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전태일, 그 헤아릴 수 없는 이름

- 고병권(수유너머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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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자리에 설 것을 부탁받았을 때 난 여기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태일은 아직 내가 헤아릴 수 있는 존재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자리에 서고는 말았지만, 사양과 부탁의 회신이 한 번씩 더 오간 후, 무엇을 말할지 생각도 못했으면서, 나는 강연 제목을 알려달라는 말에 ‘헤아릴 수 없는 이름, 전태일’이라고 답해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전태일은 내 의식 속에서 ‘소화되지 않은 충격’으로 자리하고 있다. 스물한 살, 대학 2학년의 어느 봄날, 나는 제 몸에 불을 지른 스물두 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읽었다. 『전태일 평전』의 옛 이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선배들이 대학 신입생들의 시각 교정(?)을 위해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었다. 당시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 책을 읽고 나면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완전히 딴 것이 되어 버린다고. 그러나 후배들의 ‘학교’를 준비하면서 그 책을 읽었을 때, 내게 세상은 열렸다기보다 닫혀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회색빛이던 세상이 완전히 검정으로 돌변한 느낌.

'전태일과 함께 찾는 희망세상' 고병권 특별강연

내가 대학에 들어간 91년, 참 많은 이들이 제 몸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 처음엔 암담한 세상의 출구를 여는 불꽃처럼 보이던 것이, 나중엔 열리지 않는 세상에 대한 낙담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소련이 몰락했고, 나를 공부시켜준다던 선배들은 겨울이 되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92년 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총선에 출마한 어느 노동자 후보의 선거 지원 활동을 했다. 구로공단역에서였던가. 선배들은 운동원 중 제일 막내인 나에게 유세를 해보라고 했다. 퇴근 중인 노동자들을 향해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대해 떠들고 있을 때였다. 술을 먹고 얼굴이 불콰해진 파란색 점퍼차림의 한 노동자가 오더니 내 뺨을 후려쳤다. “니가 노동자를 알아?”

선거 운동이 모두 끝난 날 밤 회식 자리에서, 선거 운동을 함께 했던 어느 여성 노동자의 손이 온통 화상 자국으로 덮여 있음을 알았다. “아, 빨간 고무장갑..” 그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몇 년 전이었다고 한다. 추석 대목이라고 며칠 밤을 새웠는데 그때 ‘타이밍’ 두 알을 먹었다. 며칠 잠을 못자고 멍한 상태에서 집에 와 머리를 감는데 친구가 소리를 질렀다. 웬 고무장갑을 끼고 머리를 감느냐고. 뜨거운 물을 아무리 부어도 뜨겁지 않더니, 결국 그렇게 되었다고. ‘타이밍’과 ‘고무장갑’은 그 며칠 전 노동자에게 얻어맞은 뺨 이상으로, 내 맘 속에 흉터를 남겼다. 그리고는 대학에 돌아와서 읽은 책,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그래서 참 우울했던 것 같다. 이십여 년 전의 과거를 거의 현재 시제로 읽게 하는 현실, 불과 한 해 전에 불타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대학 생활이 많이 어두워졌다.

이제 전태일이 죽은 지 이십 년에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나는 오랫동안 그를 맘 속 어딘가에 그냥 그렇게 놓아두었다. 내가 얻어맞은 뺨과 타이밍, 고무장갑 등과 함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았을 때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옛날의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서인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또 읽으며 우는 사람들처럼 전태일의 이야기는 여전히 나를 울렸다. 하지만 과거처럼 암담하거나 우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삶은 절망한 자, 포기한 자의 것이 결코 아니었다. 죽음조차 그가 얼마나 절망이나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암담한 시대도 다른 삶에 대한 꿈을 가진 자의 무릎을 쉽게 꿇릴 수 없다는 것, 그의 삶과 죽음은 그것을 증언한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에서 2009 재발간된 『전태일 평전』까지

