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인간의 불꽃 -『전태일 평전』을 읽고

- 오용택(수유너머남산)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비디오 대여점을 운영했었다. 가게 안팎에는 영화 포스터가 많이 붙어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처음 보았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홍경인이 전태일 역을 맡아 출연한 영화였다. 그 포스터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시커먼 배경에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전태일의 얼굴, 그리고 그 옆에서 피어오르는 불꽃…. 그 이미지는 오래도록 남아 내게 전태일이라고 하면 곧 ‘불’을 연상시키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전태일 평전』을 통해 그의 일생을 읽고 난 지금도 그 이미지는 변하지 않았다. 평전에 실린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하는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전태일의 불꽃만큼 그의 생애를 잘 말해주는 것이 있을까 싶다. 누군가는 불을 통해 길을 보고, 누군가는 온기를 얻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 뜨거라 하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전태일은 이 모두를 우리에게 남기고 갔기에, 그의 생애는 하나의 불꽃이었노라고 감히 압축할 수 있는 것이다.

전태일이 분신을 행한 것은 1970년 11월 13일이었다. 이 즈음해서부터 그는 친구들에게 “나 하나 죽어 없어지면 뭔가 달라지겠지….”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전태일은 죽었고,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노동 환경 개선과 체불노임 청산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은 왜 이런 파급 효과를 낳게 되었을까? 그의 죽음 이전에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열악한 조건을 아예 몰랐기 때문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전까지 언론에서 노동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모두들 그 문제점을 알고 있지만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 가운데 전태일의 분신은 사회가 비로소 꾹 닫게 있던 입을 열게 만드는 ‘충격요법‘이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다. 전태일이 부르짖던 대로 ‘근로기준법’은 잘 준수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시선은 자연스레 비정규직, 즉 아르바이트 시장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는 여전히 법망을 피해 최저 임금으로 최대의 노동력을 뽑아내려는 각종 시도들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타겟은 주로 청소년들이다. 이를테면 규정된 근무 시간을 훌쩍 넘겨 일을 시키거나, 최저 임금을 지키지 않거나, 잔업 수당을 주지 않거나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법망을 피해 교묘하게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아예 대놓고 행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왜 신고를 하지 않는가? 신고는커녕, 이미 고용 단계에서부터 청소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기란 쉽지가 않다. 최저 임금에 근무 시간 준수 등등을 따지다보면 일자리를 얻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대개 당장 돈이 급해서 알바를 하는 청소년들은 어쩔 수 없이 여기에서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방학 기간 동안에만 짧게 일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에 그렇게 길게 내다보고 이것저것 따지는 일도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업주들이 근로기준법을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물론 지금의 노동 환경은 전태일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다. 적어도 노동청에 부당한 것을 신고하면 무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처리해주며, 착취의 정도도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이 당하던 것을 생각하면 훨씬 덜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알리고자 했던 뜻이 과연 이런 정도였을까? 업주가 근로자와 함께 좋은 노동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한, 그 때와 지금이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근로기준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구체적인 방안이었던 것이지, 그게 전태일이 얘기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아니었다. 업주와 근로자 사이에 인간적인 유대가 존재하는 세상, 그것이야말로 전태일이 그토록 소망하던 세상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근무 조건이 더 나아졌다고 해서, 최저 임금을 지키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법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최저 임금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근로자가 받는 임금의 최저한도이다. 그런데 지금 알바생들이 그나마 임금을 잘 받는다고 하면 이 최저 임금을 겨우 지키는 정도이다. ‘이만큼을 주라’가 아니라 ‘이것 보다는 많이 주라’는 것이 최저 임금제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업주들은 법과 타협을 하고 있을 뿐, 근로자들을 위해 배려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한, 눈을 세계로 돌린다면 어떤가?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전태일이 당하던 것보다 더 심한 착취를 당하는 아동들이 있다. 범위를 지나치게 넓히는 것이 아니냐고? 전태일은 자신의 인권만을 위해서 싸운 것도 아니었고,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만을 위해서 싸운 것도 아니었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처럼, 그는 자신의 글에서 ‘인간‘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전태일이 고민한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의 경우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인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그의 소망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착취당하는 일 없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전태일이 바라던 바로 그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알고 보면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아직도 얼마나 멀고 먼 길이 남았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불꽃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이 여전히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길을 밝혀주고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불꽃이어야지, 세상에 대한 충격요법으로서의 불꽃은 더 이상 아니기를 빈다. 물론 전태일의 결단은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시대의 희생자이다. 그가 죽고 난 뒤, 자리에 남아있던 노동자들은 울부짖으며 이렇게 외쳤다. “누가 전태일을 죽였는가?” 세상은 전태일이 그런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몰고 갔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런 결단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불꽃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점화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이 모순된 바람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응답 2개

  1. […] 인간의 불꽃 [전태일 평전]을 읽고 by 오용택 […]

  2. 지나가다말하길

    전태일의 삶을 청소년 노동자의 삶과 겹쳐 읽는 것도 좋았고, 죽음의 불꽃이 아니라 삶의 불꽃을 바란다는 것도 참, 멋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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