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농사 일지 8

- 김융희

본격 겨울철이다.

계절은 순환한다. 24절기의 소설이 지나 대설이 멀지 않았음을 보면, 이제는 본격 겨울철에 들어섰다. 수확을 끝낸 장포는 갈묻이를 하여 봄을 기다린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의 허술한 결실로, 자급량도 않된 농작물에 도대체 올해는 수확이 시원찮아 갈무리의 수고도 없다며 이웃 농가들이 탄식하며 허탈해 한다. 나는 조금 심었던 고구마, 콩이 잡초에 묻혀버렸고, 무우 배추도 잦은 비에 녹아 없어졌다. 나야 애시당초 자급에도 못미칠 소량의 경작이지만, 많은 투자와 함께 정성을 드린 농부의 겨워하는 그 오죽하랴 싶은 심정을 십분 이해하면서 안타깝다. 아직 김장도 안했는데, 긴 밤 먹거리로 깍아 먹을 무우도 고구마도 없으니, 올 겨울철이 더욱 지루할 것만 같다. 올 봄을 기다리는 마음도 더욱 간절하겠다.

오늘은 이른 새벽인데도 창밖이 유난스레 밝았다. 그믐의 달빛인가 했더니, 소복히 내려 쌓인 하얀 눈빛에 어두운 새벽이 지워져버린 것이다. 희미한 그믐달 빛에 하늘의 별빛이 더욱 밝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새벽녘이다. 미쳐 다 치우지 못해 지저분했던 느티나뭇잎들도 흰눈에 덮여 모두 숨어버렸다. 여름에 심었던 딸기순이 열매도 맺지 않는 채 계속 줄기만 뻗치고 있었다. 영하 10 도의 어제의 아침추위에 딸기순이 혼줄이다 싶더니, 마침 눈을 쓸면서 보았더니 하얀 이불속에서 호사를 부리고 있다. 눈이 내리면 제일 신나서 좋와하는건 풀어 논 우리집 개들이다. 재동이와 건우가 눈밭을 맘껏 뛰놀며 즐기는데, 목줄을 찬 분이와 살살이는 약이 올라 끙끙데며 안달이다. 포근하고 안온하여 평화스러운 산촌의 새벽 풍경이다.

여름철엔 그렇게도 풍성했던 나무와 풀, 생물들이 초라하며 외롭게 보인다. 외로운 마음에 신선한 바닷바람같은 자유로움과 그리움이 일렁인다. 어덴가 알 수 없는 곳이 그리워지며, 어디론지 멀고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으로 설렌다. 염열의 여름철엔 그리도 무성했던 나무가 지금 황량함으로 초라하여 외로워 하는가? 아닐 것이다. 외로움은 내 마음일 터, 마음의 충동이 멀고 먼 미지의 곳으로 의식을 자꾸만 이끌지만 현실이 꿈의 유혹을 앞서며 계속 제어하고 물리친다. 우리의 행동은 의식을 붙잡고, 실행은 늘 현실의 나를 붙잡으며 머뭇거리게 한다. 그런 사이에 꿈의 실현을 바라는 내 소박한 영혼만이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봄이 오는 속도는 느린데 반해, 가을은 급하게 서둘러 온다. 구월이 되면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고, 10월중에 벌써 얼음이 얼고 눈보라도 보았다. 늦가을의 추위는 유난히도 거칠다. 갑자기 들이닥친 한파에 금년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 단풍도 볼 수
없었고, 푸른 하늘아래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도 구경을 못했다. 겨울의 칼날같은 추위는 영혼까지도 시원 상쾌하게 하지만, 늦가을 갑작스런 추위는 을씨년스러워 소름이 돋는다. 이맘때면 동네 아줌마들이 함께 모여 김장 담그는 모습을 보면서 어쩐지 포근한 정을 느꼈었는데, 금년엔 그 모습도 아직 못봤다.

농토를 일구고 고기잡이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조용힌 섬마을에 무자비한 포탄을 퍼부어 살상과 파괴를 자행하는 자는 어느 누구인가? 그들이 우리의 한 핏줄의 동족이란 말인가? 이념갈등은 채제의 변화로 벌써 소멸의 종언을 고한지 오래였건만, 우리만이 유일하게 잔존하며 아직도 남북이 갈린 채 나뉘어 삶도 지겨운데, 포탄을 쏘아데며 살생을 목격해야 한다니.. 연일 메스컴은 특집보도를 내보이며, 거리의 인구는 만나면 연평도 사건을 화두로 원한의 복수를 갈구하며 부추기는 양상이다. 기아로 허덕이면서 살상만을 일삼아 전쟁놀이로 공갈협박을 휘두르는 북의 망나니가 우리와 함께 피를 나누는 동족이라니, 더구나 전혀 무용의 짖거리인 그들의 도발이 날로 더욱 포악해지며 심통으로 일삼는다니, 참으로 통탄의 비극이다.

을씨년스런 날씨가 우리를 더욱 움츠리게 한다. 미친 개는 몽둥이가 약이란 속담이 요즘 온 국민의 바람인 것처럼 회자됨을 보면서 통곡하며 매달려 간절한 기원의 심정이다. 여름에는 평화와 안녕을 지키는 우리의 천안호가 박살을 내면서 짖궂게 내린 비와 더불어 이 강토에 요동을 치더니, 짖눈게비와 함께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의 문턱에서 또 이런 연평도의 비극을 맛보아야 하다니…. 한 해가 가고 오는 이 즈음이면, 아니여도 우리는 스산하여 어수선한 계절에 참으로 비통함으로 통곡의 심정이다. 정말 미사일이라도 발사하여 저들을 초토화하여 말살했으면 시원, 통쾌하겠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 모두의 일관된 심경일 것이다. 그러나 이성을 갖춘 우리들이다. 꼬라지로 발악밖에는 먹거리가 없어 굼주린 채 야수처럼 무지한 저들이 지금 몽둥이도 모른 채 사생결단의 짖거리이다. 역사는 유구하며 변함이 없다. 끈기있게 참고 달래며 좀더 기다려 보자. 저들에게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기대해 보자.

올 농사가 여러 사정으로 기대에 못미쳤으나, 또 심고 가꾸는 봄과 여름의 계절이 다시 다가오고 있음을 알기에 농부는 봄을 기다리면서 참는 것이 농심이다. 시간은 모든 것의 파괴자요 우리의 적으로 존재하면서 맹위를 떨쳐 계속 우리를 위협한다고 했지만, 우리에게 해결사의 역할에도 충실함이 또한 시간임을 알고 있다. 눈 앞의 현실에 차분한 이성의 지혜가 참으로 요망되는 요즘이다. 따뜻한 겨울을 기대하지만, 심한 해충을 적당히 막아주는 추위를 받아드림도 필요한 우리들이다. 우리의 지혜가 문제의 해결에 작동치 않음 시간의 지혜도 기대해 보자. 오늘과 같은 국가의 위기 앞에서, 어떤 이념이나 정치적 욕망들이 소박한 농심처럼 소박 알뜰한 순수로 통했으면 싶다. 이것이 나의 간절한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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