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지금

쑨거: 동아시아, 자기갱신의 공간

- 윤여일(수유너머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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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이란 자신을 억압하는 자신보다 강하고 큰 상대와 맞서는 일이다. 하지만 「다케우치 요시미: 동양의 저항과 동아시아의 가능성」에서 확인했듯이 다케우치 요시미가 이해한 루쉰의 저항은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자기동일성에 대한 거절까지를 요구했다. 저항하는 정당성이 상대가 나를 억압한다는 사실에서만 구해진다면, 내가 지금의 나인 까닭은 상대에게 있다.

이때의 저항은 늘 패배하게 되는데, 저항의 계기가 상대에게 있는데다가 나는 그 상대를 결코 대등하게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케우치를 경유한 루쉰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대신 상대와 맞섰을 때 주어지는 자기 위치와도 대결하여 상대는 가질 수 없는 유동성을 품어야 한다. 루쉰에게 저항이란 타자를 극복하기 위한 것도 해방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임을 거절하고 동시에 자기 아님도 거부한다. 그것이 루쉰에게 있는 그리고 루쉰 자체를 이루는 절망의 의미다. 절망은 길이 없는 길을 가야하는 저항에서 나타나며, 저항은 절망의 행동화로서 드러난다. 이는 상태로 보면 절망이고 운동으로 보면 저항이다.” 이것이 루쉰에게 저항의 의미이며 다케우치가 이해한 동양의 운명이다.

서양에 대한 동양의 관계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불균형 속에서 전개되며, 패배를 매개로 하는 무엇이다. 따라서 저항은 상대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단한 유동성 속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다. 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진 ‘해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양의 저항이란 불평등한 구조로 인해 늘 한계를 갖지만, 그 한계를 통해서만 구조의 와해에 이르려는 고투이며, 바깥에서 주어지는 해방의 환상을 거부하고 유동하는 그 관계에 내재함으로써만 획득되는 비판행위이다. 바로 선각자가 되지 못한 ‘역사적 중간물’ 루쉰이 그렇게 저항했다.

이러한 동양의 운동은 ‘동양 대 서양’과 같은 대립도식을 가지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서양 근대의 충격에 답하고자 동양을 서양에 대한 대립개념으로 실체화한다면 루쉰을 매개 삼아 다케우치가 말한 저항의 의미를 놓치고 만다. 다케우치는 다시 말한다. “자기가 자기이기 위해서는 자기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된다.” 다케우치는 동양을 서양과 같은 위상에서 실체로서 다루지 않고 불균형한 힘의 조건 아래 놓인 동양의 역사에 서양산 가치판단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서양까지도 동양의 역사 속에서 ‘역사화’하려고 했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거기서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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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거는 다케우치가 내놓은 동양의 저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념성이 짙은 이러한 동양관이 다케우치 논의의 한계라고도 짚어냈다. 쑨거는 다케우치와 달리 동양/서양, 본토/외래라는 서사구도에서 비어져 나오는 사고영역을 중시하고 거기서 자신의 아시아관을 개척했다. 진정한 동아시아의 근대성은 그러한 이분법틀의 바깥에서 힘겹게 성장해왔다. 이 공간은 부득불 양자의 대립과 항쟁구도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거기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나온 까다로운 문제들은 다케우치도 충분히 탐구하지 않았다. 아시아주의는 서양에 맞선 동양의 일원화라는 지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동양 민족 내부의 복잡한 갈등과 길항관계의 산물이기도 하다. 아시아주의가 대립물로 상정한 서구 자체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의 역학관계 속에서 출현한 ‘서구의 상’이었다. 따라서 서구중심주의 극복은 내부와 외부가 맞물려 돌아가는 아시아의 상황에 좀 더 깊숙이 발을 들여놓을 때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쑨거에게 동아시아는 아시아 나라들 사이의 뒤얽힌 역사 속에서 복잡한 감정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그 역사(동시대사를 포함하여)로 진입하기 위한 지식의 감도를 되묻고, 쉽사리 성사될 수 없는 문화 간 교류를 시도하는 장이었다. 거꾸로 그러한 장을 상정해놓지 않았다면 저러한 사상과제들은 나올 수 없었다. 그녀에게 동아시아라는 지평은 지식의 정합성만으로는 잴 수 없는 문제들을 촉발시킨다.

