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노동자와 함께한다는 것-「위건부두로 가는 길」

- 안티고네


현대,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뭘 의미할까? ‘노동법을 준수하라’며 전태일 열사가 뜨거운 불길에 스스로를 던진지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때보다 노동자들의 살림살이는 좀 나아졌을까? 지난 11월 1일, 비정규 파견직 노동자 문제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기륭전자 싸움이 6년 1895일 간의 투쟁 끝에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파견직으로 일하고 있던 기륭의 여성 노동자들은 늘 최저임금에서 겨우 몇 십원에서 몇 백원 높은 임금을 받고서 잔업과 특근을 포함해 한달에 100시간 가까운 노동을 견뎌냈다. 그렇게 일하고도 근무 중 잡담을 이유로 달랑 문자 한 통으로 해고통지를 받았다. 그녀들을 감시하던 CCTV 때문이었다. 이후 94일간 목숨을 건 김소연 분회장의 단식투쟁과 포크레인 위의 고공 투쟁, 여러 연대 투쟁들을 통해 최후까지 복직투쟁을 하던 조합원 32명 중 10명이 회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일전에 기륭전자는 법원으로부터 불법 파견 고용이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벌금 500만원을 내는 것으로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 정부는 늘 그렇듯 두 손 놓고 방관했다. 상황이 이런 만큼, 비록 10명이지만 기륭전자 쪽에서 직접 고용을 받아들인 것은 순수하게 김소연 분회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의 투쟁의 결과물이 할 수 있다. 그래도 그녀들은 아직 기륭의 싸움을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김소연 분회장은 노사간 합의문 조인식에서 초기에 함께 투쟁했던 200여명의 동지들을 뒤로 한 채, 10명만이 일터로 돌아가는 게 죄송하다며 울먹였다. 분명, 기륭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단 기륭에 함께 복직하지 못한 조합원들 뿐 아니라, 벌써 1000일이 넘어가고 있는 재능교육 노조 싸움과 KEC, GM대우 싸움 등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 40주기인 올해에 탄광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조지 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 출판된 것은 참 기막힌 우연이다. 「동물농장」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청년 오웰은 1936년 두 달간 북부 탄광 지역에서 생활하며 그 지역에 대한 르포를 썼다.「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설익은 정의감에 가득 찬 지식인이 설렁설렁 둘러보며 쓴 글이 아니다. 그는 직접 탄광에 들어가고, 광부들을 만나고 광부들의 집을 방문 조사했으며, 지저분한 하숙집에 머물며 이 글을 썼다. 광부들의 삶과 노동 현장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관찰에는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는 여러 가지 고민거리들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방식에 대해, 노동자와 그들의 문화에 대해, 그리고 계급 문제를 사유하는 방식에 대해.

조지 오웰의 예리한 시선이 빛나는 책 전반부는 광부들의 생활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허리를 펴고 걸어다닐 수 없는 갱도에서 지주에 수없이 머리를 부딪히는 광부들, 그들의 코와 이마에는 상처에 석탄가루가 비어져 들어가 푸르스름한 문신이 새겨진다. 이마의 푸른 문신, 이는 그가 광부임을 나타내는 낙인이기도 하다. 이 낙인은 노동자인 그가 어떤 불편과 냉대를 당하더라도 늘 기다려야 하며,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오웰은 노동계급의 수동성과 소극적인 모습은 그들이 언제나 이런 류의 냉대를 받았으며 여기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의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부르주아와는 달리, 노동계급은 행동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처신할 뿐이며, 언제나 ‘그들’에게로 판단을 내맡긴다. 오웰같은 가난뱅이 부르주아는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으로서 어느 정도 존중받지만, 노동계급은 언제나 더러운 무지랭이로 취급된다. 나와 똑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존중해주지 않는 것, 나와 같은사회ㆍ정치적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랑시에르가 말한 정치적 분할 아닐까. 랑시에르는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것이란 그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 그의 말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언어로 듣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웰은 노동자들은 언제나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노동자와 부르주아가 같은 것을 감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광부의 이마에 새겨진 문신은 계속 무거운 낙인이 될 것이다.

