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공방 통신

대안적 소비, 소비의 기쁨

- 사루비아

무조건 참는다

새 계절이 옷장 앞까지 오면 늘 내뱉게 되는 말.
“아, 입을 옷이 없네. 작년엔 대체 뭘 입고 다닌거야”
궁시렁 거리다가 결국엔 티셔츠 하나라도 기어이 사고 집에 오면 이제는 그 티셔츠에 받쳐 입을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바지를 사면, 그 바지에 맞춰 신을 구두가 아쉽다. 그러다 보면 가방도 사고 싶어지고…. 끊임없이 결여를 생산하는 현대 사회에서의 소비는 끝이 없다. 대체 얼마나 소비해야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포털사이트의 첫 화면은 아예 노골적으로 사라고 부추긴다.

정말 벗고 다닐 정도로 입을 옷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상품이 단지 사용가치만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권위나 타인과의 차이를 과시하는 ‘기호’로 작용하게 된 것을 지적한 사람은 프랑스의 사상가인 보드리야르였다. “사람들은 결코 물질 자체를 ‘그 사용가치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적인 준거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집단에의 소속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보다 높은 지위의 집단을 지향하고 현재의 자기집단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타인과 구별 짓는 기호로써 물질소비를 항상 조작하고 있다.”

보드리야르

보드리야르 선생님의 말씀을 맘에 새기며, 현대사회의 소비에 저항하기로 다짐한다. 첫 번째 방법.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참기. 금욕!!
보라색 실크 원피스가 너무 사고 싶지만 참는다. 이 욕망은 진짜 내 욕망이 아니라 소비 사회가 만들어 낸 욕망이니까. 그렇게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외출할 곳도 없으니까(그 옷을 입고 연구실 공부방에 앉아 있는 것이 더 우울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난 원피스를 살 돈이 없다. 가난하니까. 하지만 ‘내가 가진 욕망은 잘못된 것이기에 억눌러야 해’라는 생각은 정신건강에는 조금 해롭다. 보드리야르 책 백 날 읽으면 뭐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예쁜 원피스가 갖고 싶은 걸. 난 왜 이럴까. 왜 공부와 몸이 따로 놀까. 아- 이런 내가 싫다.
이렇듯 내 자신에게 규제를 강요하는 금욕적인 방식이 지나치면 하나도 즐겁지 않을뿐더러, 나를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나는 착한 소비자예요

소비에 저항하기 위해 금욕을 전략으로 삼는 것은 정신이 빈곤해질 수 있기에 ‘착한 소비’를 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꿔본다. 이왕이면 생협 제품을 구매하는 것,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공정무역 마크가 붙은 제품을 이용하는 것이다. 대형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는 조금 비싸더라도 난 ‘의식있는’ 소비자니까 생산자를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 ‘착한 소비’를 할 때에는 참 뿌듯하다. ‘착한 일’을 했다는 기분이 든다고할까? 왠지 누군가가 “너는 돈도 많이 못 벌면서 참 정치적으로 올바른 소비를 하고 있구나. 장하다.”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으면 좋겠다. 내 소비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슬쩍 생긴다.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순간, 나는 또 다른 무언가에 얽매인다. 아-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아이들은 벌을 주기보다는 칭찬을 할 때에 더 말을 잘 듣는다. 하지만 칭찬으로 아이를 어른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고 한다면, 점점 그 칭찬의 정도를 높여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칭찬을 중단하면 아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어른으로부터 칭찬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는 것이 더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3.

소비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고, 또한 그것을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지 않고 오롯한 내 기쁨이 될 수 있는 그런 소비가 있을까? 소비를 통해 남들과 차별화를 두면서 갖는 기쁨이 아니라, 인정 욕망을 벗어나 무언가 함께 한다는 기쁨을 누리게 하는 소비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이 대안적인 소비가 될 것 같은데 말이다.

보름 전, 수유너머N에서 열렸던 벼룩시장이 생각난다. 나누어 쓰고 싶은 물건들을 받아 돗자리 하나 펴 놓고 무조건 1-2천원에 팔았다. 벼룩시장의 목적은 팔아서 이윤을 남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놀아보려고 판을 벌였다. 한 쪽 주방에서는 빵을 굽고, 돗자리 옆 소파에서는 바느질을 하고, 벼룩시장을 구경하러 동네 사람들도 들리고, 갓 구운 빵과 함께 선물 받은 홍차를 마시고, 아이들(이안과 린)은 벼룩시장에 나온 옷을 온 몸에 휘감으며 놀았다. 벼룩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 또한 놀이였다. 세미나를 하다가 쉬는 시간에 나와서 한 손엔 간식을 들고, 한 손으로는 서로에게 어울릴법한 옷을 골라주며 깔깔대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는 왜 그렇게 즐거웠을까? 커다란 종이봉투 한 가득 물건을 샀지만 5천원을 넘지 않았던, 장바구니는 무겁지만 가벼운 가격 때문이었을까? 예쁜 목도리를 1천원에 샀다는, 우리는 합리적 소비자라는 의식 때문이었을까? 없는 살림에 알뜰한 소비를 했다는 뿌듯함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한 긍정,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도를 깨달은 선승도 아닌 속세에 사는 나에게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는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꾸 결여를 생산하는 소비가 싫어서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면 내 외부에 척도가 세워지고 그 척도에 맞춰지지 않는 나를 부정하게 된다. 소비의 욕망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욕망의 방향을 살짝 틀어 기쁨을 생산하는 것이 속 편하고 더 쉬울 것 같다. ‘하고 싶지만 참아야 해’가 아닌.

‘이것을 하는 것이 더 기쁘고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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