그녀가 지적했다시피 민족과 국가에 대한 감각은 각국마다 몹시 불균형하며, 대국과 소국 사이에 내재하는 감각의 차이도 가로놓여 있다. 동아시아가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도 나라마다 다르다. 동아시아라는 지평 안에는 근대화와 식민기억, 디아스포라 그리고 경제패권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미래를 향한 공동의 비전은 금세 과거사나 오늘날의 민족감정 문제에 발목을 잡힌다. 그리고 동아시아라는 권역을 설정하는 일은 ‘대동아 공영권’ 등의 어두운 역사기억을 환기시킨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지평에서 발생하는 사상과제는 객관화할 수 없는 측면이 있으며, 그러한 비합리적 요소가 연구자의 문제의식, 문제제기 방식, 논의의 방향 등을 규정한다. 그 비합리적 요소들은 그대로 사상의 역할을 맡을 수는 없지만 그것을 외면한다면 사상은 성숙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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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거는 하나의 동아시아를 향한 공동의 기획이 해소되지 않은 역사문제와 얼룩진 민족감정으로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면, 그러한 균열과 틈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하자고 제안한다. 바로 상황의 복잡함을 복잡함으로서 충분히 드러내고 직시하는 것이 그녀에게 동아시아라는 지평이 필요한 이유였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시아에 대한 일체화 역시 국족에 대한 일체화와 마찬가지로, 실체화의 단계를 넘어선 다음에야 비로소 효과적으로 사람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변혁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내게 아시아는 결코 단순한 명칭에 불과하지 않다. 또한 서구에 대한 나의 태도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의 매력은 ‘문화간’에 대한 논의에 새로운 공간감각을 확보해준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그녀는 일국 단위 연구의 합으로 동아시아 연구를 꾸리거나 기존의 지역학을 답습하는 동아시아 연구의 경향을 비판한다. “여러 나라의 연구자가 모여 지금껏 자국에서 다뤄오던 연구주제를 그대로 ‘동아시아’라는 애매한 담론장으로 옮겨도 된다는 합리성은 대체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가? 나아가 ‘아시아론’이든 ‘동아시아론’이든 그 논의는 ‘에스닉’한 발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리 비교연구를 거듭해도 국가 단위의 발상은 깨지지 않는다.”

그녀가 염두하는 동아시아라는 지평은 각국 단위의 합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기억의 충돌과 같은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여 일국의 논리가 다른 나라에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봉착했을 때 동아시아라는 지평이 요구되는 것이다. 쑨거에게 동아시아가 실재하는지는 그다지 가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동아시아를 상정했을 때 주체가 상황성으로 풍부한 자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지가 관건인 것이다. “아시아와 대면할 수 있는가, 아시아를 과제로 삼을 수 있는가는 문제의 관건이 아니다. 문제의 관건은 이런 사고를 통해서 나를 어떤 문제군에 두느냐이다. 바꿔 말하면 아시아와 대면하고 동아시아와 대면할 때, 나는 진정으로 유동하는 상황과 대면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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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쑨거는 동아시아를 하나의 시좌(視座)로서 제시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라는 시좌는 어떻게 가능한가. 적어도 수속으로서 먼저 자신을 상대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을 상대화한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떤 구조 안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그 인식을 피부감각으로 바꿔야 합니다. 피부감각이 아니라면 말의 게임이 되어버리고 말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각으로 작업을 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역시 논리로서 말로서 작업을 해야 하기에, 따라서 그 피부감각에 의해 말의 선택방법, 사용방법이 바뀝니다. 말에는 긴장감이 있는 말과 없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화라는 행위는 먼저 의식, 그리고 감각의 위상에서 행해지며, 그 후에는 상대를 상대화합니다. 그 상대는 연구대상이기도 하며, 자신이 알고자 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상대화합니다. 상대화한다는 것은 이 경우에는 먼저 단순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측면에서 이 대상은 대체 어떠한 역사의 문맥에 놓여 있는지를 따져 묻는 것입니다.

동아시아는 시점들이 교착하고 충돌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쑨거에게 ‘상대화’는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라는 관용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가령 중국을 상대화하여 한국을 하나의 실체로서 정합한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하지만 ‘비교문화’에서 ‘비교’라는 말의 울림이 그러했듯이 그녀가 말하는 상대화도 단순히 문화상대주의의 그것이 아니다. 진정한 주체성은 불확정적인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감정기억을 사상과제로 들이고, 역사를 향한 감도를 되묻고, 무엇보다 다케우치라는 이국의 사상가를 매개 삼은 그녀의 사상적 행보가 이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그녀는 개체의 문화적 실천에서 시도했던 것을 동아시아라는 지역적 수준에서 공동의 사상과제로 내놓은 것이며, 그것이 다케우치 요시미를 오늘날 계승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다케우치가 던진 그 물음을 받아들인 우리가 한 걸음 더 내딛은 곳에서 맞닥뜨리는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에서 ‘아시아’를 한 나라가 자기를 개조하는 ‘방법’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자타관계의 새로운 타개책으로, 자국의 책임을 지면서도 그 일국 단위의 사고방식을 무너뜨리는 역설적인 입장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일찍이 다케우치 요시미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에서 서구가 실현하지 못한 가치를 되감아 서구마저 개조해 나가는 ‘방법’으로서 아시아를 제시했다. 하지만 그 강연은 중국과의 만남이라는 구체적인 경험이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을 제거한다면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그저 사용하기 쉬운 수사가 되어버린다. 같은 의미에서 사유공간으로서의 아시아도 역시 쑨거가 거쳐 갔던 국적에 한정되지 않은 사상적 훈련, 지적 실험, 현실 개입, 거기서 마주한 균열들을 들어낸다면 알맹이를 잃고 만다.

