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동판(銅版)과 시신 – 죽음을 기리는 법에 대한 단상

- 오항녕

《전태일 평전》의 기억

며칠 전에 엽서가 왔다.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서거 40주년 기념행사에 대해 알려왔다. 나이가 먹을 만큼 먹었지만 그래도 전태일 형이 서거했을 때 어려서인지, 또 추체험을 통한 체득이라는 혈구지도(絜矩之道)가 부족해서인지, 전태일이라는 존재는 왠지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런데 전태일 형은 늘 나에게 두 가지 기억과 함께 찾아온다. 하나는 꽤 오래 되었고, 하나는 비교적 가까운 날의 일이다.

첫째 기억. 학교 정문에서 도서관 쪽으로 친구와 함께 걸어가고 있을 때, 강신준 형과 마주쳤다. 형은 당시 써클에 조영래 변호사께서 쓴 《전태일 평전》을 몇 권 갖다 놓고 후배들에게 사보라고 했다. 그때 이 책이 처음 나왔을 것이다. 아마 내가 써클 회장을 맡았던 1983년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미처 제대로 광고를 하지 못했고, 당연히 판매 실적이 저조했다. 상황을 안 신준이 형이 왈, “철학도 좋고 사회과학도 좋지만, 이런 책(곧 《전태일 평전》)도 안 읽으면서 무슨 공부한다고 하나!” 원래 이 분은 늘 온화한 모습이었지, 어지간해서는 싫은 소리를 안 하는 분이어서 참 무안했다. 본 지는 한참 되었고, 최근 《자본》을 완간하고 해설서를 펴내서 책으로만 만나고 있지만, 지금 한켠에 도서관 길에서 들었던 핀잔 아닌 핀잔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동판과 베트남

둘째 기억. 남들이 생각할 때 크게 보면 연관이 있지만 없다고 해도 별 할 말이 없다. 2000년에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 ‘이곳은 영원한 노동자의 벗 전태일이 1970년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분신 항거한 곳입니다’라고 글이 담긴 작은 동판(銅版. 가로40cm, 세로 30cm)이 표시로 남았고, 역시 작은 동상을 세웠고, 최근에는 청계6가 버들다리가 ‘전태일다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울에 있는 다리에 어떤 사람의 이름을 다는 게 처음이었다는데, 서울시가 웬 일인가 싶다. 내 기억은 위에서 말한 그 동판과 연관되어 있다. 아니, 그것을 본 순간 동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공무원을 그만둔 뒤 몇몇 역사 선생님들과 베트남을 다녀왔다. 2003년. ‘의식화 단계’를 거쳐야만 그나마 사실에 접근할 수 있던 시절에, 《우상과 이성》에서 만난 베트남이었다. 20세기에, 프랑스, 일본, 미국, 중국 등 최강국들과 맞짱을 떠서 밀리지 않았던 나라. 아니, 사람들.

후일 베트남은 조선시대를 주로 공부한 나에게 좀 다른 맥락으로 다가왔다. 중국 명(明)나라 태조가 남긴 유훈(遺訓)이 있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에서 정종으로 넘어가던 무렵의 일이다. 명 태조의 유훈이란, 주변에 정복할 수 없는 16나라가 있으니 절대 침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베트남(안남)은 그 16나라 중에서 두 번째로 꼽혔다. 첫 번째는? 고려(조선)였다.

온몸이 울긋불긋 비단옷을 입은 듯

자부심에 관한 한 조선에 밀리지 않았던 베트남 사람들을 통일과 독립으로 이끈 분이 우리가 아는 호치민(1890-1969)이었다. 그때, 호치민이 지었다는 한시(漢詩) 몇 편을 본 적이 있다. 한시에 조예가 없어서 평을 할 수는 없지만, 무척 단순하고 메시지가 명료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흔히 호치민은 유학자의 품성을 지녔다고 한다. 그 예로 검소하고 소탈한 성격을 꼽는 이들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호치민 기념관에 갔을 때, 그가 사용하던 작은 대나무침대와 책상, 몇 권의 책 등 그의 유품을 보면서 그의 인간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매우 유연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그래서 어려운 지경에서도 유쾌한 농담을 잊지 않았다.

