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지금

다케우치 요시미: 동양의 저항과 동아시아의 가능성

- 윤여일(수유너머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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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 동양은 담론적 구성물이다. 그러나 서양과 동양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며 둘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서양은 경계지어진 영토상의 명칭이지만 자기한정을 거부하고 바깥으로 뻗어나간다. 서양은 자신이 하나의 특수로서 다른 항(동양)과 대립하지만, 다른 항이 자신을 특수로서 인식할 때 보편적 준거점으로 작동한다. 동양은 서양과의 차이를 통해 자기인식을 획득한다. 따라서 서양은 ‘서양 대 동양’이라는 대립관계의 한쪽 항이자 그 대립 자체가 발생하는 장소이다. 서양의 ‘근대’ 과정과 동양은 ‘근대화’ 과정은 그 동학을 통해 진행된다.

‘서양 대 동양’의 구도에서 서양과 동양은 등질한 공간적 평면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구도는 시간적인 함축을 갖는다. 서양의 근대와 동양의 근대화는 헤겔의 역사철학이 그러하듯 공간상의 차이를 시간상의 낙차로 전위시키는 조작 속에서 전개되었다. 서양의 근대성은 근대에 선행하는 자기 안의 전근대와 대립하는 동시에 지정학적으로는 비근대, 즉 비서양과 대비된다. 그리하여 지정학적 조건은 역사적 단계로 번역되며, 그러한 역사주의적 도식은 다중적인 근대성을 근대화=서구화로 환원하였다.

그렇다면 동양의 위치에서 근대의 극복이란 서양이 확장해 나갔던 시공간 구조에 관한 근본적 물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근대 비판은 근대의 외부가 존재한다거나 동양의 고유성을 찾아나서는 방식으로는 성사될 수 없다. 그것은 반근대 내지 토착주의라는 노스텔지아에 빠질 공산이 크다.

또한 서양중심주의 비판을 통해 근대 비판을 수행하고 동양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시도도 자가당착에 빠지기 마련이다. 서양적 근대는 유럽이라는 지리상의 장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서양적 근대를 비판하는 언어조차 후기구조주의 담론을 빌리고 있는 데서 엿보이듯이 그것은 서구 근대에 내재된 회의의 논리를 전유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부정항은 서양의 근대 논리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 동양에서 근대 극복이란 ‘서양 대 동양’이라는 관계 바깥이 아닌 그 비대칭적 관계에 철저히 내재화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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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이유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근대란 무엇인가」는 동양의 저항을 사고하고자 할 때 거듭 돌아와야 할 텍스트이다. 「근대란 무엇인가」는 동양이 서양에게 패배했으며, 동양의 근대화는 서양에 의한 식민화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란 무엇인가」는 1948년에 발표되었다. 당시 일본사상계에서는 강화논쟁과 더불어 패전국 일본은 승전국 미국으로부터 어떻게 독립해야 할 것인가라는 논의가 비등했으며, 전전의 국수주의와 일본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위 서양산 지식을 끌어들여오자는 ‘근대주의’가 횡행했다. 바로 그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다케우치는 동양의 근대와 저항을 사고했다.

「근대란 무엇인가」의 첫째 절은 ‘근대의 의미’이다. 그러나 정작 다케우치는 근대의 의미를 밝히지 않는다. 루쉰이 근대문학의 건설자라는 진술만이 나온다. “루쉰은 전근대적인 면모를 많이 지녔지만, 그럼에도 전근대를 품는 모습으로 역시 근대라고 해야 한다.” 다만 여기서 두 가지 함의는 읽어낼 수 있다. 다케우치는 전근대와 근대를 연대기적 순서로 나누지 않았으며, 동양의 근대를 루쉰적 근대로 읽어냈다. 즉 동양은 저항을 통해서만 자신의 근대를 이룰 수 있다.

