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네 편의 영화를 통해 본 전쟁국가 이스라엘(2): 바시르와 왈츠를 (2008)

- 황진미


<바시르와 왈츠를>은 이스라엘의 아리 폴만 감독이 자전적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적으로 구성한 독특한 애니메이션으로,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샤브라 난민촌 학살을 다룬다.

레바논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투르크 영토를 분할하는 싸이크-피코 협정에 따라 프랑스 통치지역에 속했던 ‘대 시리아’지역을 프랑스가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분할하면서 탄생한 국가이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등 17개 종파가 공존하는 가운데, 기독교도를 식민통치에 앞세운 프랑스의 위임통치가 20년간 계속되면서, 마론파는 정치적 경제적 수혜자가 되었다. 1943년 독립당시 부유한 마론파와 가난한 무슬림이 대립하는 가운데, 기독교와 무슬림의 협정 하에, 1932년 인구센서스를 기초로 대통령은 마론파,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에 배분하고, 국회의석수를 기독교와 무슬림의 6:5로 배분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빈부격차는 더욱 커졌고, 1948년 전쟁으로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인들이 남부에 난민촌의 형성하면서 무슬림 인구가 늘어났지만, 무슬림의 인구조사 요구는 거부되었다. 무슬림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1958년 아랍민족주의를 배경으로 시위에 나선 무슬림이 친 서방 마론파 정권의 미군에 파병요청에 항의하면서 충돌하여 1차 내전이 일어난다.

1차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19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더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형성되고, PLO를 비롯한 해방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자, 레바논의 기독교와 무슬림의 갈등은 더욱 첨예화된다. 1970년 요르단에서 축출된 PLO본부가 레바논으로 옮겨오자,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와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공격하였다. 이어 레바논 정부군도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공격하고, 기독교민병대와 PLO게릴라들이 전투를 벌임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다. 1975년 기독교 팔랑헤 당원이 베이루트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습격한 사건을 계기로, PLO 및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간의 ‘2차 레바논 내전’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대되자, 1976년 레바논 정부는 시리아에 파병을 요청한다. 레바논에서 시리아의 영향력을 의심하던 이스라엘은 1978년 레바논 남부를 전격 점령하였다가, 1982년에는 레바논에 친이스라엘 정부수립을 목적으로 본격적인 침공을 감행한다. 이스라엘군은 레바논남부에 무지막지한 폭격을 퍼부어, PLO 본부를 튀니지로 내쫓고, 서베이루트에서 시리아군과 PLO게릴라들을 포위 공격하였다.

