 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주제를 집약하고 있다. 이는 관객들에게 ‘저들도 한국인과 같다, <찬찬찬>을 저리도 잘 부르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은 저들의 나라와 문화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가지고 살 권리가 있다, 그들의 노래를 들을 귀를 열어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당신과 똑같이 봐달라는 동정과 시혜의 눈빛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래를 들을 귀를 지니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는 얼마 전까지 방송을 탔던 “김치를 사랑하는 한국인, 한강을 사랑하는 한국인” 운운하던 공익광고의 인식을 넘어선다. ‘완전히 한국인처럼 동화되면, 당신을 한국인으로 인정해 줄 수도 있지’라는 말하는 인식을 넘어서, 그들의 문화와 존재에 대한 존엄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요컨대 <방가?방가!>는 이주노동자들의 ‘한국인-되기’를 경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이주노동자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진정한 ‘다문화’임을 일깨운다. 이는 타자를 그저 관용하자는 철학을 넘어서서 그들을 존중하고 환대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의 제목 ‘방가?방가!’ 역시 주인공 이름의 변용(한국인 방씨 성을 가진 자->부탄인 ‘방가’)이자, 반갑다는 뜻을 지닌 인터넷 신조어로 이러한 환대의 철학을 드러낸다.

이주노동자의 아이는?

이처럼 이주노동자들의 입장과 문제들을 예리하면서도 폭넓게 지적하는 <방가?방가!>는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베트남에서 온 이주노동자여성 장미를 사랑하게 된 방가는 그녀의 집에서 아들과 마주치자 깜짝 놀란다. 베트남인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적발되어 강제추방을 당하였고, 장미는 혼자 아들을 키우며 밖에서는 미혼인 척 하며 상사의 성희롱까지 참아왔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자신이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믿는다. 그는 베트남어를 모르며, 베트남에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 아들은 장미에게 자신에게 말거는 베트남인들에게 답하기 위해서라며 “나는 한국인입니다”를 베트남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묻는다. 장미는 아들에게 “나는 한국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의 베트남어를 그 말 인양 가르쳐준다. 베트남인이라는 차별의 이질성을 버리고, 아예 자신을 한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들에게 장미는 ‘베트남인으로서, 한국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인식하길 바라는 것이다. 즉 아들이 한국인이 아니라 베트남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베트남인으로서 한국인과 우애를 나누는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역지사지를 해보면 금방 답이 나오는 문제이다. 재일, 재미 교포 2세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을 때, 한국사회는 그것이 지조 있고,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칭찬한다. 반대로 그들이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자신이 미국인이나 일본인이라고 말할 때, 실망스러워한다.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 2세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사회는 이들을 한국인으로 법적인 인정을 하지 않고, 인종차별의 불이익을 주고 있으면서도, 이들이 최대한 한국인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을 기특하게 바라볼 뿐,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키려는 것을 인정하거나 돕지 않는다. 그러나 <방가?방가!>는 한국에서 나서 한국에서 자란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각자 모국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면서도 차별받지 않고 사는 것’을 더 바람직한 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내국인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의 차이는?

영화에서 방가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대단한 비밀인양 가져가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방기해 버린다. 일종의 맥거핀인 셈이다. 국적취득을 위하여 한국인과 결혼하기를 원하는 장미에게 방가가 사실은 한국인이라는 설정은 멜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비밀이다. 마치 <커피 프린스>에서 고은찬이 사실은 여자라는 비밀처럼. 영화는 이 비밀을 멜로의 코드로 뿐만 아니라 코미디의 코드로 적절히 활용하면서, 다른 의미도 담아낸다. 영화는 군데군데 주인공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누설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자신의 입으로 “나 한국인이야” 라고 말했다가 다시 “그러니까…같은 밥 먹고 같은 일하니까…우린 한국인” 이라고 고쳐 말한다. 또 결정적인 순간에 장미가 아들에게 (잘못)가르쳐 준 베트남어로 자신이 한국인임을 고백한다. “장미씨, 나…나는…한국을 사랑합니다” (“그래요? 그래서 뭐 어쩌라구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주민등록증을 발견한 외국인 노동자는 “너! 너!…..나도 이런 거 만들어줘!”라고 말한다. 그가 한국이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인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보고도 당연히 위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교란을 통해서 ‘대체 한국인이라는 게 뭔데?’하는 질문을 던진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일을 하면서도 차별을 받는 이유는 한국인이냐 아니냐 하는 규정 때문인데, 그것은 인간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한국인이라고 증명하는 종이 쪼가리에 있다. 그런데 그 종이 쪼가리도 사실 그 자체로 의미를 발산하지는 않으며, 그것이 놓여있는 사회적 맥락이 더 중요하다. 사실 내국인과 외국인의 차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대단히 임의적이며, 사회경제적 맥락에 의해 구성된다. 즉 자본의 필요에 의해 내국인과 외국인 노동자의 차별이 유지되는 것이다. 자본의 흐름이 자유로운 글로벌시대에 노동의 이주 역시 필연적이다. 세계화로 초토화된 국내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제3세계의 노동자들은 일자리와 임금격차로 쫓아 이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강요된 이주노동을 통해 송출국은 높은 실업률을 해결하는 한편, 유입국의 자본은 값싼 노동력을 확보함과 동시에 내국인들의 노동조건을 낮게 통제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주노동자들은 3D업종등 유입국의 경제에 반드시 필요한 노동을 제공함에도 차별은 의도적으로 유지된다. 영화는 내국인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가 자본의 통치방식의 일환으로 부과한 임의적 차별을 사이에 두고 반목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동질감을 회복하고 연대를 해나가는 것이 절실함을 일깨운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들이 공연장을 탈출하여 오토바이 타고 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이 장면은 아마도 판타지일 것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흩어져 버렸을 테고, 다시금 동일한 삶을 살 것이다. 미등록 이주민으로 쫓기고, 인간이하의 모욕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환대의 마음을 담아 ‘방가방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P.S 지난 10월 29일, 서울 가산동에서 토끼몰이 식 단속을 피하려다 추락사한 베트남 이주노동자 Trinh Cong Quan 씨의 명복을 빕니다. 2002년도에 입국하여 한국에서 결혼하였고, 4개월 된 딸을 둔 가장의 죽음을 애도하며, 유족을 위한 모금을 촉구합니다.

(모금계좌 : 외환은행 630-005152-051 아시아의 창)

응답 1개

  1. 퐁티말하길

    소문대로 좋은 영화군요. 꼭 봐야겠습니다. 한국인도 김장할 때 한복을 안 입는데 이주노동자는 한복 입히고 김장하는 공익광고를 찍는다고 하더라고요. 이상한 다문화에 경종을 울리는 영화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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