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네 편의 영화를 통해 본 전쟁국가 이스라엘(3) <천국을 향하여> (2005)

- 황진미


1977년 이집트가 아랍국가 중 최초로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조인한 후 PLO는 온건노선을 견지하지만, 1982년 레바논 침공으로 온건노선은 위기를 맞는다. 1987년 말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인티파다’ 가 일어나, 전 팔레스타인인들이 조직적인 항의시위와 파업,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한다. 이스라엘은 총격, 투옥, 고문, 추방, 강제철거, 경제봉쇄로 맞섰는데, 인티파다 기간 중 어린이 353명을 포함하여 1,347명이 사망하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들을 강제 추방한 서안지구에, 1989년 동구권 붕괴이후 구소련으로부터 몰려든 유대인이민자를 받아들여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세계유일 강대국이 된 미국은 1991년 걸프전 승리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온건 아랍 국가들과 친밀해지자, 전략적 중요도가 낮아진 이스라엘에게 팔레스타인과 협상할 것을 종용한다. 이스라엘 역시 팔레스타인 측으로부터 합법성을 보장받고, 민중항쟁을 통제할 ‘팔레스타인 임시자치정부’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PLO 온건파와 협상에 임한다. 한편 PLO온건파는 소련의 후원도 잃고, 걸프전에서 이라크를 지지한 대가로 아랍세계에서 고립된 데다,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인티파다 과정 중 창설된 무장투쟁조직 하마스에게 주도권을 상실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하여 협상에 나선다. 그 결과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를 골자로 한 오슬로협정이 체결된다.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 라빈총리와 아라파트 PLO의장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겼지만, 중동의 평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1994년 이스라엘의 극우파들은 헤브론에서 29명의 이슬람인들을 학살한데 이어, 1995년 라빈총리를 암살하였다. 1996년 하마스는 무장투쟁을 재개하고, 이스라엘 총선에서는 우파정권이 들어서는데, 그 결과 이스라엘군의 철군이나 팔레스타인 난민문제 등에 대한 협상은 진척되지 못한 채, 1998년 이스라엘군의 1단계 철수이후 철수가 중단되었다. 그 결과 1996년 총선으로 들어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여러 개의 구역으로 찢긴 지역 중 극히 일부에서 제한된 자치가 수행되는 ‘무늬만 자치정부’가 되었다. 자치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자행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1976년 수립되었던 ‘반투스탄’ 자치정부와 다를 바 없었으며, 주권과 자결의 헛된 이미지로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압제를 가리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평화협상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토지를 강탈하고 경제를 고사시켰으며, 서안지역에 꾸준히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점령민의 수가 거의 두 배로 증가한 가운데, 정착촌 안전을 이유로 이스라엘군을 배치하였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는 2000년 샤론(1982년 레바논 학살 당시의 국방장관)극우정당 당수의 ‘알 아크사’ 이슬람 사원 방문을 격렬하게 항의하는 군중들을 이스라엘 군대가 무력 진압한 사건을 계기로 폭발한다. ‘2차 인티파다’로 자살폭탄테러 등 조직적인 무장투쟁이 어어 지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을 폭격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관할지역을 재점령하고 자치정부시설을 파괴하였다. 2001년 집권한 샤론총리는 분리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하여, 2002년까지 서안지역 안쪽에 지그재그로 130km의 장벽을 쌓았다.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중동 내 반미정서가 강해지자 부시정권은 중재에 나선다. 미국이 내세운 ‘로드맵’에는 팔레스타인 국가창설이 명시되어 있지만, 애매한 영토규정과 위기의 원인을 팔레스타인의 테러에 두는 등 그 한계가 명확했다. 샤론총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하마스를 비롯한 모든 무장 세력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면서, 이들 조직과 기반시설의 완전 해체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2004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공습하고, 하마스를 창설한 야신과 야신에 이어 하마스의 대표로 선출된 란시티를 암살하였다. 2차 인티파다 이후 2008년까지 이스라엘군에 의해 죽거나 다친 팔레스타인인은 3만 명이 넘고, 파괴된 가옥은 6천여 채에 이른다.