이어지는 절은 ‘동양의 근대’와 ‘서양과 동양’이다. 여기서 다케우치는 서양과 동양의 관계를 명시한다. 서양과 동양은 용어의 대등함과 달리 등질평면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 대 동양’의 대(對)는 힘의 비대칭성이라는 위계관계를 품고 있다. 그 위계관계에 근거하여 서양은 동양을 자기세계로 내부화하였고 차라리 동양을 생산했다. “동양의 근대는 유럽이 강제한 결과라는 점, 혹은 그 결과에서 도출되었다는 점은 일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반면에 서양의 “근대란 유럽이 봉건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과정에서(생산의 면에서는 자유로운 자본의 발생, 인간의 면에서는 독립되고 평등한 개체로서 인격의 성립) 그 봉건적인 것에서 구별된 자기를 자기로 삼아 역사에서 바라본 자기인식이다.” 풀이하자면 동양의 근대는 강제된 산물이나 서양의 근대는 유럽의 자기인식으로 출현하였다. 그 비대칭성으로 말미암아 서양에게 근대란 자기실현이나 동양의 근대는 서양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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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양의 근대화는 서양에 대한 저항을 동반했다. “저항을 통해 동양은 자신을 근대화했다. 저항의 역사는 근대화의 역사고 저항을 거치지 않는 근대화의 길은 없었다.” 하지만 동양이 저항한다고 서양의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양에 대한 유럽의 침입은 동양에서 저항을 낳고 그 저항은 자연스레 유럽으로 반사되었지만, 그조차도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대상화시킬 수 있다는 철저한 합리주의의 신념을 흔들어 놓지 못했다. 저항은 계산속에 있었고, 저항을 거쳐 동양은 점차 유럽화할 운명이라고 예견되었다. 동양의 저항은 세계사를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요소에 불과했다.”

동양은 서양화되는 동시에 서양에게 저항하나 그 저항은 서양의 근대를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데에 불과하다. 바로 헤겔의 역사철학이 주장한 바다. 또한 서양중심주의에 대한 섣부른 탄핵이 무위로 그치고 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양은 저항의 결과 패배할 뿐이다. 힘의 비대칭성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다케우치는 서양에게는 보이지 않는 저항, 이차적 저항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근대 극복과 탈식민의 계기를 모색하고자 「근대란 무엇인가」로 돌아가는 이유이다. 다소 긴 인용이 되겠다.

패배는 저항의 결과다. 저항에 의거하지 않는 패배란 없다. 따라서 저항의 지속은 패배감의 지속이다. 유럽은 한 걸음씩 전진하고 동양은 한 걸음씩 후퇴했다. 후퇴는 저항을 수반한 후퇴였다. 이 전진과 후퇴가 유럽에게는 세계사의 진보로 이성의 승리로 인식된다는 사실, 그것이 지속되는 패배감 속에서 저항을 매개로 하여 동양에 작용했던 때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다. 결국 패배는 패배감에서 자각되었다.

패배가 패배감에서 자각되기까지는 어떤 과정이 있었다. 저항의 지속이 그 조건이다. 저항이 없는 곳에서 패배는 일어나지 않으며, 저항은 있되 지속이 없다면 패배감은 자각되지 않는다. 패배는 한 번 뿐이다. 패배라는 한 번뿐인 사실과 자신이 패배한 상태라는 자각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패배는 패배라는 사실을 잊는 방향으로 자신을 이끌어 이차적으로 자신에게 따라서 다시 결정적으로 패배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그 경우 패배감은 당연히 자각되지 않는다. 패배감에 대한 자각은 자신에게 패배한다는 이차적인 패배를 거부하는 이차적인 저항을 통해 일어난다. 여기서 저항은 이중이 된다. 패배에 대한 저항임과 아울러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 혹은 패배를 망각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앞서 말했듯이 동양의 근대는 서양에게는 자기인식이다. 동양은 서양 속에 포함되어 있다. 동양은 서양을 자기 바깥의 상대로 인식하지만, 서양에게 동양은 자기인식의 일부일 따름이다. 따라서 ‘동양 대 서양’이라는 구도는 동양 측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동양의 세계(표상)는 늘 서양의 세계보다 작다. 그렇다면 상대를 대상화될 수 없을 때, 혹은 자신이 상대에게 속해 있는데도 상대에게 저항해야 할 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상대 속에 내재하기 때문에 상대의 바깥에서 상대를 대상화할 수 없으며, 상대의 바깥에서 대상화할 수 없기 때문에 판단의 척도 또한 실체성을 지닐 수 없다.

