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일곱 가지 밤», 청소년을 위한 고전의 좋은 예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청소년들을 위한 고전 수업을 계획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적당한 책을 고르는 일이다. 책이 없어서 그런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서점에 가보면 청소년을 위한 고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문제는 많은 책이 너무 쉽다는 데 있다. 이런 책들은 대부분 수준을 낮추는 방법을 택한 책이다.

그런데 이런 ‘쉬운 고전’을 읽어서는 도무지 고전을 ‘읽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기 쉽다. 도리어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나은 경우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쉽게 쓴다는 핑계로 내용을 대폭 삭제해버리기거나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대치해놓았기 때문이다. 결국엔 대충의 줄거리에 대한 이해만 남는다. 그것도 왜곡된. 비유하자면 영화 예고편만으로 마치 영화를 본 것처럼 착각한다고나 할까. 아예 노골적으로 간단한 줄거리만 정리해놓은 책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쉬운 책 대신 친절한 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고전의 내용을 충실히 담아내되 읽기 좋게 번역한 책이어야 한다. 고전이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엄숙한 티를 내는 책도 문제기는 하다. 읽을 수 없는 언어, 번역투의 문장으로 가득한 책은 당연히 제외해야 한다. 덧붙여 내용을 아무리 잘 옮긴 책이라 하더라도 편집 상태가 엉망이라면 선뜻 고르기 어렵다. 책이란 물질적인 텍스트인 만큼 디자인이나 구성도 꽤 중요하다.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편집이나 디자인에서 좋은 책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그래도 최근에는 청소년이 읽기에도 적당한 ‘좋은 고전 번역서’가 많이 나오고 있다. 서점을 배회하다 보면 가끔 저절로 읽고 싶게 만드는 좋은 책을 발견하게 된다. 이럴 때의 반가움이란. <일곱 가지 밤> 역시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보배 같은 책이다. 내용, 구성, 디자인까지 마음에 쏙 든다.

<일곱 가지 밤>은 조선 후기 문인인 이옥의 단편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옥은 주로 정조 시대에 활동했다. 뒤에 붙은 안대회 선생의 글에서 볼수 있듯 그는 ‘글쟁이’이라는 호칭이 진정으로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오죽했으면 쓰는 문장 때문에 정조에게 꾸짖음을 들은 것은 물론 성균관에서 쫓겨나기까지 했을까. 게다가 과거 시험자격까지 박탈당했다.

지금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정조는 글이란 모름지기 세상의 이치를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옥은 그 ‘이치’를 담아내기는커녕 화려한 기교에 시시콜콜한 소재들로 글을 쓰고 있으니, 정조의 눈 밖에 난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엔 지방으로 쫓겨나 내려가 병사 노릇까지 하게 된다. 한마디로 임금님에게 크게 찍힌 셈.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관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말년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 삶을 마감하게 된다.

도대체 어떤 글을 썼기에 그런 것일까? 그가 글감으로 삼은 소재만 보아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일곱 가지 밤>에는 여러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傳’이라는 형식으로 쓰인 이 글들은 다양한 인물의 삶을 재미있게 풀어낸다.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소리꾼. 어찌나 노래를 잘 불렀는지 사람들이 ‘귀뚜라미’라고 불렀을 정도란다. 요즘으로 치면 예능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옥은 이 사람을 글감으로 삼아 한편의 멋진 글을 만들었다.

이어서 나오는 사람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점입가경이다. 귀신을 내쫓은 나머지 귀신을 대신해서 제사를 받았다는 최 생원의 이야기부터, 사기꾼으로 여러 사람을 골탕먹인 이홍, 게다가 과거 시험지를 대신 써줘서 호강을 누린 류광억까지. 신비한 호랑이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흔히 고전에서 만나기를 기대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사기꾼에 글장수라니!

바로 이것이 이옥의 재주이다. 낯선 이들을 글로 초대하는 것. 훌륭한 선비를 칭송하는 글만이 아니라, 교훈으로 가득 찬 꼰대 같은 글이 아니라 제각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것. 이것이 이옥의 글이 가진 매력이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면 그가 살았던 시대도 오늘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글 읽는 선비와 땅을 일구는 농사꾼만 있었던 게 아니라 다채로운 삶이 있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오늘날과 별 차이 없는 동시대성을 확인하는 일. 이것이 바로 고전을 읽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고전의 이야기가 그저 과거에 머물러있는 이야기일 뿐이라면 고전을 통해 익힐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와 무관한 과거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일 뿐이다. 똑같은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삶의 다른 측면들을 슬쩍슬쩍 엿볼 수 있게 된다.

글감을 선택하는 이옥의 재주도 재주지만, 옛 한문으로 된 이옥의 글을 오늘 말로 옮겨낸 서정오 선생의 솜씨도 돋보인다. 마치 옆에서 이야기해주는 것 마냥 그의 문체는 살아 있다. 그의 글은 눈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입으로 읽어야 제맛이 나는 글이다. 이 책을 손에 쥐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단박에 깨칠 수 있다.

잘 다듬은 손길 때문인지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귀한 책이 되었다. 초등학생 저학년부터 중고생은 물론 어른까지, 여러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해주었는데 모두 만족스럽단다. 좋은 책, 좋은 고전이란 나이를 뛰어넘어 읽히는 책이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예쁘게 책을 만들어 놓은 편집자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보기 좋은 책이 읽기도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에 들어간 적절한 삽화는 읽는 내내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절한 도움을 주었다. 청소년들에게는 책의 크기, 자간, 삽화까지도 좋은 책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책이란 모름지기 활자들의 조합만이 아닌 것이다.

얼마 전 중학생 청소년들과 함께 고전을 읽는 수업을 새로 시작했다. 첫 번째 책으로 이 <일곱 가지 밤>을 꼽아보았다. 결과는 역시 대만족. 혹시 고전하면 딱딱하고 어려운 책만 떠오른다면 이 책을 읽어보자. 멋진 이옥의 문장과 더불어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참! 다시 강조하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 꼭 소리내어 읽어보자. 문장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응답 5개

  1. 이승주말하길

    저는 중학교 사서입니다..요즘 우리 학생들에게 책읽어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요, 선생님이나 학생들 모두 책읽어준다는 것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나 봅니다… 초등학생도 아닌 중학생들에게 뜬금없이 책읽어주기라니…하는 반응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주변의 시큰둥한 반응을 단번에 제압해 버릴 수 있는 낭독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드네요 . 제가 먼저 빨리 읽어보고 우리 아이들에게 낭독을 통해 고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2. 조르바말하길

    국문 부전공 할 때도 고전은 꼭 피해 듣던 수업인데, 요렇게 들으니 매우 공부하고 싶어지는군요^^

  3. 연초록말하길

    책소개 글만으로도 읽고 싶어지네요.

    그것도 꼭 소리내어서.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김현식말하길

      저는 여러 편의 글 가운데 심생과 처녀(심생전)이 가장 재미있었답니다.

      추천해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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