<바시르와 왈츠를>는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남부 레바논 침공으로 약 2만 명의 레바논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살해되고, 1982년 9월에는 이스라엘군이 서베이루트를 포위한 가운데,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은 기독교민병대 팔랑헤당원들에 의해 사브라와 샤틸라 두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여성과 어린이등 3천 명이상이 학살되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삼는다. 영화는 개들의 미친 듯한 질주로 시작된다. 이것은 한 친구의 악몽이다. 그는 2년 반 동안 20년 전 레바논 참전 당시 쏘아 죽였던 개들이 나오는 악몽을 꾼다고 말하며, 영화감독인 주인공에게 너는 어떤가하고 묻는다. 주인공은 “No, No”하며, ‘기억에 없다’고 답한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당시의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러나 ”No, No”라는 반복적인 부정의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의식의 차원에서는 망각이 이루어졌지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강한 억압이 작동하는 상태이다.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서 단 하나의 영상이 떠오른다. 그것은 조명탄이 쏟아지는 바다에서 알몸의 남자들이 해변으로 걸어와 군복을 입고 공포에 질린 아랍 부녀자들 사이를 걷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친구는 그 이미지가 가짜 기억일 수 있으며, 사실 확인을 위해 참전했던 친구들을 찾아가보라 조언한다. 주인공은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렵다고 생각하면서도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화염 속에서 친구들이 솟구치는 배위에서 거대한 여자의 품에 안겨 바다 위를 떠가는 몽환을 경험한 것이나, 소풍처럼 탱크로 국경을 넘었다가 총격을 당해 도망치다 낙오되어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을 들려준다. 이들과 만나며 주인공은 점점 더 많은 것을 기억해낸다. 탱크로 죽은 군인과 부상자들을 기계적으로 운반했던 것이나, 점령한 해변에 주둔했던 때를 뮤직비디오나 게임장면처럼 회상해내면서도 정찰 중에 기관포를 쏘던 소년을 난사했던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처럼 파편적이고 몽환적인 주인공의 기억에 대해 영화 속 심리학자는 해리성 기억상실, 즉 끔찍한 현실을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상상적 카메라’를 통해 인식하는 심리적 방어기제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레바논의 기독교 대통령당선자 바시르가 암살당했다는 소식과 함께 베이루트로 출격한 주인공은 그 와중에도 옛 애인과 해외여행에 대한 몽상에 빠진다. 온통 바시르의 초상이 걸려있는 베이루트 거리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한 친구는 무아지경에 빠져 마치 왈츠를 추듯 기관총을 난사한다. 주인공은 유독 공백으로 남은 학살 당일의 기억을 찾기 위해 참전자와 기자를 만난다. 그들은 이스라엘군이 베이루트를 포위하는 동안 레바논의 팔랑헤당원들이 노인과 어린이등 수많은 난민들을 학살하였으며, 주인공은 후진에서 조명탄을 쏘아 학살을 도왔다. 학살 사실은 상부에 보고되었고, 국방부장관까지 알고 있었다. 현장의 군인들은 팔랑헤당원들이나 군 지휘부에 책임을 떠넘겼지만, 장교 한명의 명령만으로도 학살은 중지될 수 있었다. 학살직후 시체들로 넘쳐나는 난민촌을 묘사하는 기자의 말을 들으며, 주인공은 비로소 그 자리에 자신도 있었음을 알게 된다. 부녀자들이 곡소리를 내며 떼 지어 걸어오는 저편에 주인공이 서있다. 그리고 내내 애니메이션이었던 화면이 실사로 바뀐다. 이때가 주인공의 몽환적 기억이 명징한 현실적 기억으로 참혹하게 되살아나는 순간이며, 영화의 메시지가 가장 충격적으로 응축된 엔딩장면이다.

다큐멘터리에 속하는 영화를 특이하게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이유는 실사에 비해 직접적인 노출을 꺼리는 인물들의 인터뷰 화면을 얻기 쉽고, 전쟁 스펙터클과 판타지장면을 구성하기에 경제적인 부담이 적다는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독창적인 형식은 그 이상의 효과를 성취하였다. 독특한 질감의 애니메이션과 팝과 클래식이 리드미컬하게 교차되는 음악은 전쟁의 기억에 대한 주․객관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하였다. 영화는 전쟁이라는 상황을 맞닥뜨린 군인들의 주관적 심상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공포와 죄의식을 잊기 위해 주체를 방기하고, 기계적인 행위에 함몰하거나 판타지를 통해 현실을 도피하고자 한다. 영화전체의 핵심적 실마리가 되는 주인공의 부분 기억상실 역시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아의 무의식적 작용의 결과이다.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 주인공이 난민촌 학살에 간접적으로 가담하게 된 데에서 오는 죄책감을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살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책임은 간접적일 뿐이라는 선을 확고히 긋는다. 주인공과 함께 참전했던 친구는 “나는 팔랑헤 놈들이 얼마나 잔인한 놈들이지 일찍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놀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심리학자인 친구는 “자네가 가지고 있는 난민촌과 학살의 이미지는 아우슈비츠로부터 온 것이며, 자네는 단지 100야드 밖에서 조명탄을 쏘며 학살에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 직접 학살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라며 주인공을 위로한다. 즉 학살의 책임은 팔랑헤에게 있으며, 이스라엘은 간접적인 책임만을 지닌다는 것이다. 영화는 전쟁에 참전한 개인의 심리적 고통을 잘 보여주는 반면, 전쟁 가해국의 주권자에게 기대되는 정치적/윤리적 책임은 아주 조금 보여준다. 이를테면 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한 일본군 역시 개인적으로는 전쟁의 피해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 피해를 전면화하면서 일본의 전쟁책임을 아주 제한적으로만 인정하는 (가령 ‘한일합방은 조선왕조가 원해서 일어난 것’ 따위의 발언을 하는) 텍스트의 정치성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겠는가?