이제 인용구로 돌아간다면, ‘일차적 저항’은 동양의 의식상의 ‘동양 대 서양’에서 발생하는 저항이다. 그것은 지체를 만회하기 위해 근대화를 꾀하는 저항이며, 서양에게 반사되는 저항이며, 서양에게 승인을 요청하는 저항이며, 서양에게 보이는 저항이다. 그러나 ‘이차적 저항’은 자신이 패배하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는 것, 철저하게 패배자, 약자, 노예의 입장을 견지하고 그 한계조건을 다시 자기 안으로 내재화하는 저항인 것이다. 따라서 동양의 ‘이차적 저항’은 서양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차적 저항’은 헤겔 변증법의 반(反)이라는 항이 되지도 않는다. 부정이 부정된 항에 대립하여 주체가 정립된다는 의미라면, 이차적 저항은 부정이 아니다. 이차적 저항은 상대와 더불어 자신도 와해시키고자 한다. 서양과 서양을 통해 반사된 자기이미지 사이의 표상관계를 착란에 빠뜨리고,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비판하여 얻어지는 자기 동일성마저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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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차적 저항의 구체적인 방안은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무기력감을 우리에게 단서로 내어주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저항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저항의 의미를 파고들지 못한다. 나는 철학적 사색에 익숙하지 않다. 그런 것은 저항도 뭣도 아니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단지 거기에서 무언가를 느낄 뿐, 그것을 뽑아내서 논리적으로 조립하지 못한다. … 그리고 그때 루쉰과 만났다. 내가 느끼고 있는 그 공포에 루쉰이 몸을 던져 견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 루쉰의 저항에서 나는 내 마음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었다. 내가 저항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저항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루쉰에게 있는 그러한 것이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앞서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을 전근대적 면모를 지닌 채로 근대적이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다케우치의 이차적 저항을 사고하기 위해 루쉰을 탈근대적으로 읽어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다케우치와 루쉰을 탈근대론자로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케우치의 사상, 루쉰의 문학을 통해 탈근대론을 쇄신한다는 의미이다. 그때의 탈근대는 근대 이후에 오는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다. 서양의 근대는 동양을 전근대로 대상화하여 출발하였고, 동양의 근대는 서양에 패배하며 시작되었다. 패배와 패배에 따른 저항으로 출현한 동양의 근대 시간에 탈근대는 늘 감돌고 있었다.

다케우치는 우리에게 진정한 근대 비판의 단서를 내어주었다. 그는 동양이 서양을 극복할 수 있는지라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비대칭적인 힘관계를 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가 생각한 탈근대 내지 탈식민이라고 명명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서양의 근대가 동양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동양의 역사 속에서 서양의 근대를 ‘역사화’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서양의 근대는 그 비대칭적 구도로 말미암아 동양의 역사에서 결코 같은 위상이나 의미를 함축하지 않았다. 그 사실로부터 다케우치는 동양의 근대를 재해석하고, 서양의 근대마저도 ‘역사주의’에서 적출해내 ‘역사화’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동양의 탈근대, 곧 탈식민의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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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대목에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글의 말미에 나오는 유명한 일구다. “서구의 우수한 문화가치를 보다 큰 규모에서 실현하려면 서양을 다시 한 번 동양으로 싸안아서 거꾸로 서양 자신을 이쪽에서 변혁시킨다는, 이 문화적인 되감기 혹은 가치상의 되감기를 통해 보편성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서양이 낳은 보편적인 가치를 보다 고양시키기 위해 동양의 힘으로 서양을 변혁한다. 이것이 동과 서의 오늘날 문제입니다.” 다케우치는 피부색이나 얼굴은 다를지언정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고 강조하고, 그런 평등의 가치는 서구적 근대의 소산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서양은 그러한 문화가치를 보편화시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서구적 가치의 보편화가 비서구에 대한 식민지 침략의 논리로 전도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착취를 절감한 곳, 서구적 근대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상흔들을 마주하는 곳이 동양이니만큼 동양은 “문화적인 되감기 혹은 가치상의 되감기”를 통해 그 문화가치를 보편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이다. “그 되감기를 할 때에 자기 안에 독자적인 것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마도 실체로는 존재하지 않겠죠. 하지만 방법으로는, 즉 주체형성의 과정으로는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까닭에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제목을 달아보았지만, 그것은 명확하게 규정하는 일은 저에게도 벅차군요.”

다케우치는 분명히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아시아를 실체가 아닌 방법으로 내놓은 것은 후세대 논자들이 (동)아시아 문제를 사고할 때 귀중한 영감이 되었다. 그러나 섣불리 마지막 구절을 취해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의 결론으로 삼아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그저 사용하기 유용한 수사가 되어버릴지 모른다. 실제로 그렇게 차용되기도 한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다케우치의 문제의식으로 좀 더 바짝 다가가 이해하려면 다시금 「근대란 무엇인가」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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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란 무엇인가」에서 확인했듯이 동양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내적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이 대상화하고 종속시킨 지역이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동양은 공통성을 갖지 않는다. 거꾸로 서양 역시 균질한 통일체가 아니다. 서양이라는 담론적 구성물이 공간상 그리고 시간상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나의 동양은 오리엔탈리즘 안에서 존재하며, 하나의 서양은 동양의 식민화된 무의식 위에서 존재한다.

