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 고봉준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어떤 책들의 매력의 적절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사회적 문제나 현실과 긴밀하게 관련된 책들을 읽을 때, 우리는 저자에게 ‘그래서 어쩌라구?’에 해당하는 현실적인 답변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이 현실적 기대 없이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할까? 현대사회를 분석한 많은 책들이 우리의 선택을 벗어나거나, 일회적인 독서의 대상에 그치는 까닭은 이 답변의 현실성(즉각 사용할 수 있음!)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여러 저작들을 읽으면서 내심 느껴왔던 불만도 이 ‘답변’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한 권의 저작이 갖는 가치가 ‘답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명확한 답변보다 적절한 질문과 분석이 빛을 발하는 책들도 있기 마련이다. 삶의 돌파구를 예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의 실상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우리가 미처 조망하지 못한 세계의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세계에 대한 사유로 이끌어가는 책, ‘유동하는 근대’라는 특유의 개념을 앞세운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작들이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모두스 비벤디』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라는 부제처럼, 불안과 불확정성이라는 새로운 조건 하에 놓인 현대적 삶을 분석한 저작이다. 이 책의 원제는 ‘유동하는 시간’이다. 이탈리아어판의 제목을 딴 라틴어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는 영어권에서 흔히 ‘삶의 양식’으로 번역되지만, 저자는 거기에다 국제정치 분야에서 사용되는 ‘잠정 협정’이라는 의미를 추가함으로써 이 용어를 불확실성 시대의 삶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하고 있다. 바우만의 ‘유동하는~’ 시리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적 이력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우만의 초기 저작들은 근대성과 관료제, 합리성과 사회적 배제의 관계를 다룬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사상은 근대성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포스트모더니티와 소비주의, 즉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패러다임 아래에서 현대사회 분석에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고, ‘유동적 공포’라는 개념은 부정적 지구화라는 당대적 삶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바우만에게 ‘유동성’은 후기 근대의 불확실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자, 동시에 공포와 결부되는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부정적 지구화에서 비롯되는 위험은 전지구적인 수준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개인들은 이 위험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바우만은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액체(유동적!)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예측가능한 사회였고, 공동체가 존속했던 시대였다면, 후자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이다. 전자의 사회에서 개인은 노동하는 존재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노동 능력을 지니고 있는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어 마땅했다. 전자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기준은 ‘노동’이었고, 설령 한 개인이 실직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노동능력을 상실하지 않는 한, 그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어 국가 또는 사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이 지구적으로 이동하는 시대에 접어들어 상황은 변했다. 이제 한 개인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노동력이 아니라 소비력이며, 소비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는 개인들은 더 이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차라리 없어야 하는 존재, 즉 ‘쓰레기’로 판단된다는 것이 바우만의 생각이다.

‘위험’의 수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바우만의 ‘유동성’ 개념은 종종 공포, 불안, 위험이라는 현대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이 책의 1장이 ’유동하는 근대의 삶과 그 공포‘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우만의 핵심적인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는 오늘날의 부정적 세계화가 전지구적인 차원의 위험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맥락은 아니지만,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울리히 벡의 말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바우만이 지적하고 있는 이 전지구적인 차원의 위험이 개인이 감당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개인이 무력하다는 것이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매일매일 무엇인가를 한다. 위험을 최소하하기 위한 전략을 수행하는 것이다. 보험에 가입해서 미래의 질병에 대해 대비하고, 폐쇄회로를 설치하여 혹시 있을지 모를 위협에 대비하며, 개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는 건강염려증이 확산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구 전체에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환경오염을 막을 수 없으며, 치안을 근본적이기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도 없다. 물론 이 지점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이 막을 수 없는 위험을 국가에 호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국가가 사회국가, 복지국가에서 개인안전국가로 변했기 때문에 국가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위험과 공포를 세계화라는 맥락에서 살펴보면 바우만은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전략이 빈곤과 불안, 범죄와 공포를 세계 전체로 확산시켰고, 이로 인해서 세계 전체가 공포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의 ’국가장치‘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지구 전체로 확장된 일반화된 공포에 대해 개인이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다는 사실이다.

바우만은 지구적 차원의 위험과 공포의 도래 앞에서 우리에게 이 지옥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지만, 솔직히 너무 원론적이고 당위적인 답변이다. 그의 주장에는 ‘어떻게’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 없다. 그러나 그가 “엘리트들이 세계 정상의 어딘가에서 자신들이 상상한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떠날 때, 가난한 사람들은 범죄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라는 아룬다티 로이의 말을 인용할 때, 희미하게나마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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