<천국을 향하여>는 서안의 나블루스를 배경으로 자살폭탄테러에 나서는 젊은이들을 담은 영화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아부 아시드 감독은 팔레스타인 현지의 젊은이들이 자살폭탄테러에 나설 수밖에 없는 증오와 절망을 중심에 두면서도, 자살폭탄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지를 회의하는 비판적 시선을 동시에 보여준다. 영화에는 자살폭탄테러에 나서는 청년과 이를 알고 말리는 유럽유학파 엘리트 여성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감독의 이중적 자아가 양분되어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영화는 검문소 앞에 서서 한숨짓는 여성(수하)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순교영웅 아잠의 딸로 프랑스에 유학을 갔다가 고향에 돌아오기 위하여 이스라엘 병사의 검문을 받는다. 나블라스의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다 해고된 두 친구 지아드와 할레드는 내일 텔아비브 자살폭탄테러의 순교자가 될 순번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는다. 지아드는 새벽에 수하에게 들려 순교투쟁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투쟁본부로 간다. 비디오카메라 앞에서 이스라엘 점령의 부당함과 순교투쟁의 정당성을 적은 글을 비장하게 읽지만, 녹화가 되지 않고 다시 찍어야 했을 땐, 엄마가 싸준 빵을 보고는 거창한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접고, 그저 엄마에게 좋은 정수기를 쓰라는 말과 함께, “맞서 싸울 무기는 맨몸뚱이 하나뿐”이라는 말을 녹화한다.

이들은 정결의식을 갖고, 몸에 폭탄을 장착한다. 텔아비브로 가는 담장을 넘을 때까지 이들에게 죽음을 앞둔 이들로서의 갈등과 고뇌는 크지 않게 느껴진다. 수하와의 대화에서나, 담장을 넘기 직적 두 청년의 대화에서 “이게 옳은 일인가?”라는 질문이 오가지만, 결론은 “다른 방법이 없다”와 “이건 사는 것이 아니다”이다. 영화는 검문소와, 물가폭등, 수질오염, 그리고 팔레스타인인의 취업을 금지하는 조치로, 미래도 희망도 없이 겨우 목숨을 연명해갈 뿐인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투쟁지도부의 사람들은 자유와 정의를 논하지만, 투쟁에 나서는 이들의 가장 절박한 심정은 이스라엘군인 앞에서 느끼는 굴욕감을 떨치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할레드는 이스라엘궁인이 아버지에게 한쪽 다리를 부러뜨리고 한쪽 다리를 살려두었다고 말하면서, “나 같으면 놈들에게 모욕당하기 전에 스스로 두 다리를 잘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이드는 매국노 혐의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처형당한 자의 아들로, 팔레스타인 사회내부에서의 굴욕감을 씻고 싶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식당에서 누군가 ‘매국노를 찢어 죽여야 하며, 가족과 친구까지 씨를 말려야 한다’고 말하자, 불편해하는 자이드를 보여준다. 그는 수하가 순교자 아버지를 둔 것을 부러워한다. 한편 수하는 “팔레스타인에게 군사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말하며,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에 순교자의 유언과 반역자처단 영상이 판매, 대여된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수하는 팔레스타인 사회 내부에서 도덕적 우위를 지님과 동시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자유주의자로, 팔레스타인의 투쟁을 상대화하여 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그녀는 ‘자살테러는 점령자들의 행위와 다를 바 없는 끔찍한 짓이며, 이스라엘의 보복의 빌미가 되어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라고 만류하며, ‘신사적으로 싸워야 함’을 역설하지만, 그녀의 말은 ‘평등하게 살 수 없을 바에야 평등하게 죽기를 원한다’는 청년들의 절망 앞에 공허한 논리가 될 뿐이다.

첫 순교 작전이 틀어지고, 지도부와 길이 엇갈리면서 온몸에 폭탄을 두른 채 시내로 돌아온 자이드는 오히려 배신자로 오인 받으며 수배를 당하지만, 아버지의 무덤에 누워 결심을 굳히고 다시금 투쟁지도부로 간다. 자신을 더 이상 믿어주지 않는 지도부에게 자이드는 “저들은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여 우리민족을 분열시키고, 우리의 존엄성을 죽인다”고 말하며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면 자신들도 괴롭다는 것을 전할 방법은 순교밖에 없으며, 저들이 희생자인양 세계를 향해 말하는 이상, 희생자는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결의를 보여준다. 마침내 텔아비브에 온 두 사람. 지금까지의 화면과 달리, 화려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도시의 외관에 아찔한 소격효과가 느껴질 지경이다. 할레드는 마지막 순간 “죽고 죽이는 악순환뿐이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투쟁방법이 있을 것” 이라 말하며, 자이드에게 돌아가자고 종용한다. 영화는 돌아갈 것처럼 하다가 할레드를 따돌리고 홀로 버스에 오른 자이드의 앉은 모습을 정면으로 클로즈업하며 끝난다.