정치한 이론이나 정치적 올바름으로는 다룰 수 없는 복잡한 균열과 감각의 차이들이 아시아라는 사유공간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뼈대를 이루고 있다. 동아시아라는 지평에는 해결되지 않은 역사문제와 거기서 비롯된 감정의 응어리, 복잡한 분단(양안문제, 남북한, 오키나와․홋카이도와 일본 본도), 서구를 향한 대결과 거기에 얽힌 상이한 식민화 그리고 근대화가 복잡한 맥동을 이루고 있다. 갈등과 대립과 경쟁 속에 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하나를 이루는 동아시아라는 범주는 미래를 향한 공동의 청사진으로는 그 역설적 진실이 보이지 않으며, 쑨거는 그 긴장관계를 연대의 출발점으로 삼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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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거는 종종 ‘원리’라는 표현을 꺼낸다. 가령 틈새와 유동성을 갖는 중국원리(「종합사회 중국을 마주하기 위하여」), 중심-주변의 관계를 새롭게 되묻는 오키나와의 원리(「오키나와가 우리의 눈에 비칠 때沖縄がわれわれの眼に映るとき」), 굴절된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를 키워나간 한국의 원리(「포스트 동아시아なぜ、ポスト東アジアなのか」), 통일이냐 독립이냐로는 잡히지 않으며 유럽적 사회편성에서 벗어나 있는 타이완의 원리(「포스트 동아시아」). 쑨거가 이 사례들을 ‘원리’라고 부르는 까닭은 각각의 대상이 지닌 구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거기서 공유가능한 무언가를 발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 원리란 일국의 논리를 고집할 수 없는 ‘동아시아라는 시좌’를 통해 비로소 발견될 수 있는 것들이다.

참조축이라는 말이 있다. 동아시아론이 활성화되면서 이 표현도 적잖게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참조축은 자칫 비교과정에서 상호실체화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쑨거가 제안하는 ‘원리’란 서로를 참조축으로 삼아 자기 확인이 아니라 자기 개조를 도모하자는 제안인 것이다. 상대가 내놓은 물음으로 받아안아 자신의 사상적 전통을 다시 꾸리자는 제안인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로서 그녀는 이러한 제안을 우리에게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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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직접 한국의 상황을 거론한 글은 없다. 현실문제와 관련하여 직접 공동의 대응에 나선 적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현실문제를 둘러싼 연대가 아니라 사상의 연대를 요청한다. 그녀의 논의를 또한 어떠한 전환도 거치지 않은 채 가져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만큼은 공유할 수 있다. “고독의 정도가 절대로 남보다 더하다거나 덜하다는 식으로 비교되지 않을 때 연대는 비로소 성립할 수 있으며, 강렬한 부정의 의식으로 인류의 고뇌와 대화하고 또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할 때 일체화는 비로소 진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독을 회피하기 위한 참여는 본질적으로는 진실한 연대에서 이탈한 샛길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 동아시아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것은 공동의 적도 목표도 아니다. 더욱이 입장의 공유는 아니다. 공동성을 갖지 않는다는 공동성, 적대와 경쟁의식이 낳는 연대성, 오해와 균열에서 출발하는 이해. 이 역설이야말로 그녀의 동아시아 사유에서 공유할 메시지가 아닐까.

이 메시지는 성황리에 있는 한국발 ‘동아시아’가 자칫 실체화 혹은 신비화의 편향에 빠져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을 재고하도록 요구한다. 한국의 동아시아론은 경제․안보의 위기를 거치면서 현실감을 더하고 있으며, 때로는 마치 서양의 근대성 혹은 경제패권에 맞서는 하나의 답처럼 간주되고 있다. 아니면 정책적 지원이 줄어들자 벌써 그 거품이 꺼져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의 조언은 더욱 소중하다. 동아시아로 나가려던 것은 다시 한 번 자기의 조건으로 되돌아와야 진정 동아시아로 나갈 채비를 마칠 수 있다. 그리고 그 돌아옴에서 자신은 변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 관한 지적 실천은 ‘부정성의 계기’를 품어야 한다. 지식은 축적될 수도 있지만 해체되기도 한다. 지식은 정합성을 좇을 수도 있으며 지식의 감도를 물을 수도 있다. 그때 쑨거를 비롯하여 동시대를 겪고 살아가는 인국 지식인들의 고뇌를 공유하고 한국사회의 사상적 전통의 일부로 새기려는 시도는 지식의 감도를 묻는 소중한 시험대가 되지 않을까. 그때 기존의 지식 체계는 부식되거나 위기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고뇌를 어떻게 지적 전통으로 삼을 것인가. 그 지적 전통은 어디 위에 세워질 것인가. 이것은 나라간 지적 교류를 넘어서는 일일 것이다.

응답 1개

  1. 송기호말하길

    안녕하세요?
    혹시 쑨거 교수님 이메일 주소를 알고 계시면 알려 주십시오
    자료를 보내 드리려고 합니다.
    khsong@srlaw.co.kr
    송기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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