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주민증 빼고 다 바꿀 수 있을까

- 은유

재작년에 강남의 유명한 음식점에 취재 갔다가 들은 얘기입니다. 사장님이 나름 대형요식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패밀리 레스토랑을 들여와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군요. 그 때가 베니건스, T.G.I Friday, 아웃벡스테이크 등이 성업을 이루다가 절반 이상 문을 닫아가던 시기였습니다. 한 발 앞서 트렌드를 읽을 만큼 사업적 감각이 남달랐던 그 분은 ‘쇠락의 징조’도 간파하여 일찌감치 그 업계를 빠져나와 새로운 음식점을 차린 것입니다. 사장님은 패밀리 레스토랑이 줄줄이 망한 이유에 대해 “이게 다 카드할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좋은 재료를 써서 양질의 음식을 만들었죠. 손님도 많았고요. 그런데 카드할인이라는 제도가 생기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고객의 80%가 신용카드와 통신사멤버십카드를 이용해서 20%내외로 할인혜택을 받아요. 그럴 경우 정가 만 원짜리 음식도 8천원에 팔리는 셈이죠. 거기에 맞게 원가와 마진을 책정하려다보니 어쩌겠어요. 오뚜기 참기름 못 쓰고 싼 참기름 쓰고 그러면 당연히 음식의 질이 떨어지고. 손님은 금방 알아요. 음식이 맛없으면 안 와요.”

모두를 위한 할인이지만 누구를 위한 할인도 아닌 혜택! 막연히 추측은 했었지만 직접 얘기를 듣고 나니 ‘할인율’에 연연하던 순간들이 떠올라 살짝 허탈했습니다. 또한 음식점 입장에선 카드할인이 없으면 손님이 줄어드니까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혹은 윈윈하는 취지에서 업무제휴를 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가령 요즘도 파리바게트는 LG통신사 카드를 제시하면 10% 할인해줍니다. 패밀리마트에서는 SK 통신사 카드를 제시하면 12%를 할인해주고요. 남들 척척 할인 받을 때 정가대로 지불하려면 억울합니다. 100원 200원이 평소에는 푼돈이지만 할인금액이 되는 순간 화폐가치가 급상승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혜택이 펑펑 쏟아진다는 각종 신용카드와 멤버십 카드를 만들기 시작했겠지요.

그러는 사이 우리 삶의 터전에는 순식간에 거대 자본이 다니는 길이 닦였습니다. 서울의 경우 지하철 주요 환승역엔 이마트가, 일반역에는 파리바게트, 던킨도너츠 등 대형프랜차이즈 점포가 유동인구를 빨아들입니다. 대기업-카드회사-통신사가 결탁하여 시장을 장악했고 그 와중에 동네 빵집과 구멍가게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제 이마트가 국민간식인 피자와 어묵, 떡볶이까지 팔면서 소비도 이념으로 하느냐?고 따집니다. 이념으로 소비했더군요. 누가 뭐래도 ‘싼 게 최고’라는 가치를 내면화하면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자본주의적-이념소비’에 충실히 복무했던 것입니다.

싼 값. 할인과 적립. 우리 삶을 복되게 할 줄 알았던 이것이 점점 삶을 옥죄여옵니다. 철지난 유행어대로 살림살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간 꼼꼼히 따진 효율과 합리가 ‘있는 자’를 배불리고 ‘없는 자’를 내쫓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눈앞의 최대의 효용만을 바라면서 소비한다는 경제학적인 사고는 미국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지지를 잃었다”고 정원각 아이쿱 사무국장은 말합니다. 또 당부합니다. ‘내가 피자를 먹기 위해 지불한 돈이 어떻게 흘러가는가에 대해 1분만 생각해 달라’고요.

유럽에서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오후 7시면 문을 닫는 동네 가게들. 계산원에게 왕으로 군림하기보다 이웃으로 대하는 소비자들. 도심 외곽에 자리 잡아 소상인 목을 조르는 일이 없는 대형마트 등. 소비구조의 골격이 잘 짜인, 스위스의 눈 내린 풍경만큼이나 아름다운 삶의 풍경을 맹찬형 연합뉴스 제네바 특파원이 생생히 들려줍니다. 자본의 효율이 마치 국민전체의 효율인 것처럼 눈 멀게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렇습니다. ‘효율’의 도구인 형형색색 카드가 지갑을 점령해버린 뒤로 삶이 더 부산스러워지고 세상이 참 각박해진 것 같습니다. 마누라 빼고 다 바꾸는 요란한 조직 개혁만 있는 게 아닙니다. 주민증 빼고 다 버리는 조용한 지갑 혁명도 상상해볼만 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떤 환경운동가는 4년마다 한번 하는 투표용지가 아니라 매일 쓰는 영수증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했습니다. ‘자본주의적’ 이념소비에서 ‘공동체적’ 이념소비로의 전환. 그래서 이번 주 위클리 수유너머 테마는 ‘이념소비 VS 이념소비’입니다. 오타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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