다케우치는 동양과 서양을 지리적 실체가 아닌 운동하는 항으로 보았다. “만약 유럽도 동양도 아닌 제3의 눈을 상정한다면, 유럽의 일보전진과 동양의 일보후퇴(이는 원래 표리관계다)는 하나의 현상으로 비쳐지리라.” 서양은 무력을 동반하여 동양으로 침입하고 동양은 식민화된다. 그러나 서양은 무력으로 침입할 뿐만 아니라 정신세계도 침입한다. 이 점이 「근대란 무엇인가」에서 핵심적인 대목이며, 오늘날 아시아가 여전히 서양의 식민통치에 놓여있지는 않지만 「근대란 무엇인가」를 다시 검토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케우치는 말한다. 서양에서는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도 전진한다. “모든 개념은 개념의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들은 장기의 말이 진전하듯이 나아간다. 말이 나아갈 뿐만 아니라 말이 놓인 판 자체가 말이 나아감에 따라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 … 이성․자유․인간․사회 무엇이라도 말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아마도 진보라는 관념은 이 운동 속에서 자기표상으로 튀어나왔으리라.” 서양은 정신이 운동하기에 부단히 자신을 넘어선다. 그러나 동양은 운동하는 서양의 정신과 만나면 그것을 정태화하고 실체로 여긴다. 서양의 전진이 동양의 후퇴라는 상호매개의 관계는 망각되고 단순한 가치판단과 서양을 향한 동경만이 남는다. “동양에는 이러한 정신의 자기운동이 없었다. 즉 정신 자체가 없었다. … 새로운 말이 잇따라 생겨나기는 하나(말은 타락하기 마련이니 새로운 말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말은 옛 말을 타락시킨다), 그것은 본디 뿌리가 없는 까닭에 탄생한 것처럼 보여도 탄생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서양에게 진보란 정신의 운동과정에 관한 자기표상, 자기 과거와의 대결을 통한 자기갱신이지만 동양의 진보란 서양에게서 새 것을 찾아 들여오는 일이 되어버린다. 다케우치는 일본이 그런 동양의 표본이라고 보았다. “나는 일본문화의 구조적인 성질 때문에 일본이 유럽에게 저항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일본문화는 바깥을 향해 늘 새 것을 기대한다. 문화는 늘 서쪽에서 온다.” 일본문화의 구조적 성질이란 무엇인가. 일본은 ‘우등생문화’다. 즉 지체를 만회하려고 분발하는 문화이다. “일본문화는 진보적이며 일본인은 근면하다. 그건 정말이지 그렇다. 역사가 보여준다. ‘새롭다’가 가치의 규준이 되며, ‘새롭다’와 ‘올바르다’가 서로 포개져 표상되는 일본인의 무의식적 심리경향은 일본문화의 진보성과 떼어놓을 수 없으리라.”

일본은 애초 “정신이 공석”이었던지라 서양의 진전이 곧 동양의 후퇴라는 상관성을 놓치고 서양의 진보를 고립된 실체로 여겨 그것을 쫓아간다. 그렇게 일본은 동양의 타국에 비해 재빠르게 근대화를 성취했다. 그러한 근대화를 위해 일본은 다케우치가 말하는 이차적 저항, 루쉰적 근대를 방기하였다. 다케우치는 신랄하게 표현한다. “우월감과 열등감이 병존하는 주체성을 결여한 노예 감정의 근원이 여기에 있으리라.” 그리하여 다케우치는 일본을 표본으로 삼아 동양의 이중적인 면모를 이끌어낸다.

그 현상(서양의 진보를 실체로 여겨 쫓아가는)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일본이 첫째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가장 동양적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일본은 동양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동양적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라 함은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생산력의 양적 비교를 일컫지 않는다. 나는 동양을 두고 저항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저항이 작다는 의미에서다. 이것은 일본이 자본주의화에서 보여준 눈부신 속도과 관계될 터이다. 그리고 그 진보로 보이는 것이 동시에 타락이라는 점, 가장 동양적이지 않은 것이 동시에 가장 동양적이라는 점과도 결부되리라.