영화는 자살폭탄 테러에 나서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의 암담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에 보이는 검문소와, 수하와 할레드가 자이드를 찾아 차를 몰고 가다가 회차하는 장면에 어김없이 검문소가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1987년 인티파다가 시작되면서 팔레스타인들이 이동할 때 허가를 받도록 하였고, 오슬로 협정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 곳곳에 도로를 봉쇄하고 검문소를 설치하였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신분증을 제시해야하고, 이스라엘 군인들은 어디를 가는지, 왜 가는지를 묻고, 차량과 짐을 뒤지기도 한다. 어떤 검문소는 특별허가를 받는 사람만 지나가게 하고, ‘안보’를 이유로 며칠씩 검문소를 닫아걸기도 한다. 검문소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삶을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심리적으로 옥죈다. 항시적으로 이스라엘 군인들의 검문을 받으며 살아야하는 팔레스타인 청년들에게 식민지인으로서의 열패감과 분노는 자연스럽게 깃든다.

<천국을 향하여>에서 두 청년은 안정적인 일자리가 없으며, 자살폭탄테러를 하러가기 전날, 텔아비브에 취업허가가 났다는 거짓말을 하자 어머니는 의아해한다. 1967년 점령이후 이스라엘은 가자와 서안에 공장이나 기업의 허가를 내주지 않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1980년대 말에는 팔레스타인 노동자의 약 1/3이 이스라엘 지역에 취업하였지만, 1차 인티파다로 이스라엘이 이들의 취업과 이동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40-50%가 실업자가 되었다. 그 자리는 약 25만 명(전체 노동력의 10%에 해당)에 달하는 아시아계 이주노동자들로 채워졌다. 오슬로협정이후에는 팔레스타인인과 상품은 이스라엘 지역으로는 물론, 가자와 서안 사이에도 오갈 수 없도록 봉쇄되어, 1996년 한 해 동안 가자와 서안의 실업률은 거의 두 배로 늘고, 1인당 수입은 20%감소하였다. 2차 인티파다 이후에는 봉쇄정책의 강화로 팔레스타인 경제는 초토화되었고, 2006년 하마스가 집권한 이후 가자지역이 봉쇄되어 식량과 의약품도 조달되지 못하였다. 유엔개발계획의 발표에 의하면 2007년 현재 팔레스타인 인구의 58%가 빈곤선 이하에서, 그중 절반은 심각한 빈곤상태에 처해있다. 특히 나블루스의 실업률은 45-50%에 달하여, 영화 속 두 청년의 실업과 빈곤은 보편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천국을 향하여> 초반에 두 청년의 전과가 언급되는데,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체포와 구금은 일상적이다. 이스라엘은 군인과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재판 없이 6개월간의 행정구금에 처할 수 있고, 국제사면위원회가 인정하는 ‘고문이 공식적으로 용인되고 지속적으로 자행되는 유일한 나라’ 이다. 이스라엘의 전체 수감자의 60%이상이 정치적 범죄를 저지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며, 1967년 이후 가자와 서안에서 약 70만 명이상이 구금되어, 전체 인구의 27%, 성인남성의 40%이상이 구금 경험을 가지고 있다. <천국을 향하여>의 배경이 되는 나블루스는 서안에서 가장 큰 도시로, 테러의 거점이라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압박이 가장 심한 곳이다. 2002년에는 나블라스에 사는 15세 이상의 남성 전원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2008년 기준으로 이스라엘에는 약 9천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구금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수백 명의 여성과 어린이 및 청소년들도 포함된다.

