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스펙터클의 정치학

- 이진경

프랑스의 상황주의 그룹의 리더였던 기 드보르(Guy Debord)는 <<스펙터클의 사회>>의 첫문장을 시작한다. “현대적 생산조건이 지배하는 모든 사회들에서, 삶 전체는 스텍터클들의 거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스펙터클의 사회>>, 10쪽) 맑스의 <<자본>>을 패로디하여 적은 이 문장에서, 스펙터클이란 알기 쉽게 말하면, ‘구경거리’란 뜻이다. 그것은 “일체의 시선과 일체의 의식이 집중되는 영역”이다. 사실 상품으로 생산되는 것들은 어느 것이나 눈에 보이는 양상이 중요하다. 보기 좋은 과일이 비싸게 팔리고, 보기 좋지 않은 과일은 상품이 되지 못해 버려진다. 보기 좋게 하기 위해 사과에 농약도 모자라 왁스를 바른다는 것은 잘 알려진 비밀이다. 스펙터클이 지배적이 된다함은 시각적인 외양에 의해 지배되며, 그것에 사로잡혀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됨을 뜻한다. 스펙터클이란 실제 삶과 시각적 외양이 분리되고, 그 분리된 외양이 지배하는 체제를 뜻한다. 그래서 그는 스펙터클이란 “삶에 대한 시각적 부정”이자, “삶에 대한 부정의 가시화”라고 말한다(13쪽). 그것은 익숙한 말로 다시 쓰면 ‘소외된’ 삶이다. 스펙터클의 사회란, 삶에서 분리된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사회, 스펙터클에 인간이 예속된 사회를 뜻한다.

스펙터클은 단지 상품에 한정된 개념은 아니다. 죄인을 끔찍한 모습으로 능지처참하는, 푸코가 <<감시와 처벌>>의 모두에서 ‘화려한 신체형’이라고 명명했던 절대주의 시대의 사형 장면 또한 화려한 스펙터클이다. 학생들 무료급식을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디자인 서울’이란 슬로건 아래 거대한 돈을 들여 다리에 조명을 달고 한강에 분수를 만들며 서울을 ‘구경거리’로 만들겠다는 모 서울시장의 기획은 정확하게 서울을 구경거리로 만들겠다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스펙터클로 만들겠다는 전략의 표현이다. 원래의 모습이 무어든 청계천을 개조하여 ‘보기 좋은 시설’로, 그래서 ‘보기 좋은 업적‘으로 만든 덕에 전임시장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일 게다.

이는 스펙터클이 좀 더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은 소위 ‘정치’의 영역임을 보여준다. ‘정치인’들의 주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을, 자신의 언행을 남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는 스펙터클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별 관심도 없으면서도 큰 사고가 난 현장이라면, 즉 시선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눈에 띠는 사진 한 장 박고, 눈에 띠는 말 한 마디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럴 껀이 없으면, 학생들 무상급식을 허용하는 것은 ‘망국적 포퓰리즘’이라며 턱도 없는, 그렇기에 눈에 확 띠는 발언을 해서라도 시선을 끌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 눈총을 받고 입에 오르내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예전에 G8을 보면서 대체 왜 저 많은 돈과 노력을 들여 저런 짓을 하는 걸까 의문이 든 적이 있었다. 이틀 간의 회의 몇 번으로,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전세계의 경제와 정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G20도 그렇다. 이번에 서울서 열린 회담은, 환율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경제적으로 매우 절박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끝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저렇게 모여 회의를 하는 것은, 전지구적 협의와 통치가 보기 좋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런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우리에게 맡겨두라”는 메시지를 담은 일종의 스펙터클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랑시에르라면 ‘치안’이라고 불렀을 지배자들의 ‘정치’(통치!)는 무엇보다 스펙터클을 만들고 스펙터클을 이용하는 ‘스펙터클의 정치’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스펙터클화함으로써, 세상이 그런 생각과 행동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에 최대한 시선을 끄는 광채를 내서 지저분한 것들이, ‘사소한 것들’, ‘별 것 아닌 것들’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광채가 나는 것, 온통 시선을 모으는 스펙터클이 있을 때, 그 주변에 있는 것들은 그나마도 보이지 않게 되지 않던가! 따라서 스펙터클의 정치란 보여주고 싶은 것을 확실하게 보이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보이지 않게 하는 그런 종류의 프로세스라고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의 북한 정부는 스펙터클의 정치에 아주 능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마다 반복되는 재해로 인해 원조를 받으면서도 자존심 구겨지는 장면은 철저하게 거부한다. 인민의 굶주림 때문에 자존심을 구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거기다 ‘3대세습’이라는 아주 난감한 사태조차 ‘절묘한’ 포격 몇 방으로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도 포격에 불타는 스펙터클 하나로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소실되고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사실 이전에도 곤혹스런 위치를 핵시설 관련 뉴스 하나로 일시에 날려버린 것을 우리는 빈번하게 목격한 바 있다. 빈곤과 고립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정치인들이 잘 버티는 것은 이런 스펙터클의 기술 덕이 아닐까 싶다.