여기서 동양은 오리엔탈리즘의 동양과 저항의 동양이라는 두 가지 계기를 갖는다. 그리고 다케우치는 중국을 향해서는 각각의 동양에 관해 일본과는 정반대의 평가를 내놓았다. 중국은 일본과 달리 이차적 저항으로 서양화에 뒤처졌지만 자신의 근대를 개척해갔다는 것이다. 「근대란 무엇인가」의 부제는 ‘일본과 중국의 경우’이다. 여기서는 우등생식으로 한 번 패하자 저항을 내려놓고 ‘근대화’에 매진한 일본과 저항을 지속하여 패배를 거듭하고 패배했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자신에게마저 저항하여 자신의 근대를 성취하는 중국이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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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본과 중국 근대의 비교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에서도 이어진다. 다케우치는 말끝을 흐렸지만 이미 거기에는 아시아를 방법으로 사유하기 위한 단서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방법으로서의 중국’이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에서 중국과 관한 내용을 소거한다면,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그저 그럴듯한 수사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가 중국과 어떻게 대면했는지를 읽어낸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중한 사상의 자원을 얻을 수 있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의 전반부는 다케우치가 어떤 연유로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와 더불어 ‘학문’에 대하는 그의 태도가 나온다. 그에게 중국연구란 중국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 감도를 시험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나문학을 전공하게 된 경위를 밝힌 뒤 ‘문학’을 독특하게 정의한다. “저는 우리 일본인이 생각하는 중국과 실제 중국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지 않을까 그런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 전공은 문학입니다만, 저는 문학을 넓게 보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의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방식, 나아가 그것을 통해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생활 자체, 그러한 것들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학문 말이죠. 사물 쪽에서 생활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면에서 생활을 응시해야 문학이다. 그러한 태도로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가 독특한 문학관을 갖게 된 계기는 유학 체험이었다. 그는 유학하는 동안 중국 사회생활의 주름진 곳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무기력을 느꼈으며, 그 무기력에서 출발하여 문학의 과제를 설정했다. 그것은 흔한 지역연구와 다른 태도이다. 즉 다케우치는 대상을 자기 지식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대상 속으로 진입하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자기 지식의 감도를 되물었다. 그리하여 그는 말한다. “중국을 공부하여 일본인이 지닌 중국에 대한 인식상의 결핍 혹은 오류를 고쳐나가고 학문의 성격을 바꿔가겠다고 목표를 세워두었습니다. 종래에도 한학이나 지나학이 있었지만 그런 죽은 학문 말고, 실제로 살아있는 이웃의 인간이 지니는 마음을 탐구하여 우리의 학문 자체를 바꿔가겠다는 것이 그때까지 제가 지니고 있던 바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 다케우치는 중국연구에서 다음 걸음을 내딛는다. “그때”란 1945년의 패전을 가리킨다. 패전 후 다케우치는 일본의 근대 과정이 어디서부터 뒤틀렸는지를 파고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작업을 위해 일본과 중국의 근대를 비교한 것이다. “후진국에서 근대화 과정에는 둘 이상의 형태가 있지 않을까. … 일본의 근대화는 하나의 형태이긴 했지만, 동양의 여러 나라가 혹은 후진국이 근대화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길은 아니며, 그밖에도 다양한 가능성과 길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케우치는 일본의 근대를 해명하려면 ‘서양 대 일본’이라는 기존의 이항대립이 아니라 중국을 참조하여 새로운 분석틀을 짜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근대화의 두 가지 형태를 생각할 때, 이제껏 그래왔듯 일본의 근대화를 늘상 서구 선진국과만 비교할 일이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학자만이 아니라 보통의 국민들도 그랬습니다. 정치가도 경제계 인사도 모두 그런 식이어서, 정치제도는 영국이 어떠니 예술은 프랑스가 어떠니 곧잘 비교하곤 했지요. 그런 단순한 비교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위치를 확실히 쥐려면 충분치 않습니다. 적어도 중국이나 인도 마냥 일본과 다른 길을 걸은 유형을 끌어와 세 개의 좌표축을 세워야 하겠구나, 그 당시부터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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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대 일본’이라는 이항대립은 오늘날 지역학의 틀에서 익숙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 경우 서양을 중심으로 방사형의 좌표평면이 만들어져 기타 지역들은 서양을 준거 삼아 자기를 인식한다. 그러나 다케우치는 말한다. “단순한 이원대립이 아니라 좀 더 복잡한 틀을 세워야하지 않겠느냐고 당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보편과 특수를 서양과 비서양에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특수의 관계를 근저에서 묻고자 서양과의 관계에서라면 또 하나의 특수에 놓일 중국을 참조축으로 도입한 것이다. 중국을 끌어들인다면 일본의 근대는 달리 표상될 수 있으며, 일종의 전위(轉位)가능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의 진술은 「근대란 무엇인가」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공적이라고 여겨졌던 일본의 근대화는 실상 서양의 것을 빌려오고 흉내낸 것에 불과하지만, 중국은 서양을 따라가기를 거부해 뒤처졌으나 보다 튼실하게 자신의 근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케우치의 중국 평가를 두고서는 이견이 많다. 중국의 근대를 지나치게 이상화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는 루쉰과 마오쩌둥을 매개 삼아 중국을 이해했으며, 일본인의 주체성과 일본의 근대를 사상적으로 되짚을 때 일본 상황의 열악함을 부각시키는 참조축으로 중국을 끌어들였다. 확실히 이처럼 이상화, 차라리 기능화된 그의 중국 이해는 실제의 중국과는 다를 수도 있었다. 더욱이 ‘중국의 굴기’가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 다케우치의 ‘저항하는 중국’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다케우치는 저항하는 중국, 뒤처진 근대에서 한 가지 사상의 가능성을 길어 올리고자 하였으며, 그것은 오늘날의 동아시아론에 몹시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뒤처진 자는 앞서간 자가 자명시하는 것들을 의심할 수 있는 사상의 계기를 쥐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근대가 오랜 시간 축적되어(그렇다고 여겨져) 그 성격이 은폐되어 있지만, 서양의 외부에서는 몹시 압축적으로 더구나 폭력을 동반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에 근대의 실상이 노출된다. 그 조건에서 지체를 만회하고자 서양을 분주하게 뒤쫓을 수도 있지만, 뒤처졌다는 한계에서만 가능한 근대 비판의 계기를 움켜쥘 수도 있다. 그 후자가 다케우치가 이해한 루쉰의 문학이며, 아시아 ‘근대성’의 진실된 모습이다.