이처럼 오웰의 글에서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계급에 대한 관점이다. 그는 계급을 생산수단의 유무로 나누지 않는다. 우선 오웰 본인만 해도 분명히 부르주아 계급이지만, 그는 부유한 프롤레타리아트보다 더 가난한 가난뱅이 부르주아다. 하지만 가난한 부르주아가 돈 많은 노동계급보다 분명히 더 우대받는다. 그리고 서글프게도 오웰은 아무리 자신이 부르주아 티를 내고 싶지 않아도 광부들 사이에 완전히 섞여 들어갈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분명한 H발음과 악센트가 그를 광부들과 구별짓기 때문이다. ‘어린쥐’ 정권의 교육 정책과는 달리, 영국식 영어는 wh나 h 발음을 뭉개지 않는다. 특히 영국에서 h음은 일명 ‘젠틀맨’ 계급을 구별짓는 발음이다. 책에서 오웰은 자기 발음과 악센트 때문에 노동자들과 편하게 어울리지 못할까봐 두려웠다고 서술한다. 확실히 신분의 벽, 신분 간의 ‘차이’란 사회주의 이념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웰과 허물없이 지냈던 노동자들 또한 그를 ‘나으리’라 부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오웰이 때로 그들보다 더 가난하고, 심지어 노동력이라는 측면에서는 더 무능했는데도 말이다. 고작 h발음, 고작 악센트가 계급차별의 문제에 그렇게 중요하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웰은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계급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부르주아이자 기득권 계급으로 자신의 몸에 배인 습속들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어투와 억양 뿐 아니라 중산층의 관념과 감각, 식사예절, 독특한 제스쳐 등 모든 것이 안정된 지위를 누리는 상류계급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 고상하고 편안하다고 느끼는 모든 몸에 베인 취향과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한, 노동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우리 모두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단지 발상의 전환이나 생각의 변화로는 노동자들의 세상이 오지 않는다. 나를 구성하는 계급적 증표들을 포기하고, 내게 익숙한 감각들을 바꾸는 일이야 말로 가장 정치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오웰은 계급없는 세상을 가로막는 가장 무서운 벽으로 ‘노동자에게는 냄새가 난다’는 편견을 지적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보는 노동자 특히 광부들은 언제나 땀과 석탄을 뒤집어 쓴 모습이다. 가진 자들은 그를 두고 ‘더럽다ㆍ 냄새난다ㆍ발음이 멍청하다’고 생각할 뿐, 그가 왜 더럽고 냄새나며 자신들처럼 발음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노동자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더럽고 가난하다는 손쉬운 결론을 내릴 뿐이다. 그리고 노동계급은 무지하지 때문에, 지적이고 섬세한 자신들과는 달리 삶에 대한 불편 불만이 없을 거라고 단정짓는다. 하지만 오웰은 두 달 간의 르포를 통해 부르주아의 이같은 망상은 그들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결론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노동자들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다. 분명히 광부들은 탄광에서 나온 직후 따뜻한 샤워로 피로를 씻어내고 싶어하고, 상류계층처럼 뜨겁고 진한 홍차를 마시며 노동에 지친 몸을 추스르고 싶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광의 샤워장 시설을 가로막는 벽은 샤워시설을 설치하는 비용의 문제라기 보다 ‘노동자들이란 더럽고 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족속들’이라 여기는 부르주아의 편견이다.

이런 문제는 21세기 한국에서도 반복된다. 나의 쾌적한 생활을 위해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지저분한 노동을 해야 하며, 그는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 말이다. 2004년 고려대학 내 청소 노동자 노조와 함께하는 영화제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제에 참석한 조합원 분들은 열악한 노동환경, 최저임금과 다름없는 박봉과 더불어 1년 단위로 재계약하는 간접 고용을 문제제기했다. 그리고 비정규직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이런 문제와는 별도로, 그분들은 일도 너무 힘들지만 무엇보다 인간다운 대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새벽 첫 차도 뜨기 전에 출근을 해서, 학생들이 등교할 무렵인 9시 전에 그림처럼 건물을 닦아놓고 사라져야 하는 ‘어머님들’. 휴게실이나 샤워장은커녕 잠시 도시락 먹을 공간도 없어서 하수구 악취가 올라오는 지하실이나, 기계 돌아가는 광음으로 옆 사람과 인사 한마디 나눌 수 없는 보일러실에서 밥을 먹는게 그렇게도 서러우셨다는 그 분들. 대학생들이 편안하게 학교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 분들은 더럽고 궂은 일들을 도맡아 하며 사람들 눈에 띄어서는 안되는 그림자같은 존재여야 했다. 비단 고려대 청소노동자 분들 뿐 아니라 가끔씩 언론에서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청소노동자를 향한 막말이나 손찌검 사건들은, 노동에 분명한 위계가 있으며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은 험한 대우를 받아도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편견이 숨어 있음을 드러낸다. ‘못 배웠으니 더러운 일을 할 수밖에’, ‘그래도 저런 일자리도 있는게 어디겠어’라고 생각하고 멈추는 것은 정확히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다행히 청소노동자들의 노동환경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문제제기가 계속되고, 이들의 직장에 샤워시설 설치를 의무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재는 ‘사업주나 건물주들이 청소ㆍ경비ㆍ쓰레기수거 등의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작업 후 샤워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의무적으로 설치토록 하는 ‘산업안전보건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발의된 상태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 노동자에게로 가는 길. 연구원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똑똑한 대학생 친구를 갖고 싶어했던 청년 전태일의 소망에 대한 작은 해답이기도 하다. 노동자와 연대한다는 게 뭘까, 그리고 내 안의 부르주아적 감각들이 왜 문제이며, 이를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 나의 생활이 유지되는 것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서가 아니라 누군가 피땀 흘려 노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웰은 나라는 존재가 유지되는 것이 누군가의 노동의 대가라는 소중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누구로서,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응답 1개

  1. 박카스말하길

    친구에 따라 감각도 바뀌겠지요?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의미심장한 말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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