온몸이 울긋불긋 비단옷을 입은 듯(滿身紅綠如穿錦)

온종일 긁적이니 거문도를 타는 듯 成日撈搔似鼓琴
비단옷에 갇혔으니 모두가 귀한 손님 穿錦囚中覩貴客
거문고 타는 동료들 음악을 아는구나. 鼓琴難友盡知音

호치민은 항불(抗佛) 독립운동의 연대를 위해 1942년 중국에 갔다가, 도리어 1년 동안 18개 감옥을 옮겨 다니며 국민당의 감옥살이를 겪었다. 참 황당했을 것이다. 위의 시는 그 당시 감옥에서 옴에 걸렸을 때 지었다.
이렇듯 오랜 반식민주의 투쟁에서 얻은 신뢰, 경직되지 않은 인품과 국민들의 아픔을 현장에서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변함없는 태도 때문에 베트남 국민들은 대통령 호치민을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런데 우리는 2003년 1월 하노이 바딘 광장에 있는 호치민 영묘에서 호치민을 만났다. 진짜 ‘시체를 보았다.’

호치민을 만나다


그는 1969년 9월 2일, 아직 남북 베트남이 갈려 있던 와중에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그런데 역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맑은 마음으로 추모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인물로 인하여 얻을 게 있는 사람들은 죽음조차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안을 가진 대개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생전에는 물론 죽은 뒤에도 자신을 신격화하는 어떠한 활동이나 조치에도 반대했다.

호치민은 자신이 죽은 뒤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호치민의 동지들은 그의 유언을 저버렸다. 호치민이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968년 소련의 전문가가 몰래 하노이에 와서 호지민의 시신을 방부(防腐) 처리하는 사안에 대해 조언하였다. 그리고 정치국은 ‘미래 세대를 교육하기 위해’ 방부 처리한 호치민의 시신을 전시할 기념관 건설을 승인하였다. 인민복 차림으로 두 손을 모은 채 누워 있는 그 인물은 여유로운 농담과 허식 없는 품성의 호치민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지금도 그의 시신은 매년 방부 처리를 하러 러시아에 간다.

1980년 말이 되어서야 소박한 장례식을 원했던 호치민의 유언장이 부분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당(黨)에서 독립기념일인 9월 2일의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호치민의 사망을 9월 3일이라고 발표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레닌이 세상을 뜬 뒤 스탈린이 비슷한 짓을 했다. 결국 레닌의 동상은 본의 아니게 세워졌고, 후일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밧줄에 감기어 내동댕이쳐졌다.

레닌은 그나마 동상이지만, 호치민은 시신이다. 베트남 국민들의 지혜를 믿을 수밖에 없지만, 산 자들의 욕심으로 죽은 자를 제때 보내지 않아 욕을 보게 만드는 것, 그것을 자신들의 시대를 스스로 감당할 능력도 비전도 없다는 고백에 다름아니다. 보낼 때 보내는 것이 자신들의 시대는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는 산 자들의 약속이자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전태일 형의 동판과 호 아저씨의 부패방지시신은 내 머리 속에서 묘한 대조와 불안감, 그리고 조금은 치사한 안도감을 주었다. 호 아저씨가 욕을 볼 것같은 불안감, 그래도 전태일 형은 그런 욕을 당할 일이 또 없을 것같은 안도감.(쯧쯧쯧) 가끔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철없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난세의 물결이 이토록 도도한데 한가롭게 말이다.

응답 1개

  1. 깊은밤말하길

    글 잘봤습니다 선생님 그런 걱정이라면 좋은데요?ㅎㅎ 처음 알게된 사실이 참 많네요, 한 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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