또한 다케우치는 중국의 근대를 ‘방법’으로서 도입하였다. 즉 ‘방법으로서의 중국’은 ‘보편 대 특수’, ‘서양 대 일본’이라는 구도에 주박당한 세계인식을 뒤흔들고, 근대 과정에 새겨진 식민성과 폭력성을 일깨우도록 만들었다. 일본의 근대화에서 아시아를 방법이 아닌 실체로 삼았을 때 그 정치적 귀결은 집단방위권을 설정하고 서양에 맞선다는 명목 아래 주변 지역을 식민화하고 전쟁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서양이라는 ‘보편’의 거울에 자기를 ‘특수’로서 비추는 한 일본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의 최대치는 주인-노예의 관계에서 주인의 위치로 자리를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나 다케우치는 「근대란 무엇인가」에서 말한다. “노예는 자신이 노예라는 자각을 거부하는 자다. 그는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 진정한 노예이다. 노예는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 되었을 때 완전한 노예근성을 발휘한다.” 그러한 노예근성이 발휘되는 패권의 장이 아시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일본의 근대화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현재 ‘동아시아’는 주도권을 둘러싼 경합 가운데 배제적 범주가 되어가고 있다. 특정 기준에 따라 실체화되는 동아시아는 권력화될 것이다. 그러나 다케우치가 아시아를 방법으로 삼았을 때 그것은 ‘서양 대 동양’이라는 구도가 함유한 독소를 직시하기 위해 성찰적 지평을 마련하고, 서양을 척도 삼아 경주해온 근대화의 노정을 되묻고, 이곳의 역사 속에서 서양의 근대마저도 역사화하기 위한 시도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이중의 저항으로 돌아간다. 서양이라는 타자를 거부하나 서양을 뒤쫓아 자신을 실체화한다. 이것이 일차적 저항이고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면, 이차적 저항이란 서양이라는 타자에 저항하나 자신의 실체화 역시 거부하는 운동일 것이다. 그 운동은 어떻게 표상가능할 것인가. 답하기는 쉽지 않지만, 다케우치의 아시아가 그 운동의 궤적을 그려내는 방법이 되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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