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적’은 어쩌면, ‘도로 나’의 다른 이름일지도 몰라

- 달맞이

-『적』다비드 칼리 글 / 세르주 블로크 그림 / 문학동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인간의 마음을 절묘하게 묘사한 유행가 구절이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았던 남이 어느 순간 내 온 가슴을 헤집어 놓는 님이 되기도 하고, 하루라도 안 보면 눈이 멀 것만 같던 그리움이 지겨움으로 변해 ‘도로 남’이 되라는 요상한 주문을 입에 달고 다닌 경험이 있는 이에겐 ‘도로 남’ 이라는 유행가 가사야말로 구구절절 옳은 말이요, 만고의 진리다.

요즘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선 단연 연평도 사건이 화제다. 전쟁에 대한 공포를 이야기하는 사람, 적을 향한 무능력한 대응을 이야기하는 사람 등등. 헌데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보는 내내 난 자꾸 ‘도로 남’이라는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동포’를 일순간에 ‘도로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갑갑한 현실에 숨이 차오고, 가슴 한 쪽이 뻐근해진다. 대체 누가 자꾸 적을 만드는 것일까?

『적』은 전쟁에 임하는 두 병사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다. 겉표지부터 상징적이다. 전쟁 영웅쯤으로 보이는 한 병사가 훈장이 덕지덕지 달린 제복을 입고 누군가를 향해 거수경례를 올리고 있다. 자신의 실적이 자랑스러운 듯 웃음을 머금고 있지만, 두 눈은 검은 선글라스로 가려져 있어 표정을 짐작할 수 없다. 자랑스러운 전쟁 영웅이 되기 위해선 어쩌면 ‘스스로 보는’ 주체적인 행위와는 담을 쌓아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병사의 두 손에선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지만, 번쩍이는 금장과 훈장들에 빛이 바래 잘 보이지 않는다. ‘적’이라고 쓴 붉은 색 제목이 하도 강렬해서, 얼핏 핏방울 정도야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세르주 블로크는 이렇듯 전쟁에 임하는 한 병사의 모습을 통해, 전쟁에 중독된 사람들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결과(훈장)에 자랑스러워 할 뿐 자신이 한 만행에 대해서는 과감히 눈을 감으며, 적이라고 규정된 이를 처단하기 위해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히며, 상대방에게 주목을 받고자 하는 인간 군상들.

이 그림책은 구성도 참 독특하다. 겉표지를 장식한 영웅적인 병사의 모습은 면지에 오면 총을 든 수많은 병사의 모습으로 대치된다. 왜소하고 아무런 표정이 없는 병사들의 모습은 전쟁에 동원된 인형들을 연상시키며, 자연스럽게 전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반문하게 한다.

이어지는 페이지는 온통 검은색이다. ‘전쟁이다’라는 글씨만 도드라져 보인다. 검은색은 전쟁이 주는 공포와 상실, 암흑처럼 변한 세상과 죽음의 이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 다음 장에 가면 바탕은 흰색으로 바뀐다. 헐벗은 가지 세 개와 그 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줄기만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도 삽화는 “여기 보이는 이곳은 사막 같다.”는 글과 참 잘 어우러진다. 검은색에서 흰색으로의 변화가 시야를 확장시켜, ‘사막’이라는 공간을 잘 대변해 주며, 풍부한 여백이 ‘사막’이 주는 황량함을 잘 살려주기 때문이다.

그 다음 페이지로 가면 간격을 두고 두 개의 구멍(참호)이 보인다. 참호 안에는 얼핏 총을 든 병사의 모습이 보이고, 참호 주변에는 가시 울타리가 쳐져 있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적이 내 던진 수많은 물건들이 참호를 너저분하게 에워싸고 있는 모습과 함께 “그들은 적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장면은 두 병사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숨어 있던 구멍이 누군가에 의해 “그들은 적이다.”라고 선포되는 순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공격기지로 변하는 장면을 잘 보여준다. 참호에 숨어 있는 두 병사를 모두 적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작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제 3의 권력이 존재함을 은근히 암시한다. 또한 두 병사를 ‘그들’이라는 한 카테고리로 묶음으로써,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두 병사가 실은 하나에 다름 아니며, 그렇다면 ‘적이라는 명명이 과연 타당한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몇 쪽의 페이지가 프롤로그(prologue)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속표지는 강렬하다. 빨간 바탕에 병사 하나가 참호 안에서 총을 들고 앉아 있다. 전쟁이 선포되었건만 병사는 여전히 왜소하고 무표정하다. 겉표지에 있는 병사가 전쟁 영웅의 모습을 띠고 있다면, 속표지에 등장하는 병사는 흔들리고 갈등하고 회의하고 두려움에 떠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바로 이 ‘연약한 인간’의 이야기임을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할 터이다. 빨간 색은 악, 재앙 등을 상징한단다. 하긴 적과 대치해 있는 세상이 참호 속 병사에겐 재앙일 수밖에 없을 게다. 참호 바깥에 가느다란 선을 그려 참호가 흔들리는 느낌을 준 것 또한 병사가 위기에 빠져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겉표지에서 속표지에 이르는 과정이 전쟁이 선포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속표지가 전쟁을 겪어내야 하는 한 병사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다면, 본문은 한 병사의 내면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앞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기술되던 문장은, 본문에 들어오면서 ‘나(병사)’의 시점으로 바뀐다. 서술 시점의 변화는 전쟁에 대면하는 병사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위한 장치이며, 독자 또한 참호 속 병사가 되어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전략이기도 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병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적이 바로 건너편에 있다. 하지만 난 그를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일상은 전적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인 ‘그(적)’을 의식해서 이루어진다. 들켜서 죽음을 당할까 봐 하루 종일 참호 안에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하고, 배가 고파도 불을 피우지 못한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해 보니 적이란 놈, 참 묘하다. 나랑 많이 비슷하다. 아침이면 총 한 방 쏘는 것, 상대편 참호를 관찰하면서 고집스레 기다리는 것, 참호 속에 혼자 외롭게 있는 것. 닮은 점이 많다. 그러나 난 적과 내가 닮았다는 걸 수긍할 수가 없다. 적을 야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내가 신봉하는 전투 지침서에 의하면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괴물이며,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다. 그러니 적은 전투 지침서에 명시된 대로 인간이 아니다. 나와 내 가족을 죽이고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죽여 없애야만 할 괴물이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적에 대한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변해간다. 전쟁이 슬슬 지겨워진다. 이제 그만 전쟁 같은 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난 전쟁을 시작한 것이 내가 아니듯, 전쟁을 끝내는 것 또한 내 몫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건 내가 참호 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이 시간, 온 몸에 훈장을 달고 축배를 들고 있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 몫이라는 걸. 그들은 절대로 전쟁을 끝내지 않을 거라는 걸.