또한 영화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물문제가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더럽힌 물은 무엇으로도 정화되지 않는다”는 사나, 유언을 녹화하는 장면에서 엄마에게 정수기를 말하는 대목을 것이 그것이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 후 요르단 강 계곡에 있는 140개의 팔레스타인의 물 펌프를 파괴하고 사용권을 빼앗았다. 1982년부터 국영회사를 통해 수자원을 통제하고 있으며, 요르단 강에서 연간 5억 입방미터의 물을 끌어와 이스라엘 내 물 사용량의 1/4을 충당한다. 오슬로협정으로 자치정부가 수립된 이후로도 서안지역의 수자원의 55%를 통제한 채,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제한급수를 시행하고, 서안지역의 물길을 따라 장벽을 건설하여 확보한 수자원으로부터 이스라엘 지역으로 물을 끌어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하수의 80%를 소비하며, 팔레스타인인보다 4-5배나 많은 물을 사용한다. 서안지역은 만성적인 물 부족으로 농업이 붕괴하고, 비싼 물 값으로 가계소득의 20%를 소비하는 가구가 있을 정도이며, 가자지구로 흐르는 물을 막아 바닷물과 하수로 상수원이 오염되어 심각한 수질악화로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이슬람 인들로부터 ‘순교작전’으로 불리는 자살폭탄테러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당시 만들어진 헤즈볼라가 1983년 베이루트에 주둔한 미군해병대막사를 폭탄트럭으로 들이받았던 작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후 1987년에 결성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에게 기술이 전수되어, 1994년 기대했던 오슬로 협정이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느낀 하마스는 처음으로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였다. 2000년 2차 인티파다를 전후해 크게 증가하였던 자살폭탄테러는 2003년부터 줄어들었다가 2004년 하마스의 야신이 암살된 이후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2006년에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손자를 잃은 60대 할머니가 자살폭탄테러에 나서기까지 하였다.

2004년 쯤 촬영된 <천국을 향하여>에는 이번 거사가 2년 만에 재개한 작전이라고 말하는데, 영화는 바로 이 시기 자살폭탄테러에 나설 수밖에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절박함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실제로 나블루스에서 촬영되었는데, 촬영 세트장 인근에서 실제로 폭발이 끊이지 않고, 투쟁조직들로부터 현지를 떠나라는 협박을 받아 나사렛으로 촬영장소가 옮겨졌다. 영화는 이스라엘 정부의 영화기금을 받아 제작되었지만, 이스라엘에서의 대형개봉관에서 상영되지 못하였으며,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지만 유대인들의 반대와 저지로 수상이 무산되었다고 전해진다.

2006년 1월 총선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 집단화된 모습을 보인 파타 대신 하마스를 선택한다. 파타 자치정부는 집권 중 10억 달러의 예산을 증발시켰고, 총리의 집안이 소유한 회사가 분리장벽과 정착촌 건설에 시멘트를 제공하는 이적행위를 하는 등 신흥지배계급으로 변해갔다. 팔레스타인인들이 하마스를 선택한 것은 이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였기 때문이 아니라, 지도부가 매우 청렴하며, 해외원조금으로 교육과 사회복지시설을 설립 운영하는 등 가난한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승리한 하마스는 선거직후 그린라인 지역에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선언하고, 이스라엘군의 철수와 정착촌 철거, 500만 명에 이르는 난민귀환과 9천명에 이르는 수감자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 러시아, 유럽연합, 유엔으로 구성된 ‘쿼텟’은 원조중단을 선언하고, 이스라엘은 자치정부에 이월하던 6천만 달러의 예산을 넘겨주지 않음으로써 하마스 정부를 경제적 파산으로 몰아갔다. 이스라엘은 2006년 6월 가자지역을 봉쇄한 채 군사공격을 감행하여, 하마스 의원 20명과 각료 1/3을 체포하였다. 이때의 공습으로 12월까지 어린이 88명을 포함하여 405명이 살해되었다. ‘퀘텟’은 2007년 6월에는 압바스 수반과 파타에게 지원을 재개하고, 무기를 제공하여 서안에서 파타가 신흥 팔레스타인 자본가계급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주도권을 되찾게 해주었다. 그 결과 하마스 정권을 뒤엎기 위한 쿠데타가 일어나고, 가자에서 파타와 하마스 간의 교전이 벌어진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지도부 소탕작전을 벌여 이들을 투옥하고,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역을 완전 봉쇄하였다. 하마스를 가자로, 파타를 서안으로 분리해내고, 하마스를 가자에 가두어 정권을 붕괴시킨 미국과 이스라엘은 2007년 11월 압바스를 동원해 평화회담을 진행하면서, 2008년 12월에 다시 가자를 침공하여 팔레스타인 550명을 살해한다. 이후 오바마 정권의 중재로 협상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이스라엘은 서안지역에 분리장벽을 계속 쌓고 있고, 자살폭탄테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저항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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