그런데 이십 년 전의 나는 왜 그토록 암담하게 느꼈던 것일까. 아마 나는 그때 전태일을 보지 않고, 전태일이 처했던 비극적 상황만, 전태일 이후에도 그대로인 그 상황만을 보았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그 책을 이렇게 읽었던 것이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던 <어느> 노동자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그러나 반대편이야말로 진실이 아니던가. ‘온갖 곤경에도 불구하고 <어느> 노동자에 불과했던 이가 결국 자기 시대를 멈추게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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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범한 노동자는 어떻게 ‘전태일’이 되었는가. 어느 프랑스 철학자는 19세기 노동자들의 해방 운동이 ‘밤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의 지배적 감성, 즉 ‘노동자는 낮에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며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통념을 거부하고, 밤에 자지 않고 읽고, 쓰고, 토론하는 노동자들이 생겨났을 때가 해방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나는 ‘전태일의 밤’에 대해 생각한다. 몇 번이고 법전과 해설서를 읽었던 그 밤에 대해서. 그리고 근로감독관이나 노동청,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쓰고, 친구에게 고민을 토로하는 편지를 쓰던 그 밤에 대해서. 동료들과 조직을 꾸리고 운동을 모의하던 그 밤에 대해서. 또 자전적 소설을 구상하던 그 밤에 대해서. 심지어 모범업체를 설립하겠다며 기업가처럼 혹은 경제학자처럼 꼼꼼히 사업계획을 세우던 그 밤에 대해서. 그 밤은 어느 청년 노동자가 단지 노동자에 머물 것을 거부한 밤이다. 전태일의 밤, 그것은 법률가의 밤이며 작가의 밤이고 운동가의 밤이자 학자의 밤이었다.

전태일과 바보회가 서울시 근로감독관에게, 대통령에게, 노동청에 쓴 편지와 설문지

노동자가 노동자에 머물 것을 거부할 때 노동해방이 시작된다는 건 참 역설적이다. 단지 노동자이기만 해서는, 단지 ‘산업역군’이기만 해서는, 전태일의 표현처럼 ‘부(富) 환 경’에서 밀려나는 신세, 단지 ‘부스러기’로만 존재하는 처지를 넘어설 수가 없다. 현재의 경제성장이 노동자 자신의 피땀 어린 결과라는 사실에 힘주기 전에, ‘산업역군’의 훈장을 내치며, 성장을 명목으로 노동자에게 피땀을 요구하는 구조를 문제 삼을 때, 노동운동은 해방적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전태일은 그것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는 현재의 세상에 대한 공훈 때문이 아니라 도래할 세상에 대한 공훈 때문에 위대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노동자는 노동자를 넘어서야 한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넘어서는 그 깨우침의 과정을 나는 ‘공부’라고 말하고 싶다. 이 점에서 전태일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가 쓴 ‘전태일 사상’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학교라고는 중학교도 제대로 다녀보지 못했지만,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쌍문동 초라한 판잣집에서 그는 세상에 대해 읽고, 쓰고, 묻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인 연구자였고, 연구자인 운동가였다.

그의 공부는, 모든 공부가 그렇듯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발견한 데서 시작되었다. ‘바보회’가 만들어지던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당당하게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기계 취급을 받으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 재단사들의 모임은 바보들의 모임이다. 이것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며, 그래야만 우리도 바보 신세를 면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듯, 깨달음의 일성은 종종 자신을 바보라고 부르는 데서 시작한다. 바로 자신이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리고 억압하는 구조의 협력자였음을 아는 것, 공부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공부란 그런 자신을 낯설게 보는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던가. <우리는 바보다>. 이 말은 “우리가 <바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바보’는 개인의 성격이기 이전에 사회구조의 성격이다. 바보와 광인은 현명함과 이성을 규정하는 사회구조에 고유한, 그 구조의 뒤집힌 얼굴이다. 다시 말해 바보를 규정하는 구조와 현명함을 규정하는 구조는 동일하다. 가끔 우리가 한 시대의 진리와 그 시대의 어리석음을 구별할 수 없는 것, 즉 그 시대의 진리가 그 시대의 어리석음으로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전태일의 ‘바보’에 대한 자처는 그런 현명한 어리석음에 대한 고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미사' 공장의 전태일과 동료들

선배 재단사들이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야. 뭘 안다고 너희가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려고 하느냐.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설치는 놈들은 바보다.”고 했을 때, 전태일과 동료들은 이렇게 말했다. “좋다, 우리는 바보다!” 그들은 ‘바보’라는 말로 노예적 영리함을 명백히 거부한다. 노예는 자신의 영리함 때문에 평생 노예로 사는 존재이다. 노예는 자신의 열등함과 무력함을 그 누구보다 빨리 승인함으로써, 예속된 상황 아래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 한다. 그것이 노예의 처세술이다. 그것이 또한 그가 평생 노예인 이유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능력이 없을 때가 아니라 의지가 꺾일 때 노예가 되고, ‘진짜’ 바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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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덩어리를 해체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썼다. “오늘 나는 여기서 내일 하루를 구하고 내일 하루는 그 분해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일세. 방법이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나는 그 덩어리가 자진해서 풀어지도록 그들의 호흡기관 입구에 향을 피울 걸세. 한번 냄새를 맡고는 영원히 뭉칠 생각을 아니하는 그런 아름다운 색깔의 향을 말일세. 그렇게 되면 사회는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부스러기란 말이 존재하지 않을 걸세. 어떤가? 서로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는 멋있겠지?”