요컨대 <바시르와 왈츠를>을 보고나서 전쟁이 참전용사나 피해국민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기는지를 느낄 수는 있다. 더불어 1982년도에 레바논에서 이스라엘과 동맹관계였던 기독교팔랑헤 당원들이 그들의 우상인 바시르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학살하였는데, 이스라엘군은 그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이스라엘군이 애초에 왜 레바논에 탱크를 몰고 ‘소풍을 가듯’ 국경을 넘었고, 한 달 만에 무엇을 하기 위해 해변을 점령했는지, 과수원에서 기관포를 쏘던 소년은 누구이며, 전쟁광처럼 변해버린 전우가 ‘바시르와 왈츠를’ 추었던 베이루트 시가지에선 누구와 총격을 벌인 것인지 그 이유나 배경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난민촌 학살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책임을 대단히 모호하게 그리며, ‘아우슈비츠로부터 학살에 대한 심상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양심적 지식인이 품은 과잉된 도덕적 감수성으로 처리해버린다. 이는 1983년 이스라엘 정부가 <카한 위원회>의 책임아래 자체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스라엘은 ‘아랍인들의 피에 대한 갈증’을 과소평가하는 태만을 저질렀을 뿐, 학살의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결론내린 것과 궤를 같이 하며,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줄 곳 가해자인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홀로코스트를 환기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피해자적 이미지와 자의식을 재생산해온 것과 동일한 전략이다.

그러나 학살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은 훨씬 직접적이다.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 동맹의 균열을 꾀하기 위해, 이슬람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레바논에 친이스라엘 정부수립을 목적으로 이미 1968년, 1976년, 1978년, 1981년 등 여러 차례 침공을 반복해왔다. 1982년 난민촌 학살 역시 바시르의 죽음으로 인해 잔혹한 레바논인(아랍인)들 사이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1982년 레바논 침공이 있기 전, 이스라엘의 샤론 국장부장관과 레바논의 바시르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50만에서 5만으로 줄일 것을 공언하였다. 샤론의 승인아래 이스라엘군은 이미 여러 달 전에 팔랑헤의 난민촌 진격을 계획하였고,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팔랑헤를 소집하고 훈련하였으며, 학살이 일어나는 이틀 동안 난민촌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고 포격과 저격을 퍼부으며 밤에는 조명탄을 밝혀 학살을 지원하고, 학살 후 중장비로 시체 묻는 작업을 도왔다. 이후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에서 철군하지만, 레바논영토의 11%에 이르는 남부지역에 22년간 군대를 배치한 채, 1988년, 1992년, 1993년, 1996년 등 여러 차례 군사작전을 펼치면서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인들을 살해하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화해무드가 조성되던 1991년 레바논 내전이 종식되고, 2000년에는 이스라엘군은 철군하였지만, 이후 헤즈볼라와 이스라엘간의 간헐적인 교전이 이어졌다.

2006년 팔레스타인에서 하마스가 집권하자 이스라엘은 또다시 헤즈볼라 소탕을 명분으로 레바논 남부를 침공한다. 이때 1,200명의 사망자 중 95%는 민간인들이었다. 헤즈볼라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결성된 시아파 무장단체로, 레바논인들의 지지를 받는 제도권정당이다. 헤즈볼라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이들이 파괴된 집을 복구하고 굶주림을 없애고 교육과 의료 사업을 펼치는 등 이슬람식 사회복지 네트워크를 펼치기 때문이다. 2006년 레바논 침공 당시 베이루트 조사정보세터에 따르면 레바논인 86.9%가 헤즈볼라를 지지한다고 응답하였다. 당시 미국과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정부 역시 2006년 레바논 침공 당시부터 헤즈볼라를 테러단체로 규정하였고, 2007년부터 레바논에 동명부대를 파병하여 현재까지 헤즈볼라를 비롯한 무장 세력의 활동을 정찰하는 임무를 수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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