반면 이명박 정부는 다른 능력도 없지만, 스펙터클을 다루는 데서도 아주 미숙하고 무능한 것처럼 보인다. 시선을 끄는 것도 좋지만, 얼마 되지도 않는 학생들 무상급식 예산으로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떠드는 것으로 좋은 스펙터클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무감각하고 어리석은 것은 없을 것이다. G20에서 스펙터클을 만들기 위해 지하철과 버스도 세우지 않고 영화관과 백화점도 문 닫게 하여 관계자들 이외엔 어떤 사람도 지나가지 않는 텅 빈 도시를 만들어놓곤 좋아하는 것이나, 전국의 경찰도 모자라 군인들까지 동원해 마치 80년 5월 같은 살벌한 풍경을 만들어 놓고 그걸 멋진 스펙터클이라고 생각하는 감각이라니! 북한의 포격으로 연평도에선 날아드는 포탄에 노출된 군인과 민간인이 죽어가는데, 총탄 하나 날지 않는 멀쩡한 도시에서 지하벙커에 피신하여 지휘하는 장면은, 자신들은 상황의 심각함을 가시화하는 연출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내게는 병사들은 험한 적진에 두고 그저 저만 살겠다고 숨어버리는 비열한 장수를 생각나게 한다(그에 비하면 비행기를 몰고 현장으로 날아가는 푸틴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스펙터클이 필요한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와중에 황급히 한미 FTA 협상을 해버린 것도, 스펙터클로선 너무도 바보 같은 연출이었음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포격으로 연출한 스펙터클은 너무도 강력하여 남한에서조차 문제가 되던 모든 것을 일시에 날려버렸고, 비정규직 파업처럼 그나마 잘 보이지 않는 사건은 더욱더 보이지 않게 묻어버렸다. 그것은 남한에서 진행되던 수많은 것들을 리셋해버린 것 같다. 12월5일, 4대강 반대 집회가 시민단체와 정당까지 합세한 집회였음에도 마치 새로 시작한 운동의 첫 집회처럼 소규모에 그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붕괴가 다가왔다면서 모든 외교적 수단을 손에서 놓아버린 이명박 정부를 살려준 것은 오히려 북한의 정치인들이었던 것이다. 정말 하루 빨리 통일이 되지 않고선, 오랫동안 반복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능란하게 구사하는 이 스펙터클의 정치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여기에 또 하나 추가할 것은 스펙터클의 세계는 구경거리가 될 만한 것, 눈에 잘 보일 뿐 아니라 모두들 기꺼이 볼 만한 것들에게만 입장권을 주는 것 같다. 노르베르-호지의 <<오래된 미래>> 가운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있다. 라다크 지방의 사람들은 모두들 노래를 좋아하고 노래를 다들 잘한다고 한다. 잔치라도 할라치면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거침없이 노래 한마디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그런데 도로가 생기고 ‘근대화’되면서 라디오나 TV가 보급되었고, 가수들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듣게 되면서 노래를 권해도 사람들은 물러서며 노래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노래를 저렇게 잘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무슨 노래를 해”라는 것이었다. 노래를 전문으로 삼는 가수들, 그 화려한 스펙터클 앞에서 사람들은 주눅이 들고 위축되어 노래는 잘 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저 듣고 구경이나 하는 사람으로 ‘분리’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스펙터클이 대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앞서 말한 ‘스펙터클의 정치’에서는 이런 수동성을 슬그머니 요구한다. “정치는 이렇게 시선을 받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여러분은 그저 보고만 있어!” 이런 식의 얘기는 거대한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친 속도로 ‘개발의 삽질’을 다그치고 있는 이명박이 자주 하는 얘기다. “다 해놓고 난 뒤에 보라구. 잘 했다고들 할 테니 말야. 청계천 때 그랬듯이 말야.” G8이나 G20도 그렇다. 여러 나라의 운동가들이 중요하다고 말을 하고자 해도, 그것은 묵살되거나 듣지 않는다. “그건 우리 정치인들이 알아서 할테니 그냥 보고만 있어!” 심지어 여러 나라 운동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조차 못하게 한다.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어 보기 좋은 스펙터클을 망치는 게 싫은 것이다. 시선은 자신들이 독점해야 하는 것이며, 자기들과 다른 생각이 보여선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멋진 구경거리를 망쳐놓는 훼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스펙터클의 정치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스펙터클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고, 시선이 집중되는 것인 한, 그것이 ‘멋들어진 것’이 되려면 잡스런 것, 훼방놓는 것이 끼어들면 안된다. 조그만 잡음이나 외침, 항의의 소리라도 끼어들면, 그 스펙터클은 쉽게 금이 가고 깨어지며, 역으로 붕괴의 형태로 반대의 의미를 갖는 스펙터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웃기는 낙서 하나가 G20 전체를 웃음거리로, ‘구경꺼리’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한 바 있다. “망국의 포퓰리즘”을 비웃는 조롱과 유머들이 스펙터클을 만들려는 잔머리를 거꾸로 돌려놓았음을 볼 수 있었다. ‘행불 상수’의 보온병이 전국민들에게 웃음거리를 선사한 바 있음을, 그로 인해 전쟁으로 폼을 잡고 그럴 듯한 스펙터클을 만들려는 시도에 강력한 폭탄이 되어 되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웃음이 몇 번 반복된다면, 끔찍하고 무거운 전쟁의 스펙터클조차 가볍게 웃어버릴 수 있는 것이 되는 장면을 상상해도 좋지 않을까? 거창한 스펙터클이 지배에 우리가 드보르처럼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조그만 낙서나 풍자조차 그 스펙터클을 깨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응답 3개

  1. andy말하길

    상대방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 취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또한, 본래의 속성을 의도로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겠다
    스펙터클의 정치라는 것은, 본래의 속성을 의도로 오해해서 생긴 결과로 보인다.

  2. 퐁티말하길

    신기하게도 스펙터클로 지금 대한민국이 설명이 되는군요. 글쓴 분의 탁월함이겠죠! 좋은 글 잘 봤습니다..

  3.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기픈옹달, 기픈옹달. 기픈옹달 said: "… 북한이 포격으로 연출한 스펙터클은 너무도 강력하여 남한에서조차 문제가 되던 모든 것을 일시에 날려버렸고, 비정규직 파업처럼 그나마 잘 보이지 않는 사건은 더욱더 보이지 않게 묻어버렸다." http://bit.ly/ev5Pq0 #수유너머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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