‘부스러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덩어리를 없애야 한다. 부스러기란 부와 권력의 구조로부터 추방된 자들, 전태일 자신이 살면서 겪어왔던 수많은 소수적 삶들을 지칭한다. 빈민들, 아이들, 여성들, 무학력자들, 노숙인들, 철거민들, 그리고 노동자들. 이 부스러기들은 다수적 삶을 구성하는 ‘덩어리’, 기업과 정부, 언론이 결탁한 사회구조인 그 ‘덩어리’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사라지지 않는 존재들이다. 덩어리의 재생산이 바로 부스러기의 재생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덩어리를 어떻게 ‘향기롭게’ 용해시킬 수 있을까. 또 용해된 덩어리는 어떻게 풀어진 채로 조화로울 수 있을까. 존재들의 그 절대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덩어리를 용해시키는 과정이 부스러기들을 엮는 과정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전태일의 삶 속에서 그 많은 부스러기들이 서로 용해되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많은 소수적 삶들이 위계적 덩어리를 이루지 않은 채, 그의 삶 속에서 평등하게 연대하고 있다. 천막 아래 잠을 자는 빈민, 신문팔이 아이, 학교를 다니지 못한 무학자들, 집을 수도 없이 잃은 철거민, 끔찍한 노동 조건의 어린 여공들. 이들은 전태일의 삶 속에서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은 형식으로, 어쩌면 각각의 투사들로 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태일은 세상에서 수많은 ‘나’를 보았다. 그는 다른 모든 인간들을 ‘나의 또다른 나’라고 불렀다. 세상에서 수많은 ‘나’를 본 사람, 그는 같은 의미에서 자기 안에서 수많은 ‘너’를 품었던 사람이다. 그가 관통해간 삶만큼, 그가 품어낸 삶만큼, 각각의 삶들 또한 그를 품는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이름, 그것도 ‘덩어리’에 의해 고려되지 않았던, 다시 말해 사회구조에 의해 ‘헤아려지지 않았던’ 이들의 공통의 이름, 그들의 용감하고 자유로운 연대, 즉 민주주의의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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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짧은 강연을 준비하면서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로 시작하는 전태일의 유서를 여러 번 읽었다. 어떤 정신분석학자는 애도란 ‘자기 안에 타자의 묘소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보면 전태일을 애도하는 일은 장사지냄으로써 그를 저승으로 보내버리는 일도, 단순히 그를 빙의하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저 내 안에 그의 자리를 두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어쩌면 전태일이 요구하는 것도 그것인지 모르겠다. 그는 ‘나를 아는 모든 나,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게 “그대 영역의 일부”로서 자신을 받아주기를, 그에게 말을 건넬 자리 하나를 내어주기를 부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 1주기 추도식

사람들은 ‘시간은 언제나 가버리고, 가버린 시간은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태일은 1970년 겨울에 숨을 거두었고, 나는 1971년 겨울에 태어났다. 우리는 한 번도 공기를 나누어 숨을 쉰 적이 없다. 그가 죽은 지 꼭 내 나이만큼 되었다. 역사 속의 그는, 사람들의 믿음처럼, ‘가버린 시간’ 저기 어딘가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과 달리 그의 유언은 결코 역사에 속하지 않는다. 유언은 역사를 갖지 않는다. 유언은 역사를 넘어 남겨진 말이다. 유언은 언제든 그것을 상속받는 자 옆에 있다. 아마도 그것은 과거의 그가 지금의 내게 속삭이는, 비역사적이고 초역사적인 말이 될 것이다.

“이 순간 이후의 세계가”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행여 “다시 추방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굴리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 그것은 영원히 덩이를 굴리는 운명을 선고받은 시지포스의 형벌이 아니라, 추방됨에도, 아니 추방될 때마다 한없이 돌아오는 익명의 투사들, 도래할 세계를 위해 영원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그 익명의 투사들에게 전달되는 회귀의 약속이다. 익명에서 익명으로,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게 시대를 넘어 전달되는, 헤아릴 수 없는 해방의 약속이다.

  1. 이 글은 작년 7월 7일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전태일 평전 재발간 기념>으로 개최한 ‘전태일과 함께 찾는 희망세상’에서 특별강연을 한 강연문이다 []

응답 1개

  1.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Jeon, Eunhee, Hyungee Shin. Hyungee Shin said: 이런 후배가 있어 영광스럽다. http://bit.ly/9wyU37 또 이런 선배 덕분에 다시 용기를 낸다. http://bit.ly/9sYIB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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