그걸 깨닫자 그냥 있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든 전쟁을 끝내야 한다. 적을 죽여서라도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 난 용기를 내어 덤불숲으로 위장하고 참호를 빠져 나가, 적의 참호로 간다. 그러나 적이 없다.

적의 소지품 중에서 가족사진을 발견한 난 경악한다.

‘세상에! 적에게도 가족이 있었다니! 적에게도 내 것과 똑같은 전투지침서가 있었다니! 적이 괴물이, 야수가 아니었다니!’

적이 죽여야 할 적의 얼굴에 내 얼굴이 있는 걸을 본 나는 전투 지침서가 온통 거짓투성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적은 이미 나를 죽이기 위해 내 참호로 갔고, 참호만 바뀌었을 뿐 적과 나의 대치상황은 계속된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품는다. 적이 내 소지품을 통해 모든 것이 거짓인 걸 알았으니, 이제 곧 전쟁을 끝내자는 메시지를 보내오겠지. 그런데 웬걸, 적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은데, 난 비가 정말 싫은데 적은 꼼짝도 않는다. 할 수 없이 난 손수건에 메시지를 적어 플라스틱 병에 넣어, 적이 있는 내 참호를 향해 힘껏 던진다.

마지막 장면, 두 개의 참호가 보인다. 두 개의 참호를 통해 두 개의 병이 날아간다. 내가 그랬듯이 적 또한 내가 숨어 있는 자신의 참호를 향해 화해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왜 다비드 칼리는 “부디 나의 병이 그의 참호 안에 떨어지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을 맺었을까? ‘내가 들어가 있었던 곳이 적의 참호였으니, 그곳에서 얻은 플라스틱 병은 엄밀히 말하면 나의 병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온전히 그의 병만도 아니다. 내 소원을 담은 그의 병이라고 해야 정확할 게다. ‘그의 참호’라는 말 또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적 또한 기습을 하려고 내 참호를 점령한 것이므로, 그가 들어가 있는 곳은 나의 참호라고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 거기에 누가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의 참호’라는 말이 온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기표는 이렇듯 하나의 기의만을 담고 있지 않다. 어떤 맥락에서 해석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적’이라고 명명되었던 그가 나의 닮은꼴이었던 것처럼,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했던 적과 내가 인간이었던 것처럼, ‘나의 병’과 ‘그의 참호’라는 구분 자체가 애매모호한 것처럼, ‘전쟁’이란 것도 어쩌면 ‘평화’란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이끌어 낸 것은, 전투 지침서에 적힌 내용을 과감히 위반하고 참호 밖으로 기어 나온 병사의 용기와, 적이 더 이상 적이 아님을, 전쟁을 끝내는 것이 명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과 자신의 몫임을(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깨달은 지혜와, 기다림을 철회하고 적을 향해 화해의 메시지를 던져 올린 병사의 선의였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오래 전 화가는 사막으로 상징된 전쟁이 일어난 ‘이곳’을 흰색으로 표현함으로써, 실은 이곳이 우정과 선의의 땅임을 암시하고 있다. 함정이라 명명되는 구멍(수렁)에 빠지지 않는 한, 이 땅은 전쟁보다는 우정이 판치는 곳이라고.

그렇다면 ‘님’이 ‘도로 남’이 되는 걸 개탄하는 대신, 그 장난 같은 세상사를 돌파해 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올까? 그건 어쩜 ‘적’이 ‘도로 나’의 다른 이름일수도 있다는 걸 간과하지 않는, 자기 성찰로부터 시작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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