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12년 그리고 40년 …

- 신경현(대구 성서공단노조)

12년….

‘한국에 온지 12년이나 됐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12년 시간 속에서 그는 많이 늙어 버렸습니다.

풍성하던 머리숱이 하나 둘 빠지더니 급기야 가발을 쓰지 않으면 방글라데시에서 만날 부모님이 자신을 몰라 볼 거라고 걱정을 할 정도로 그는 늙어 버렸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아직 20대였으며 건강했습니다. 그리고 분명 두려운 마음으로 그큰 눈을 껌뻑이며 여권 사진을 찍었을 겁니다.

가난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방글라데시에서 이 먼 대한민국까지 찾아온 그의 이름은 ‘파이샬 슈먼’입니다.

그가 공장에서 보낸 12년의 시간 대부분은 오로지 노동과 노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제일 처음 들었던 말은 ‘빨리, 빨리’…….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개나 소가 들어도 기분 나빠했을 말 ‘개새끼, 소새끼’…..가장 끔찍했던 말 ‘임금체불’…..그 수많은 말들과 말들 속에서 그는 12년을 온전히 맨 몸뚱이 하나로 견뎌왔습니다.

맨 몸뚱이 말곤 자신을 의지 할 수 없는 노동자였지만 그는 노동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노동3권도 기본적인 시민권도 그 어떠한 법적인 권리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던 12년의 시간을 그는, 아프고 슬프게 지나왔으며 고통스럽게 멈춰진 현실 속에서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비자가 있든 비자가 없든 상관없이 그는, 모든 공장에서 동일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상념에 젖을 때 저는 그의 메마른 등을, 그 작고 아픈 등을 보았습니다. 차마 무슨 말을 붙여 볼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습니다. 붙여준 돈으로 얼마 전에 시집을 갔다던 누이동생을 생각하는지 밥을 먹을 때면 그가 생각나서 늘 목이 메인다는 그의 부모님을 생각하는지………알 수 없었습니다.

40년…….

그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아니 굴리고 또 굴리고 있었습니다.

못 다 굴린 덩이를 아직도 그는 굴리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다들을 위해 풀빵을 사다 주고 자신은 버스비가 없어 걸어 걸어서 집으로 가다 통금 시간에 걸려 파출소에 잡혀갔을 때 그의 어머니는 뜬눈으로 밤을 지세웠다더군요.

터벅 터벅 지친 발걸음의 그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 지 알 수 없습니다.

어린 시다들의 얼굴들, 그 작고 작은 몸에 피어난 피곤과 불안을 생각했을까요? 지난 밤 타이밍을 먹고 일을 하다 점점 바보가 되어간다고 말을 하던 어느 시다를 생각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어린 시다들이 작고 작은 몸으로 책가방에 책을 넣고 점심때면 집에서 사간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미싱사와 재단사들이 하루의 짧은 노동을 마치고 6시나 7시 쯤 만나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싱그러운 아가씨들과 미팅도 하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친구들과 산에도 가고 바다에도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며 웃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짝 들뜬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었을지 아님 없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작 현실 속에서 떠올릴 수 있었던 말들은 무엇일까요?

평화시장, 재단사, 미싱사, 재단 보조와 시다와 하꼬방과 뽀얗게 흩어지며 목구멍 깊은 곳으로 스며들던 실밥먼지들, 가난과 눈물, 철야와 잔업과 배고픔…….

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들의 끝에서 과연 그는 마지막으로 어떤 단어를 생각했을까요?

마지막 결단의 시간을 앞두고 들어갔다던 삼각산에서 그는 자신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단어를 찾았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40년 전, 외쳤던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을 노동자들은 아직까지 외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공장에서 쫓겨나 외치고 이주 노동자가 강제 단속에 항의하면서 외치고 있습니다. 때론 철탑위에서 살을 에이는 칼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펄럭이는 플랭카드와 함께, 때론 목숨마저 깨끗이 비워버릴 작정으로 밥 먹듯 밥을 굶으면서, 때론 징계와 구속과 해고의 위협을 분노와 의지로 바꿔 온몸으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절규하듯 울부짖고 울부짖으면서 치를 떱니다.

겨울에 떠났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그가 한국에서 12년의 시간을 견디고 떠나던 날, 저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그와 함께 동대구역 버스 터미널로 갔습니다. 한국에 처음 올 때도 그랬지만 한국을 떠나던 그날도 뭐 별달리 배웅 해줄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 2개를 들고 동대구역으로 향하면서 저는 별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잘 살아라, 가면 전화나 한 번씩 하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저 가발을 쓴 그의 머리를 쳐다보며 ‘방글라데시의 부모님들이 정말 제대로 알아볼까?’하는 염려만 했습니다.

밤 12시, 버스가 왔습니다.

그가 애써 웃어 보이며 그만 들어가 보라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들어가라고 추운데 빨리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거짓말처럼 그는 버스와 함께 가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한 몇 년이 눈 깜짝 할 사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떠난 동대구역 버스 터미널, 바람은 왜 그리 서럽게 부는지, 달빛은 또 왜 그리 밝은지 춥고 배고픈 이별의 풍경을 잠시 가슴에 새겨 넣었습니다.

밥을 구하기 위해 몸을 버려가며 일 했던 사람들, 끝내 밥을 구하지 못한 평화시장의 그는 아직 평화시장을 서성이고 있고 어렵게 밥은 구했으나 끝내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대구 성서공단의 그는 쫓기듯 방글라데시로 떠났습니다.

우상과 신화의 껍질 속에 박제된 평화시장의 그와 근거 없는 희망과 어설픈 감상 속에 박제된 대구 성서공단의 그와 그의 친구들을 이 겨울 초입에 다시 생각합니다. 자동차와 월급봉투와 더 넓은 집을 지키기 위해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응답 1개

  1. 지나가다말하길

    전태일은 나를 아는 모든 나, 나를 모르는 모든 나라고 했는데, 나는 전태일이라 불린 그 나와 거리를 두려고 무진 애를 써 왔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